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윤정미 / 소비사회와 성적 정체성 그리고 색채

박영택

동물원과 자연사박물관을 거쳐 내곡동 주민, 인사동에 위치한 가게의 주인들을 기록해 온 윤정미가 2000년대 중반에 선보인 사진은 이른바 ‘핑크&블루 프로젝트’ 였다. 그리고 그 작업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핑크와 블루 색의 물건들을 가득 소유하고 있는 아이들의 방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근작은 2005년도에 촬영한 아이의 방을 2009년도에 다시 찾아가 이전과 동일한 상황설정을 한 후 촬영했다. 작가에게 있어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점은 그 공간을 물건, 특정 색채를 지닌 물건으로 가득채우는 일이다. 그러한 일종의 공간 연출은 사진 촬영에 앞서 상당한 시간을 들여 마무리한다. 보통 3-4시간에 걸쳐 그 아이의 모든 물건, 소유물을 배치하는데 앞쪽은 작은 것들로 채우고 뒤로 갈수록 커다란 물건을 배열한다. 일단 물건이 압도적으로 들어차있고 특정한 단색으로 공간을 물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그런 후에 그 물건의 주인인 아이는 그 가운에 어디쯤에 자연스레 위치한다. 그 아이의 성격, 기호, 물건과의 조화, 느낌이 잘 맞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촬영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방에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일단 자신이 갖고 있는, 소유하고 있는 것 모두가 방 안에 가득 펼쳐졌다. 마치 벼룩시장에서 온 듯하다. 그 아이는 자신이 소유한 물건의 가운데에 앉아있거나 서있다. 그/그녀는 그 물건의 주인이다. 아이들은 물건을 통해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기호, 취향, 취미 혹은 나름의 감각을 발산한다. 사실 아이들의 이 소유물은 아이가 좋아해서 사들이고 모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사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부모의 선택이 우선적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기호와 취향이 스며들어있을 것이다. 5, 6살 이전까지는 아이들은 대개 부모에 의해 특정 색채와 물건들을 수집하거나 소유한다면 그 이상의 나이에서는 어느 정도 자의식과 자신의 판단이 개입해 자기 스스로 좋아하는 색채와 물건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선택의 기준이란 것은 선천적인지 혹은 후천적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다소 애매하다. 우선 이 사진은 아이들이 주인공인지 아니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이 단색의 온갖 물건들이 중심인지 잘 가늠이 가지 않는다. 특정 색에 대한 강박과 집착인지 혹은 상품, 물건에 대한 과도한 욕망인지 그 구분도 역시 애매하다. 그러나 보는 이들은 전적으로 화려한 색상을 간직한 물건들에 우선적으로 압도당할 것이다. 무척이나 비주얼이 쎄다. 그것은 순간 우리를 황홀하고 행복하게 하거나 환상을 갖게 만드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매장진열대를 연상시킨다. 수많은 상품들로 가득한 그곳은 다름아닌 낙원이고 유토피아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 속 아이들 역시 아주 일찌감치 자본주의형 인간으로, 소비사회의 욕망에 의해 주조되는 그런 아이들일 것이다. 그로인해서 매력적이고 새로운 상품의 디자인과 색채에 대한 시각경험 역시 훈련된다. 그것은 분명 대중매체의 위력 속에서, 광고의 힘에 의해서 우선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이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이 소유한 사물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은연 중 발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 물건, 색채가 나를 또 다른 나로 변신시켜 주리라는 약속(허영의 약속)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하는 약속이다. 여기서 그 사물의 소비행위는 결국 기호의 소비이고 그것은 타인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의 표출에 해당한다. 현대 도시인들은 다양한 방식의 소비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 지으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의 소비사회의 논리가 결합한다. 소비자의 소비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산업자본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이 걸린 문제다. 새로운 상품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아케이드, 백화점, 잡지, 신문, 인터넷과 대중매체 그리고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이다. 대중매체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소비자들이 기호가치가 옮아간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사들인다.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시각경험’이다. 