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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가족그림을 통해 본 한국전쟁과 개인의 기억

박영택

한국인의 가족관-이중섭과 가족

우리는 누군가의 가족으로 태어난다. 태어나는 순간 내 존재는 이미 특정 가족, 가문과 연계되어 있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다. 나는 그 누구의 가족 구성원으로서 생을 출발한다. 가족을 떠난 개인의 탄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삶은 따라서 그 가족구성원 속에서 자리매김되고 강제된다. 나란 존재는 그 가족 안에서 습득되고 훈육된다. 그래서 나는 가족과 분리될 수 없다. 한국인에게 가족이란 결국 자기 자신이다. 가족이란 언제나 ‘나와 한 덩어리가 되는 대상’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가족 공동체에 의해 규정되는 자아다. 한국인의 자기 이해 방식이 공동체적 자아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는 전통사회에서의 가족관에 영향 받는다. 전통사회의 윤리와 가족관을 규정했던 유교에 의하면 인간 생명의 탄생과 함께 주어지는 부모와 자식 간의 원초적 관계야말로 가족의 핵심적인 구조이다. 유교에서 가족은 탄생과 양육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언어를 위시한 오랜 문화적 전통을 배우면서 험난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훈련을 쌓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자가 생각한 이상적인 인간공동체는 가족공동체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족은 유교적 사회구조의 원형으로 이해되었다. 유학에서는 인간이란 세상 안으로 던져지기에 앞서 부모형제의 혈육이 있는 가족 안으로 던져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교적 관점에 의하면 ‘내가 먼저 있고 나서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족이 먼저 있고 나서 내가있다. 나의 가족 혹은 나의 조상들이야말로 나의 실존의 원천’이다.
이처럼 인간의 태어남은 늘 가족 안으로의 태어남이고, 인간은 가족 안으로 태어나 그 안에서 길러진 다음에야 가족 너머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유학의 인간관이자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관이다.

가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한국인이다. 이 가족공동체 의식은 여전히 한국인의 자기정체성의 근간으로 작동한다. 이런 인식을 그림으로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가 중 하나가 이중섭이다.
이중섭은 자신의 가족구성원 속에서만 규정되는 존재였으며 오로지 가족 안에서 자기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위상을 찾고자 했다. 따라서 그 가족공동체와 분리되어 버린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으며 힘들어했다. 그는 짧은 생애동안 상실된 가족공동체를 복원하기위해 애쓰다 사라진 이다. 그에게 가족의 붕괴, 해체를 안긴 건 다름아닌 전쟁과 분단, 그리고 가난이었다. 그 같은 현실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무능, 가족 없는 자신이란 상황에 처해 서서히 소멸해가는 과정 속에서 끝없이 가족구성원의 일체를 희구하고 꿈꾸면서 그 안에서 비로소 행복과 위안을 받는 자신의 모습, 가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이중섭 그림의 거의 모든 것이다.

새삼 이중섭의 그림과 그 그림 속에 드러난 한국인의 가족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사회나 체제를 이루는 기본 단위이기 때문일 것이고,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일상생활을 매개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이자 한 개인, 특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 가족이 동시대 삶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그림, 가족그림이 주는 시사점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중섭의 그림은 한국현대미술과 가족관계 내지는 한국인의 가족공동체의식을 엿보는데 매우 핵심적인 텍스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이 한 개인/가족에게 미친 영향, 그 트라우마와 개인의 기억의 형상화란 측면에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이미지라는 생각이다.


한국 전쟁과 가족그림

시인 고은의 지적처럼 1950년대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의 근원으로 만들어졌다. ‘처절하고 무모한 죽음과 삶’이 그것이다. 한국 전쟁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던 한국의 모든 전통적 질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특히 가족제도가 급속히 붕괴되었다. 아버지를 정점으로 구축되는 가족의 질서, 더 나아가 가족이 사회‧ 국가적 질서의 기초를 이루는 전근대적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족적 관계에 대한 요구가 집단적으로 표명되는 시점은 주로 현실의 모든 것이 깨졌다는 위기의식- 이데올로기적이든 현실적이든 -과 그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이 팽배한 시기”이다.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가족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내면화하는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가족이 본격적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주제가 된 것은 1950년대 부터다. 한국 전쟁과 전후의 피폐한 현실 속에서 가족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준거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국 전쟁은 전면전의 성격을 띤 전쟁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했고, 대부분의 가족이 구성원의 죽음· 실종· 상해를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회와 국가의 정체성 위기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가족, 개인의 정체성 위기를 낳았다.

