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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녀 / 질료의 연출이 만든 우연의 풍경

박영택

서구현대미술은 무엇보다도 그림을 이루는 조건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림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실체에 대한 반성과 인식이다. 우선 주어진 화면인 캔버스를 하나의 물질, 오브제로 바라보면서 그 납작한 평면성과 사각형의 틀에 주목하는 한편 물감과 붓질 등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몰론 이는 미술개념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동반하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외부세계를 재현하며 특정 대상에 종속되어 있던 그림(물감과 붓질)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이제 재료들은 그 자체로서의 자발적이고 독립된 삶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물감과 붓질은 그 무엇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되는 대신 그 자체로 충분히 시각적 대상이 되거나 ‘회화’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캔버스를 하나의 용기로 파악하고 그 납작한 사각 틀에 물감을 흠뻑 적셔 담기도 하고 두툼한 질감을 갖고 부조적 으로 튀어 올라오도록 하기도 하고 또는 물감을 뿌리는 등 다양한 효과를 내면서 물감 그 자체의 표정과 질감, 물성을 극대화시키는 연출로 나갔다. 화가들은 무엇을 묘사하는 대신에 주어진 화면 위로 다양한 재료를 올려놓았다. 재료들은 물리적 법칙에 따라 흐르고 머물고 응고되고 또는 다른 물질과 만나 예측하기 어려운 또 다른 상태로 전화되면서 회화는 재료를 둘러싼 흥미로운 실험이 되었다. 그것이 추상미술인 한 양상이기도 하다.

남송녀의 작업 역시 주어진 화면과 물감, 재료들 간의 물리적 법칙과 속성을 이용한 흔적만들기로 보인다. 작가는 현대회화를 ‘재료와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업은 재료들 간의 물리적 속성을 파악하고 이를 실험, 이용하여 어떤 시각적, 물리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것이 그림이 되었다. 작가는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후 그 위에 물감을 얹혀놓는다. 재료들을 흘리고 씻고 칠하고 닦아내고 다시 덮어나가는 과정을 반복한다. 화면 위에는 계획,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고 그로인해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작가의 몸과 재료들 간의 만남과 관계설정, 시간과 중력 등의 길항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 그리고 화면을 비추는 빛과 그림을 보는 관자의 이동, 시선에 따라 고정되거나 정지된 화면이 아닌 유동적이고 순간적인 어떤 화면, 장으로 지속해서 변화하는 그런 그림이 연출된다.

우선 바탕 면에 젯소를 여러 번 칠하고 난 후 그 위에 아크릴로 화려하고 인공적인 느낌이 감도는 몇 가지 색, 대부분 중간 톤의 색채를 시술하고 금분과 겔미디움, 젯소 등을 다시 섞어서 칠하고 덮었다. 여러 시간의 층들이 겹쳐 올라오면서 화면은 깊은 공간감을 드리운다. 납작한 화면에 여러 시간이 층들이 흐르고 비춰 보인다. 깊이가 다른 그 위에 이른바 행운을 상징하는 네 잎 크로버 형상이 화면 중심부 혹은 주변에 두드러지게 위치해있다. 그 주변으로 바람결이나 시간의 흐름 등을 연상시키는 붓질, 자취가 부유한다. 그 위로 다시 덮고 씻고 칠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러면 화면에는 물감들이 기포처럼 올라와 붙은 자국, 균열 후에 남은 흔적 같은 혹은 물의 응집력으로 생겨난 물방울 같은 자국이 생생하게 매달린다. 마치 물기 있는 행주로 상을 닦았을 때 생겨나는 잔상을 닮았다.

반짝이는 펄을 전체적으로 뿌리고 난 후 바니쉬와 겔미디움으로 도포하면 그림은 완성된다. 비교적 큰 작업들은 바탕에 ‘반짝이’를 부착하고 그 위에 앞서 말한 방법론으로 그려나간다. 만들어나간다. 그것은 그림인 동시에 일종의 물질을 갖고 유희하는 작업이다. 색채, 물질들이 서로의 속성에 따라 밀고 당기는 일련의 장력이 발생하면서 그림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스스로 열어 보이고 그것이 마음에 들 때 작가의 손이 순간 멈춘 것이다. 그림은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색채만으로 충만한 어떤 비경을 이룬다. 형식적으로는 추상이자 색채로만 이루어진 그림이지만 이 그림은 재현적인 연상과 특정 풍경을 부단히 자극한다는 점에서 구상과 추상의 접점에 위치해있다. 구체적인 크로버 잎의 형상과 추상적인 질료의 연출이 그렇게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화면은 물리적 법칙에 따라 흐르고 응고되고 펼쳐진 물감의 자취가 두드러지게 드리워져있다. 마치 물감/재료란 생물체가 화폭 위에서 살고 있고 생성 중인 듯하다. 그는 물감을 그렇게 ‘생존’시키고 있다. 물감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 그것들끼리 자유로운 생성활동을 하도록 기꺼이 허용하고 있다. 이처럼 남송녀의 그림은 그림을 이루는 물감의 상황성을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물감이 지닌 물리적 특성에 시간과 중력 등 외부적 요인이 개입해서 만들어내는 효과,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한 작가의 몸과 의식 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나로서는 그 풍경이 보여주는 연출과 효과가 궁극적으로 주어진 화면에 강렬한 시각적 ‘임펙트’를 어떻게, 여전히 ‘회화적’으로 남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속에서 그림이 좀 더 풍부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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