이른바 소비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상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환각의 체계이다. 사물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이다. 사물에 대한 욕구에는 특정한 대상이 없다. 나는 어느 특정의 물건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욕망한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대신하거나 재현하는 그 무엇이 바로 기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옷/사물이라는 실제의 물건이 아니라 가상의 혹은 허구의 이미지를 욕망한다. 소비 역시 하나하나의 기호들(소비들)을 배열하고 통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의미를 만들어내는 의사소통이 수단이며 교환의 구조인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소비행위는 그 사회의 코드화된 교환의 체계 안에 들어간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비는 타인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의 표출이다. 사회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다분히 그가 소유한 자본, 물건이 그/그녀를 대신한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이를 처음 만날 때 그의 외모뿐만 아니라 그가 걸친 옷의 브랜드, 착용하고 있는 물건들의 수준, 그의 미적 감각과 세련성 등을 동물적으로 파악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일종의 계급적 구분을 가능하게 한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자본이 있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별도로 필요하기에 하류계급이 따라올 수 없는 미적취향을 고집하고 선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취향은 사회적 방향감각으로 기능”(부르디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성적 구분에 따라 핑크와 블루를 선택하고 수많은 물건들을 구입하는 행위의 저간에는 고도 소비사회의 메카니즘이 한 몫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들의 컬렉션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면서 계속해서 고아고에 등장하는 새로운 상품을 사달라고 그토록 졸라댈 것이다. 아이들은 탐욕스럽고 사악하고 집요하다. 아이들도 당당한 소비의 주체들이다. 아이들과 관련된 시장은 그 어느 시장보다 크고 넓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주머니를 열 각오가 되어 있는 이들이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꿈꾸고 열망하고 욕망하는 것들을 해주는 것이 부모의 능력이라고 여기기에 그렇다. 자신의 아이가 그 물건을 소유하는 순간 아이의 꿈을 실현해주었다는 부모로서의 의무와 역할도 한 몫 한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항상 특정한 색채의 옷, 사물들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것은 항상 그/그녀의 얼굴이나 몸과 함께 옷, 기호품, 색채가 동시에 달라붙는다. 화가 고낙범은 자신의 지인들의 얼굴만을 커다랗게 그려내는데 그 얼굴은 한결같이 단색으로 물들어있다. 그가 기억해 내는 이들은 그렇게 단일한 어떤 색으로 물든 존재들이다. 여기서 작가가 선택한 색채들은 지극히 사적이고 친밀한 대상들에 대한 특정한 기억들로 통하는 경로나 매개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명료한 얼굴이면서 동시에 모든게 흐려지고 어렴픗하게 느낌으로만 남는, 그 틈을 비집고 다가오는 강렬한 추상성을 띤 하나의 색채로만 가득 물든 그런 기이한 초상이다. ‘핑크& 블루프로젝트’는 분홍색을 특별히 좋아하여 그 색깔의 물건을 많이 갖고 있는 여자 아이들과 파란색 계통의 물건들을 역시 많이 갖고 있는 남자 아이들과 그들의 물건을 촬영한 사진이다. 그래서 여자아이하면 핑크색이 떠오르고 남자아이는 블루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그런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성별에 따른 색채의 구분을 암시한다. 아마도 거의 모든 아동들의 경우 여자아이들은 핑크색, 남자아이들은 블루색의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취향과 기호가 일정부분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진 속에 들어온 아이들은 결국 특정 색과 물건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은연중 규정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들의 색채선택은 이미 그 사회가 사회적, 관습적 으로 규정하고 구분한 성별에 의해 판매, 유통되는 색을 다시 그 부모들이 인습적으로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대중매체와 광고를 통해 남자, 여자아이들의 성적 정체성이 규정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타고난 성性이라는 형질의 차이와 사회적 성(젠더)과 관습의 차이, 그리고 자본주의의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특정 상품에 대한 욕망 등에 의해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선호하는 색과 사물간의 여러 관계가 무척이나 촘촘히 얽혀있는 그런 사진이다.