전쟁의 파괴와 살육을 체험한 전후 미술인들 중 몇몇은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노출된 가족, 해체의 위기에 처한 가족을 중요한 그림 소재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은 가족적 질서 내부로 폭력적으로 진입하여 가족의 위기를 빚어낸 ‘근대의 광기’를 체험했지만 이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비판의식보다는 단지 소박하고 단란한 가족상을 열망하고 꿈꾸는 편이었다. 아마도 전후에 살아남은 이들에게 가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원을 가능하게 해줄 보상 영역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을 경험한 미술인들 또한 가족의 해체를 경험하면서 가족의 안전을 지켜내지 못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지만, 결국 가족의 재구축을 통해서 새로운 사회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을 꿈꿀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가는 물론, 이웃조차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만이 유일하게 의지할 안식처였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은 고통스런 현실의 도피처였다. 전쟁으로 인한 허무 의식의 최종 종착지가 가족이 돼버리고,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나 가치가 급속히 해체되자 그 해체적 징후에 대한 위기의식의 반발로써, 가족의 삶을 자기 삶의 복원으로 기대보려는 의식이 만연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가족은 훼손된 전체를 재조직화 하는 상상적 준거로 상정되었으며, 척박한 사회에서 ‘유일한 위안으로서의 가족’이라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국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니까 “전쟁의 경험에 의해 구성되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한편으로는 무사회적 고립자들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관계를 상상하는 준거로 작동”한 것이다.

한국 전쟁은 수많은 이산가족을 남겼다. 전사와 실종으로 가족을 잃거나 남북으로 갈라져 가족끼리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절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가 하면 전쟁의 남긴 상처와 기억에 사로잡혔다. 가족 구성원의 이산은 결과적으로 이별, 죽음, 그리움, 아픔의 가족상을 낳았다.
1950년대 전쟁으로 와해된 가족을 소재로 다룬 당시의 대표적인 작가는 장욱진, 이중섭, 박수근이다. 한국 전쟁이 초래한 위기의식, 즉 “개인의 실존을 위협하는 체제의 폭력과 광기에 대한 미학적 반응물”이 이들의 그림에 어느 정도 드리워져 있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전쟁을 통해 극심한 가난을 체험했고, 가족과의 이별‧ 죽음‧ 해체 등을 겪어서 생긴 상흔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림에 투영하고 드러낸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이중섭은 거의 전적으로 가족 상실의 아픔과 그에 대항해 가족의 회복을 지속적으로 그림으로 다룬 이다. 그는 현실의 상실에 맞서 그림 속에서만이라도 가족공동체의 안락과 희구를 몽상한 이며 자신의 가족을 온전히 자기 품안에서 수렴하는 남편, 아비로서의 자아로 상정한 이다. 그래서 결혼과 함께 아이들이 태어나고 죽고 가족과 헤어지는 지난한 삶의 과정이 그림의 세계와 정확하게 조응한다.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한 삶
1945년(30세) 5월 원산에서 결혼
1946년 좌우이념의 대립 속에서 첫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사망
1947년 아들 태현 출생
1949년 아들 태성 출생
1950년 12월 월남
1951년 제주도 서귀포 알자리 동산마을에 기거, 12월 다시 부산 범일동으로 거처를 옮김
1952년 7월 생활고로 인해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를 거쳐 일본으로 떠남
1953년 여름 통영으로 옮김
1954년 5월 무렵 진주에 거주
1954년 초여름-1955.3월, 서울 종로구 누상동과 신촌에 거주
1955.3-1956.9; 41세로 죽음의 길


이중섭의 삶과 가족 그림

이중섭은 1916년 4월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1번지에서 2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1920, 이중섭의 나이 4세)과 부친의 부재는 막내아들인 이중섭이 유독 어머니의 품안에서 성장하고 어머니와의 각별한 정을 형성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늘상 어머니와 결합하고 싶은 강력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그가 평양외가댁에서 학교를 다니다 어머니를 만나면 어머니의 품속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었다고 하며 열 두 살까지 어머니의 젖을 빨았다는 얘기는 그러한 사실을 증거한다. 그 같은 열망은 결혼 이후 아내에게로 자연스레 이전되었다고 본다. 고향을 떠나 월남하면서 겪는 어머니의 부재는 이제 부인(야마모토 마사코, 山本方子)이란 대상으로 옮겨간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했던 그 또한 그의 아들들에게만은 아비 없는 아들로 두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에게 정체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애매했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일본인으로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고 일본인 부인과 결혼했으며 전쟁 후 어머니와 고향으로(강제로) 떨어져 나와 낯선 남한으로 내려왔고 이내 가족과 헤어졌고 가족 없이 사망했다.

