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신민주 / 최소한의 단서와 무한한 몸짓

박영택

작가에게 회화란 우연히 본 것으로부터 출발해 그 이후에 파생된 감정과 기억의 누출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문자로 정착되거나 표기될 수 없는 흐릿하고 모호한 것, 힐긋 본 것들에 대한 민감하면서도 자조적인 반응이자 연상과 상상작용이기도 하다. 일단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의 감정선을 건드리고 들어와 어느 기억의 시간대와 순간 감전된 것들을 몸으로 간직한 후 그 단편적인 이미지를 매개 삼아 그것으로부터 연원했던 알 수 없는,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을 칠하고 뭉갠다. 특정 사진이미지가 부분적으로 프린트된 화면 위에 붓질이 올라가는 식이다. 그것은 재현을 지우면서도 무엇을 표현, 상징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회화다. 이 붓질은 분명 재현이나 특별한 의도 아래 조율되고 마감되는 욕망에서 벗어나 있다. 이를테면 그냥 붓질, 아니 신체와 감정, 자기 몸의 현 상태를 밖으로 외화 시키는 절박한 몸짓이다. 목적론적이자 모종의 완결태를 지향하는 데서 빠져버린 붓질, 따라서 더없이 유동적으로 흘러 다닌다. 화면이란 공간에 정처없이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작가의 형언하기 어려운 마음, 느낌의 부침이자 회화가 의미를 가진 시각적 기표가 됨을 부정하고 보는 이의 시지각적 무의식의 개입을 독려하는 편이다.

화면 위에 부착된 수수께끼 같은 사진이미지도 애매하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물을 지시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한 느낌, 흐릿한 흔적처럼 주어졌다. 다만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기억과 상상에 의해 그 무엇으로든 전유되면 그만이다. 흑백 내지 단색톤으로 절여진 사진이미지는 분명 어느 대상의 한 부분이다. 발터 벤야민이 사진에서 발견한 시지각적 무의식을 떠올려본다. 작가는 길에서 느닷없이 마주한 대상의 한 부분을 응시하다 그 세부에 가닿았다. 그것은 자동차 몸체를 감싸고 있는 은색의 비닐, 특히 몸체를 꽉 조이고 있는 주름진 부위다. 자동차 차체를 감추거나 그 안에 담긴 것을 은폐하고 있는 포장, 봉인과 은닉을 보여주는 그 부분이 흥미롭기도 하고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감정과 느낌을 동반했나 보다. 그것은 이상한 불안을 야기한다. 그래서 작가는 그 ‘뒷태’에 매료당했다. ‘필’이 꽂혔다. 이른바 편집증적인 응시의 시선, 혹은 하찮은 대상에서 환각적인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 흔한 것, 또는 버려진 것, 길바닥이나 담벼락 등에 남겨진 것, 정형화되지 않은 것들에서 작가는 강한 미감을 지닌다. 마냥 매혹 당한다. 작가는 자기가 매혹당한 것들을 채집했다. 쓰레기 같고 하찮으며 일탈된 것들에 끌리는 데 그것들은 어떤 순간의 기억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그 이미지를 간편하게 사진으로 담았다. 이제 이미지는 천위에 프린트되고 복사되면서 무수하게 파생된다. 화면에 놓이는 순간 기이한 통로가 되었다. 그 조각들이 화면의 어느 부위에 놓여지면서 마치 바둑판에 돌 하나가 놓이는 순간 사건과 상황이 전개되듯 기묘한 긴장이 파생된 것이다. 작가는 그 위로 거침없는 붓놀림을 순간적으로 몰고 간다. 아마 그 붓질은 수수께끼 같은 사진이미지로부터 발원했을 것이다. 회색톤을 머금은 액체성의 물감은 신속하게 퍼지고 중력의 법칙 아래 아래로 줄줄 흘러, 비처럼 내린다. 화면은 흐릿하고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적인 손맛으로 가득하다. 무척이나 스피디하다. 작가는 딱 떨어지거나 명료한 상태를 싫어한다. 두려워한다. 그래서 완결된 것과는 무관해 보이는 그림이다. 사실 차용된 사진이미지 역시 아무런 내용도 지니지 않는다. 의미가 부재한 것들이다. 그것은 무언의 장식 같다. 사진이 지닌 정보나 기록, 재현을 무력화시키고 그것을 모호한 정서나 느낌의 전도체로 다룬다. 작가는 그저 많이 물감을 올리고 긁어내고 덮고 스퀴즈로 밀고 붓으로 칠해나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도 같다. 그 순간에 깊숙이 빠져들고 몰입되는 시간을 지속시키고 응고시켰다. 다분히 작가가 지닌 센티멘탈리즘과 접촉시킨다.

물리적 공간에서 입수한 사진이미지가 정서적 공간이자 정신적 활력을 자극하는 평면의 회화 공간으로 들어와 함께 하고 있다. 단색의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사진이미지와 급박하게 문질러진 붓질이 공존한다. 기계적 복사와 한 개인의 몸짓이 겹친다. 여기서 사진과 붓질은 서로 다른 공간을 암시한다. 그리고 다시 이 이질적 공간들은 하나로 뒤섞인다. 그렇게 화면 안에 또 다른 화면, 공간이 떠있다. 평면의 공간에 기이한 정신적 공간이나 이상한 공간을 열어둔 느낌이다. 또한 화면은 몇 개의 작은 면으로 층을 이루거나 분할되거나 포개어져있다. 그래서 화면은 창이 되었다. 사실 화면이란 일종의 창이다. 재현회화나 모더니즘 모두 그 창으로서의 회화공간을 가상적으로, 물리적으로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화면이 어떤 느낌을 환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작가의 의도나 예측과 다른, 그것으로부터 부득이 시작하지만 그로부터 멀리 벗어나 이상한 정서가 환기되기를 원한다. 흡사 빛바랜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다.

커다란 회화 이외에 캔버스의 옆구리나 자투리에 우연히 묻은 물감, 흐르는 붓질, 터치 등을 오려서 그 부분을 정면으로 만든 작은 화면이 벽돌처럼 쌓여져있다. 계산되지 않은 우연으로 이루어진 영역, 빈 부분을 잘라서 정면으로 돌변시킨 것이다. 그것은 배제된 시선을 다시 보여주고 모종의 의미를 주는 일이다. 갈린 맷돌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질을 연상시킨다. 그런 것이 고스란히 굳어서 하나의 그림, 장면이 되었다. 그것 역시 시간과 온갖 감정과 기억을 간직한 몸짓, 그리고 중력과 물질들이 어우러진 회화, 무척이나 정서적인 뉘앙스로 절여진 그런 회화다. 이 작가만의 감성과 정서를 간직한, 최소한의 단서와 무한한 몸짓으로 가득찬 그런 회화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