윤정미는 거리에서 아이들을 캐스팅했다. 길가나 지하철 혹은 쇼핑몰의 남자, 여자아이 상품 코너에서 말이다. 아이들은 대개 부모와 함께 그들이 원하는 물건을 사고 있는 중이다. 혹은 특정한 색채의 옷과 물건을 착용하고 있는 이들이며 뉴욕과 서울에서 만난 이들이다. 미국인 가정에서의 아이들과 한국인 가정에서 길러지는 아이들이다. 미국은 다문화사회이기에 다양한 인종들이 있는데 윤정미 사진 속에는 대개 한국 교민의 자제와 미국 백인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가정상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비교적 풍족한 물건을 구입해줄 경제적 능력이 있는 이들이다. 이 가정은 쇼핑을 자주 할 시간적 여유가 있고 자기 집을 낯선 이에게 공개해도 될 만한 이들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건이 불가피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이 정도로 구입해주고 동시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성적 정체성에 따른 구분을 물건과 색채를 통해 주입하거나 그 원칙 아래 물건을 분배하거나 수집하는 배려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잠복해 있을 것이다. 사진 속에는 아이들과 그들이 소유한 물건의 목록들이 백화점 진열대 마냥 혹은 박람회장에 온 듯이 가득 펼쳐져 있어서 대개 그 물건의 상표와 캐릭터, 색상들이 한 눈에 조감되는 편이다. 전일적인 시선 속에 내려다 보고 한 눈에 온전히 파악하게 만드는 구도다. 우선적으로 그것들은 오로지 핑크와 블루계통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한정된 공간에 물건들만이 가득 들어차 있다. 사물로 이루어진 왕국이다. 여자아이의 방과 남자 아이의 방은 분명 다르다. 여자아이들은 공주이미지, 대중문화의 스타들이 자리하는가 하면 남자아이들의 방에는 스포츠 스타사진이나 자동차, 운동기구들이 우선적으로 많다. 생각해보면 그런 물건의 선택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측면이 있다. 어린 여자아이가 자동차나 공룡인형을 고른다거나 남자아이가 핑크빛 미미네집 가구나 바비인형을 고르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성적 정체성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갖고 논다. 그렇게 교육받기도 하고 그렇게 태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구분은 모호하다. 어쨌든 글로벌한 브랜드에서 생산해낸 온갖 물건, 캐릭터, 애니메이션, 영화 등이 전 세계 아이들의 감성과 취향, 기호와 소유물을 동일하게 동질화, 평면화 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특정한 상표와 기호를 소비하고 그로인해 유사성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동시에 아이들은 그 물건들을 통해 유년을 기억하고 추억을 쌓아간다. 아이들에게 물건, 기호품이란 결국 그것과 관련된 어떤 시간을 저장하고 내재화하는 것들이다. 아이들에게 그 물건들은 아버지나 엄마에게서 혹은 할아버지나 , 할머니, 고모나 삼촌 , 친구들로부터 특정한 날에 받은 선물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시간과 추억을 쌓아두면서 자신의 유년을 기억한다. 따라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물건이 비로소 빛바랜 지난 시간의 소멸된 흔적을 부감시켜 주는 결정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아이들은 그 장난감이나 선물을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장난감에 이내 질려하고 흥미를 잃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윤정미가 찍은 이 사진은 그 주인공들에게는 자신의 유년시절, 특정한 시간을 기분좋게, 아름답게 추억화시켜주는 그런 사진이다. 특히나 아이들처럼 너무 빨리 자라고 순식간에 커버린 이들에게는 이 사진의 의미는 더욱 커보인다.