프랑스 유학을 꿈꾸었던 이중섭은 1943년 귀국한다. 원산으로 돌아와 있던 이중섭은 집근처 고아원에서 잠시나마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이는 징병을 막기 위한 형(이중석)의 배려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 징용이나 징병에 끌려가 단란했던 가족이 파괴되는 과정을 목도했다고 한다. 따라서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가 매우 많았다. 그 기간 동안 이중섭은 어린이들의 티없이 맑은 모습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는데 특히 첫 아들의 사망으로 인해 이후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첫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곧 디프테리아로 죽은 후 이중섭은 죽은 아들의 관속에 여러 장의 그림을 넣어주면서 “혼자서 외로울 테니까 이거라도 가지고 놀라”고 하였다고 한다. 시인 구상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그림(이른바 부장용 이미지)은 복숭아를 들고 노는 어린이 그림이였다고 한다. 그것은 민화이자 이른바 주술적인 이미지다. 이처럼 이중섭에게 그림이란 다분히 기복과 주술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중섭이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영진과 함께 작업 중이던 풍경화 한 점만을 들고 피난길을 나선 날은 1950년 12월10일 이였다. 피난시절 내내 이중섭은 일찍이 겪어보지 않은 고난에 직면하였다.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도 곤란을 몰랐으며 북한에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던 그였으므로 부산에서의 생활은 매우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춥고 배고픈, 극빈의 생활을 하던 이중섭은 1951년 부산을 떠나 제주도에 도착한다. 서귀포에 도착한 그는 송태주씨의 집에 얹혀살았는데 1.3평의 골방과 부엌이 딸린 자그마한 공간에서 그의 가족은 밭에 나가서 채소를 캐어먹고 된장 등은 이웃에서 얻어다 먹으며 살았다. 피난민 증명서를 받아 식량 배급을 받기도 했으나 가족 수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랐기에 바다로 나가 게를 잡거나 해초를 뜯어 와야 했다. 후에 이중섭의 부인은 제주도 시절이 힘겨웠던 시절이였지만 가족이 함께 모여살 수 있어서 행복했었다고 회고 하였다.

1951년 겨울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건너갔다. 범일동의 매우 작은 한 칸 방에서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생활고는 계속 이어졌다. 이중섭에게는 가진 자산도 친척도 없었으며 이른바 ‘악착같은 성정’도 없었다. 계속되는 참담한 생활고로 인해 아이들은 모두 영양실조에 빠졌고, 아내의 건강상태는 더욱 나빠져 급기야 결핵으로 인해 각혈을 하기에 이르렀다. 최악의 상황을 피해야 했으므로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인 수형소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아내와 두 아들은 1952년 여름, 제3차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된 이후 이중섭의 생활은 더욱 처참해 졌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요행이 두 끼 먹는 날도 있기는 있지만 우동과 간장으로 하루에 한 끼를 간신히 때우며 사는 그러한 비참한 생활이 계속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섭은 가족과 헤어진 1952년 말 또는 그 이듬해 초부터 아내와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려 보냄으로서 가족 간의 유대를 이어갔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엽서그림)는 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아내에 대한 극진한 애정의 표시로, 아직 어려서 글을 읽지 못하는 두 아들이 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편지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자상함이 잘 드러나 있다. 모두 38통의 편지가 현존한다.

