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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혜선 / 부엌과 여자

박영택

좌혜선의 동양화는 화면에 밀착된 색채의 층들이 견고하고 투명하게 올라와 겹을 이룬다. 그것은 단단하고 내밀하다. 반복되는 붓질은 질감을 동반하면서 특정 공간에 대한 여러 상념과 회한을 밀어 올려준다. 화면을 두텁게 덮어나가는 색/붓질은 선이 아니라 색층이나 질감으로 자족한다. 질감과 깊이를 가진 화면은 그 위에 얹혀진 이미지의 내용성을 강화하는 편이다. 작가의 기법과 색채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무척 잘 맞아떨어지는 작품이다. 소재도 신선해 보인다. 작가가 다루는 장소는 한결같이 부엌이다.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나 혹은 사람은 부재하고 다만 부엌을 채우고 있는 사물들만이 전면에 펼쳐져 있는 그런 그림이다.

다소 어둡고 침침하면서 어디선가 배어나오는 불빛에 의해 훈훈한 온기가 감촉된다. 어두우면서도 따뜻한 그림이다. 부엌은 항상 열과 온기, 분주함과 활력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식구를 위해 혹은 나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밥을 짓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면 부엌은 무척이나 신성스러운 곳이다. 밥을 짓고 먹을거리를 마련해 삶을 영위해나가는 핵심적 장소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부엌신을 모시고 그곳은 신성시했다. 경건하게 다루었고 몸가짐을 살폈으며 모든 식구들의 삶과 건강을 기복하는 공간이었다. 불씨와 곡식과 김이 모락거리는 따뜻한 밥 한 그릇 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기에 조왕신께 치성을 드리고 부정 타는 일을 극구 두려워했다.

그 부엌은 온전히 여성만의 공간이다. 물론 남자들도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라면을 끓인다. 설거지도 하고 커피를 탄다. 그러나 부엌은 실은 여성의 반복되는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여성들은, 그 부엌에서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부엌은 지겹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불가피하고 절실한 그런 공간이다. 부엌에서 밥을 짓고 무엇인가를 삶고 볶고 지지지 않으면 목숨은 없다. 그렇게 조리된 음식만이 목구멍으로 편하게 넘어간다. 산다는 것은 먹는 일이고 먹는 일은 죽는 날까지 매일, 여러 번 반복되는 일이다. 인간은 자신의 목구멍으로 다른 생명체를 밀어 넣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요리는, 부엌은 여전히 살기 위해 요구된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여자와 부엌은 어떤 관계일까?” 대부분의 여자들은 평생 부엌이란 공간에 메여있다. 그것은 강도 놓은 노동이다. 그것이외에 다른 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가치와 목표를 추구할 수 있고 있어야만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상당수 여자들은 밥 짓는 일로 인생을 소모한다.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준비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겹고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노동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부엌은 양가성을 띤다. 작가는 말하기를 그곳은 행복인 동시에 무덤이라고, 아픔인 동시에 기쁨이라고. 그래서 작가는 ‘그곳’을 그린다.
일하는 여자는 표정과 마음을 지우고 다만 자신의 등을 보여준다. 숙명적인 노동을 견디는 그 뒷모습만을 그려 보인다.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말을, 차마 발설될 수 없는 무언의 말들을 전해준다.

같은 여자의 입장으로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이에 대한 단상을 차분하게 길어 올리고 있는 이 그림은 다분히 페미니즘적 시선을 감촉시키는 한편 여자의 삶에 대한 다소 서글프고 착잡한 감정의 일단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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