윤정미는 자신의 아이들을 양육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들이 특정 색채를 선호하고 있음을 흥미롭게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이 ‘핑크&블루 프로젝트’작업의 시작이다. 딸아이는 대개 7살 이전까지는 일종의 공주병에 걸려서 핑크에 집착하고 전형적인 여성상, 공주상을 모방한다. 동일시한다.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파랑색의 물건, 옷을 소유한다. 그런데 그것은 또래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는 현상이다. 아울러 전 세계 아이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공통성이 있다. 그러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이전까지 좋아했던 핑크나 블루가 다소 촌스럽고 유치하다고 여기면서 자신이 선호하는 색채의 물건들을 소유하기 시작한다. 여전히 핑크와 블루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보라나 또 다른 색채로 점진적인 이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어떤 영향에 의해서일까? 아마도 그것 또한 광고의 영향이 절대적이리라고 여겨진다. 아이들이 보는 텔레비전과 잡지, 책 등에서 특정 색채와 캐릭터는 집중적으로 전파되어 영향을 끼치고 아이들은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들이 특정 색채를 선호하거나 특정 물건에 집착,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과연 선천적일까, 아니면 광고의 영향에 의한 후천적인 것일까? 사진 속 아이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 앞에서 행복해 보인다. 그것들과 함께 해온, 하고 있는 현재의 순간을 증거한다. 그 물건은 따라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거의 결정적인 존재들이다. 물건이 없다면 아이들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나 어른들은 한결같이 너무 많은 물건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 물건이 없다면 그들의 존재 역시 부재하다. 자신이 소유하고 간직하고 있는, 착용하고 있는 물건이 그/그녀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말해주는 징표가 된다. 그것은 상징체계다. 누군가의 정체성은 물건이 대신한다. 그것이 소비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이다. 아이들 역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길들여져 가고 있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의 소비욕망을 학습 받고 있다. 특정 물건과 특정 색채를 소유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른 계급차이를 무의식적으로 내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자본의 위력이 개인의 삶 깊숙이 침투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계급의 논리‘로 판가름한다.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감각의 차이’가 있다는 소비사회의 무의식이 그것이다. 취향은 단지 개인의 주관적 욕망이 아니라 ‘계급’의 지표로 기능한다. 우리가 매 순간 부딪히는 아주 사소한 소비의 선택조차도 우리를 조작해온 집단적 아비투스의 보이지 않는 지휘 아래 있다고 부르디외는 말한다. 아비투스는 단지 제도나 교육을 통해 집단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아비투스는 ‘인식’을 통한 학습효과를 넘어 ‘육체’에 각인된 무의식과 몸에 밴 습관이기에 더더욱 포착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취향은 노골적으로 ‘끼리끼리’임을 확인하기에는 왠지 낯 뜨겁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현대인이, 외모만으로는 쉽게 판단할수 없는 낯선 타인의 계급을 판독하기 위해 사용하는 세련되고 우회적인 암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르디외의 이론은 무엇보다도 ‘몸의 철학’이다. (정여울) 몸은 한 개인이 흡수해온 모든 문화적 기호의 집결체다. 육체에 각인된 수많은 관습과 욕망의 문신들이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눈에 비친 제도 교육은 사회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합법적인 장이다. 부르디외는 이 같은 상징적 권력이 세계를 만드는 권력이라고 말한다. 남자/여자, 높은/낮은, 힘센 /연약한 등등,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모든 대립항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결정하고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적 권력은 집단적 ‘호명’을 통해 공공화된다.

생각해보면 윤정미의 작업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특정 공간에 놓인 존재, 물건들에 대한 관심을 지녀왔다. 한정된 공간에 어떻게, 어떤 물건들이 배치되고 연출되어 있는가? 그것은 그 존재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그런 질문은 다분히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이자 시선을 드러낸다. 이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그래서 단지 어린아이의 방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성적 정체성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그리고 사회적 성(젠더)은 또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선천적 형질과 아비투스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아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과 그들의 취향과 기호, 감각이란 보편적인가 아니면 개별적인가? 등과 같은 여러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윤정미의 사진은 이처럼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우선적으로 시각적인 볼거리를 강렬하게 안겨주는 화려한 사진 속에 고구마줄기처럼 문제의식들이 이처럼 수북하다는 사실이 더없이 흥미로운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