1953년 말에서 이듬해 봄까지 그는 통영에 거주했다. 이 시기는 비교적 평안했던 시기로 그의 대표적인 걸작들이 생산되는 시기다. 일본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이후 여름 통영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서 그린 대표작인 바로 <부부>다. 최석태는 이를 봉황으로 본다.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서로 만날 수 없는데 애를 쓰고 있는 따름이다. 봉과 황이 만나고자 하나 그렇지 못하듯 실제로 이중섭은 아내와 결합하려고 애썼으나 헤어진 채로 죽고만 것이다. 상상속의 새 봉황은 예로부터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매우 친근한 존재로서 한 쌍이 서로 입 맞추거나 함께 춤추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왔고 고귀함과 상서로움에 표상이자 금슬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중섭은 1954년 6월 무렵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 정착한 후 그린 그림이 길 떠나는 <가족> (1954)이다. 또 다른 <가족> (1953~1954)그림은 위쪽의 아이에게 긴 하늘색 색띠를 들도록 하여 화면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도록 했고 자신은 꽃을 쥐고 있으며 아내 쪽에는 새를 배치한 것이다. <닭과 가족> (1954)은 사람과 닭 가족을 병치하여 ‘가족의 생명과 사랑을 낳는 근원’으로서 강조해 표현하고 있다. 오른쪽 남자는 닭을 교미시키기 위하여 발정하도록 항문에 숨을 세차게 불어넣고 있다. 이중섭의 그림에는 이 같은 성과 생명, 에로티시즘이 교차한다. 그에게 그림이란 생명의 복원에 기여하는 행위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삶 자체였다. 그것은 생명의 사멸을 부정하는 주술의 세계다.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가족과 어머니> (1953~1954)는 아내와 아이들이 꽃에 둘러 쌓여 흰 비둘기와 놀고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지아비가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가족을 둘러싼 휘장을 들어 올리며 맞이하라고 하는 듯하다. 완벽한 가족 간의 결합을 열망했던 그는 가족도를 그리되 거의 대부분 아내와 두 아들이 함께 등장하는 자신의 가족을 그렸다. 가족과 함께 뭇생명체들이 하나가 되어 선회하고 일체를 이룬다.

<길 떠나는 가족1>(1954)은 이중섭 가족 그림의 핵심이다. 그림엽서에는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대우고 아빠가 옆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다. 소달구지 위쪽은 구름이다.”라고 쓰여 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일본으로 헤어져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험난한 현실에서 벗어나 가족들이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든 그림이다. 그는 가족과 헤어지기 이전의 행복했던 그 순간에 사로잡혀있었다. 그 정지된 시간, 추억만이 고통스런 현실을 견디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때의 행복이 영원히 고정되기를 염원한 것이다. 여기에는 마치 어린 아이적 무시간성이 들어있다. 이 그림 속 황소는 선량하고 평화스러운 존재이며 힘과 노동, 희생력의 위력이자 동시에 자신의 분신이다. 새는 정신적 해방과 평화를 보여주며, 어린아이는 단연 그의 아들이자 다산과 풍요, 행복을 표상한다. 한편 전인권은 이 그림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소의 색이 연노랑인데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이 연노랑은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며 따라서 전체적으로 삶에의 욕망이 제거되는 과정,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스며있다고 본다. 소 또한 절대적 위용을 자랑하는 소가 아니라 평화로운 표정이라면서 이는 가족과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면 자신은 결국 죽음이란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여기서 떠나고자 하는 남쪽 나라는 죽음 저편일 것으로 추정하면서 죽음의 예감 같은 것을 꿈꾸는 듯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그는 1954년 초 편지에는 '만나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기술한다. 가족과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면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중섭은 분명 아내와의 만남이 없는 생활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자아는 너무도 확고하게 아내와 가족에게로만 확대되어 있었다. 가족과의 재회를 열망했고 가족을 부양할 책임 있는 가장이 되고자 했던 그는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자 스스로 자멸의 길을 갔다. 그의 장모와 부인은 그가 떳떳한 경제적 능력을 갖춘 남편과 아버지가 돼서 일본으로 오기를 원했으나 당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제대로 된 여권과 정상적인 가정 문제(경제적 능력)가 풀어야 할 문제로 대두되었지만 정작 그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 수단이 없었다. 가족을 이끌어 나갈 주체로서의 자리를 갖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한편 가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여긴 부인에게 서운함을 갖는다. 그는 죽기 얼마 전 '남덕이 미워, 남덕이 미워'라고 토로한다.

이중섭가족 그림의 의미

이중섭은 그토록 가족을 그리워하고 다시 함께 살 것을 기약했지만, 고통스러웠던 당시의 현실 속에서 자멸해갔다. 그가 남긴 모든 그림(한국 전쟁기에서 죽기 전까지 5, 6년의 그림이 이중섭 그림의 거의 전부다)에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가족과의 만남을 염원하고 기다렸던 작가의 고독한 삶과 고통이 배어 있다. 그의 말처럼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중섭의 그림은 철저히 자전적이다.

