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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진 / 미술책이 있는 그의 풍경

박영택

누군가의 공간을 엿볼 때 우선적으로 책을 본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책은 어딘지 그/그녀의 모든 것을 어느 정도 대변해주는 핵심적인 단서처럼 다가온다. 그의 관심사, 기호, 취향, 그리고 세계관 같은 것들을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기분도 든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양한 책을 소유한다. 그 책들은 그가 어느 시간대에 불가피하게 필요로 했던 모종의 순간을 환기시킨다.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가늠하곤 한다. 해서 그 사람이 읽고 소유한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대충 알 것도 같다. 그 사람의 책은 그의 얼굴이기도 하다.

황용진은 그러한 책을 그린다. 그러나 책을 단지 정물적 소재로 다루거나 그 자체의 묘사로 머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주로 책등을 보여준다. 책의 등에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증거하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 문자, 책 제목은 한 권의 두툼한 책을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책의 제목에 눈길을 주고 그 책의 내부를 살피며 선책할지 어떨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책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관자로 하여금 일종의 쓰여진 문자를 연결해서 가독성의 체계로 배열하는 이른바 문장구성에 참여시키는 편이다.

황용진은 우리에게 여러 책의 제목을 시각적으로 안긴다. 한결같이 현대미술과 관련된 책들이다. 영문자로 쓰여진 책의 제목은 대부분 ‘ART를 포함하고 있다. 이 대문자 ‘아트’와 알파벳으로 적힌 문구들은 다양한 미술사조와 작가, 작품 등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은 미술을 공부하는 작가의 일, 직업, 관심사와 연관된다. 결국 그 책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증명이자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현대미술의 상황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암시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삶, 실존과 관련된 책(책등에 적힌 문자), 일종의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조합하고 배열한다. 각각의 책들은 마치 책꽂이에서 새롭게 배치되고 뒤섞여지듯이 여러 상황성을 연출한다.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보다는 다분히 추상적인 문자를 따라 그리는 일이다. 세련되게 디자인된 현대미술의 여러 책들, 그 책등에 인쇄된 문자꼴, 서체를꼼꼼히 그려나갔다. 오로지 문자로만 미술을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다분히 개념적 미술이 환기된다. 또는 현대미술 자체가 논리의 역사, 담론의 장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은근한 풍자도 감지된다. 그는 그렇게 문자로 굳어진 현대미술을 즐겁게 그린다. 그 책/문자를 갖고 놀이한다. 다양하게 배치하고 책꽂이에서 추방시켜 허공으로 띄우고 날려버리고 마구 주물러 놓는다. 모든 것들이 흐물거리고 녹고 굴절된다. 중력이 법칙이나 현실계의 완강한 법칙에서 풀려난 것인지 혹은 다른 힘에 의해 구부러진 듯도 하다. 이는 책이라는 대상, 견고한 지적 체계, 그 말씀과 이념, 신뢰와 신념이 와해된 동시대 미술의 운명에 대한 자조적인 발언 같기도 하다. 아니면 확고한 논증, 증거, 이성, 사유체계 등을 의도적으로 훼손시키는 제스처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주도하는 유일한 강령이나 확고한 논리란 부재하다. 아니 그럴 수도 없다. 동시대 다원주의하에서 다양한 시각과 논의가 춤을 춘다. 둥둥 떠다니는 미술책처럼 말이다.

아울러 책들은 한결같이 하늘, 구름이 떠있는 창공을 배경으로 서있다. 존재한다. 하늘은 자연, 순수함, 인간의 영역이 아닌 별개의 것, 그런 영역으로 위치한 듯 하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계, 대지에 밀착된 구체적 세계로부터 떠있는 영역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유로 직조된 책의 세계와는 또 다른 대조적인 세계다. 이 둘은 상반되면서도 일정한 한 쌍으로 존재한다. 어쩌면 하늘/자연의 저 무한한 여백과 함께 자유로이 떠도는 구름을 새삼 오늘의 미술상황과 대비시키는 자각이 의도가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근작은 책의 형태 자체를 좀더 자유롭게, 자의적으로 왜곡시키는 한편 일그러진 환영을 고조하는 착시적 조작이 돋보인다. 그것이 효과적이라고 까지 말하기는 아직 어렵지만 그가 미술책이란 오브제/레디메이드를 소재로 해서 그려나가는 책 작업이 분명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징표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그는 그 왜곡시킨 책을 입체로 구현해 놨다. 평면에서의 환영이 실제 물질로 귀결되어 나와 그림과 함께 진열되는 방식은 이제 평면회화와 입체, 그리고 그 모두가 공간에 적극적으로 설치되어 전개되리라는 강력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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