'그림이 내게 있어서는 나를 말하는 수단밖에 다른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이중섭)
가족과 분리되지 못한 자아의 이야기가 그의 그림이다. 그에게서 가족이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가족과 늘 한 덩어리여서 그것과 분리된 자신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가족 안에서 벌거벗고 존재하며 밥 먹고 배설하고 껴안고 사랑하는 모습으로서만 존재한다. 촉각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원형으로 순환(영원과 원형이미지)하며 몸이 아니라 살로 존재한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원형 구도인데, 이는 가족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모습이다. 가족 구성원들 중 한 사람이라도 빠질 수 없으며 동시에 가족 이외의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구도, 완전한 한 가족을 표상하는 구도다. 그의 자아는 너무도 확고하게 아내와 가족에게로만 확대되었다. 이는 강한 결속과 배타성을 지닌다. 사실 한국인이 공유하는 원형의 뿌리는 가족이며 따라서 이중섭의 원형적 미의식 역시 가족적 동질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동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원형과 곡선이란 논리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에 바탕을 둔 것이며, 그 인간적 유대의 근본은 가족이라는 사실과 맥이 닿아 있다. 이중섭의 원형은 그 가족들이 거주하는 집의 울타리에 가까운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니까 전인권의 지적처럼 이 원형적 미의식은 가족적 동일성을 전제로 하며,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처절한 추구인 것이다. 이처럼 그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오직 가족 공동체에 의해서만 규정되었는데 이는 보편적인 한국인의 자기 이해 방식과 맞물린다. 따라서 이중섭 예술은 누군가의 누구가 되어야만 삶의 의미가 있는 그러한 ‘공동체적 자아관’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는 누구보다도 더 강한 공동체적 자아를 가졌던 이였기에 가족과 하나가 되어 살아야만 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중섭은 유독 가족과 부부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우리들 부부보다 강하고 참으로 건강한 부부는 달리 또 없을 것” 이라고 하거나 “일찍이 역사상에 나타나 있던 애정의 전부를 합치더라도 자신들이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참된 애정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중섭이 그린 가족그림은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이중섭의 염원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좀 더 넓혀보자면 일제 강점기 이래 우리 민족/가족이 겪은 수난과 비극을 극복하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중섭은 가족과 헤어진 후 온통 가족이라는 주제에 매달렸다. 그의 그림은 아내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창조력과 통로를 잃고 반복되는 패러다임으로 고착되어 갔다. 그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정신구조를 가진 사람인데, 혼자 살아야 했던 것이 비극의 원인이었다.

이중섭의 가족 이미지는 단순히 개인사적인 것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한 시대의 우울과 절망이 고스란히 스며있으며, 온 몸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예술가의 초상이 솔직하게 새겨져 있다. 삶의 터전인 고향과 가까운 혈족을 북에 두고 남하했던 가족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스런 삶을 영위하던 모습은 전후 한국 사회의 보편적 일면이다. 삶의 보호막인 가족과 집을 잃은 이 미적 주체는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여인, 자식, 즉 자신에게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타자를 끝내 죽음의 세계, 가난과 이별, 남편과 아버지 없는 가정으로 몰아놓은 것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력한 가장의 모습인 것이다. 생활에 무능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작가에게 마냥 설움을 주었다. 그 설움으로 이중섭은 자신을 무한히 책망하고 파괴한다. 근원적인 세계에 대한 향수와 그것을 가로막는 생활 세계에 대한 환멸이 빚어내는 역설적인 감성이 이중섭 그림의 근간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이라는 이상적 공간에 가족을 격리시키고 그곳에서 가족 공동체의 안위를 도모한다. 여기서 혈연으로 묶인 가족은 사회 전체의 질서와 우주의 질서가 응축된 독자적인 소우주이자, 존재론적 안전감과 세계에 대한 신뢰 회복의 첫걸음으로 인식된다. 가족은 삶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가능케 한다. 이는 가족공동체의 회복과 이른바 ‘아버지 되기’의 욕망이다. 아이들에게 생명의 거처이자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장 위대한 아버지상말이다. 죽는 날까지 이중섭은 가족 해체에 직면하여 가족을 온전하게 지켜내지 못한 ‘아비’, 즉 가장의 무책임을 탓하며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으로 “하는 일 없이 폐만 끼치며 떠도는 자신을 극도로 학대하는 자신의 순도 때문에 앓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허탈상태에 빠져들었다.
전쟁으로 잃었던 삶의 터전과 가족을 전쟁이 끝난 후에도 회복할 수 없었고, 여기에서 오는 허무감과 불안 의식이 전후에 더욱 가족이라는 주제에 집착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돌보고, 가족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한 가장의 욕망이 절박하게 투사되고 있다. 완전한 가족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든 것을 대리만족시켜주는 유토피아의 형식으로 서사화된다. 얼싸안고 춤을 추고 나체로 뒹굴고 연결되어 있다. 꿈꾸는 방식으로밖에는 가족 이미지를 표현할 수 없었던 그에게 이런 그림은 일종의 환상이다. 그림에 현실적으로 가족을 복원할 수 없던 작가의 상황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족과의 결합이 현실적으로 더욱 불가능해지고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무능에 시달리던 그에게 이른바 ‘원공포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53년을 전후해서 이중섭에게는 ‘원공포증’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도너츠건 방문의 손잡이건 아니면 둥근 발가락이건 여자의 눈동자이건 원형을 만나면 ‘기가 막힌 듯 좋아하다가 도망쳤다’고 한다. 이는 가족과의 연대를 그토록 갈망하던 그가 현실적 상황과 자신의 무능에 부딪쳐 가족과의 재회를 새삼 두려워한 이른바 ‘불안’의 징후로 여겨진다.

나가는 글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이산가족문제는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남과 북의 체제 경쟁은 한반도를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지역, 그리고 냉전지역으로 남겨놓고 있다. 1953년 형성된 ‘정전협정’과 그로인한 ‘정전체제’는 언제든지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놓고 있다. 이렇게 한국전쟁이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이 전쟁이 무엇이며, 우리 역사상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그리고 그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한국전쟁은 여전히 한반도에서 한국인들의 생존권 문제를 위협하고 있으며 전쟁 후 살아남은 모든 이들에게, 미술인들에게 지워지지 정신적 외상을 남겼으며 그것이 그들 작품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한국전쟁을 체험한 미술가들이 가족이라는 주제에 집착한 이유는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고 직계가족을 지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가족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며 불완전한 현실을 보상해주고 ‘상실된 나’를 ‘온전한 주체’로 복원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고 상상한 것이다. 국가마저 나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자들은 세계에 대한 신뢰 회복의 첫걸음을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공동체의 유대의식 속에서 찾았다. ‘혈연으로 묶인 가족은 사회 전체의 질서와 우주의 질서가 응축된 독자적인 소우주이자 존재론적 안전감과 세계에 대한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었다.

당시 가족에 대한 그 같은 욕망은 전후 현실에 대한 위기감, 불안, 비판에 입각하여 지금과는 다른 현실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기대를 배반하고 비껴갔다.
이중섭의 그림 또한 한국전쟁의 상흔과 직결되어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것은 없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해체되고 망실된 가족이 스며들어있다. 전쟁을 체험한 한 개인의 비극적 삶과 전쟁에 대한 기억과 외상이 그의 가족그림으로 형상화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한국전쟁에 대한 남한 내의 기억은 개인간의 비균질적인 기억의 재현에 관심을 갖기보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양산한 균질화된 집단기억으로 양산되어 왔다. 한국전쟁은 집단기억으로 전수된다. 국가 혹은 민족의 호출을 받아 형성된 집단기억은 일종의 구성물이다. 집단기억은 실체적 기억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문화적, 사회적 기획 속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이 집단기억은 개인들의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낙차와 편차를 거세하여 균질한 기억으로 가공한다. 기억은, 과거는 살아남은 자를 숙주로 하여 무한 반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기억은 더욱 중요하다. 왜 중요하냐면 이는 집단의 기억과 싸우는 일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개별 작가들이 기억하고 재현하는 한국전쟁의 이미지와 상흔은 소중하다. 그것은 공식적이고 반공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성된 한국전쟁의 집단기억, 공적 기억의 허구를 깨는 일이고 틈을 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이 얼마나 이루어져왔느냐는 무척 회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섭이란 존재는 새삼스럽다. 그는 한국전쟁과 분단, 그로인한 가족사의 비극이란 정신적 외상을 대상으로 해서 작업한 이다. 우리가 이중섭의 그림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겪은 개인사적인 비극이자 동시에 한국전쟁이 당시 한국인 모두에게, 그 가족구성원들에게 보편적이고 공통적으로 남긴 상처를 기억하는 일이다. 제대로 기억하기 힘든 타인에게 다가서는 일이다. 타인의 과거는 우리 개개인의 사적인 체험과 역사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함부로 내 것인 양 대변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와는 거리가 먼 역사적 사안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기억이란 단순히 한 사람의 사적인 과거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과거에 몰입하는 것이다. 타인들의 과거란, 말하자면 역사와 한 사람, 양자가 이에 참여하고 이를 증언하며, 그 일부인 동시에 그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중섭의 가족그림은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좀 더 의미 있는 대상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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