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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숙 / 어느 할머니의 얼굴과 뒷모습

박영택

캄캄한 어둠을 대면하고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다. 흑백사진 속에서 빛나는 이 색조의 변주는 절여진 세월과 시간의 무게, 한 여자의 생애를 섬세한 모노크롬으로 빚어낸다. 전체적으로 균등하고 평화로운 빛은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대상을 감싸고 있다. 은색의 머리카락을 풀어 귀 뒤로 쓸어내린 이는 자신의 벗은 몸의 뒤태를 보여준다. 목과 어깨 위로 풀어내린 머리카락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어깨선이 얼굴과 등을 구분하는 경계처럼 슬그머니 자리하고 있다. 그 선을 통해 앞과 뒤가 분리되고 보이지 않는 정면의 얼굴과 등 뒤와 아래쪽 몸을 상상하게 한다. 등은 아래를 향해 기우는 신체의 일부이다. 우리가 여자의 무게를 생각하는 것은 등을 볼때다. 이 여자는 오로지 자신의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뒤는 앞과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다. 인간의 모든 것은 정면에 나타나있다. 그러나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해서 뒤쪽이야말로 진실이라는 미셀 투르니에의 문장이 잠시 떠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정면에 나타나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뒷모습을 타인의 시선에 내준다. 사실 얼굴 역시 나보다는 다른 이의 시선에 온전히 맡겨진 대상이다. 얼굴과 달리 벌거벗은 등과 뒷모습은 제한된 이의 시선에서만 보여진다. 나신의 뒷모습은 알몸으로 만난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편이다.
착의의 뒷모습을 누가 본다는 사실은 다소 깨림칙하고 불편한 시선의 달라붙음을 인식시킨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의 시선이 관음증적으로 뒷모습을 응시한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나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만이 나를 독점해서 본다는 것은 결국 내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소유된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뒤를 보라는 이 허용의 시선은 내 몸을 마음껏 편애하라는 투항의 제스처다. 몸을 벗는 다는 것은 나의 몸을 타인의 시선과 손길에 내주는 일이다. 다소곳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표정과 얼굴의 모습을 감춘 체 이 할머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뒷모습만을 독대하게 한다. 사진에 의해 가능해진 오랜 응시 아래 보는 이들은 찬찬히 늙은 얼굴과 몸의 디테일을 관조한다. 더듬는다.

보는 이의 시선에는 우선적으로 하얀 머리카락과 어깨 선이 들어오고 그리고 귀와 그 아래로 굵게 지나가는 주름들이 다가온다. 은색의 머리결과 주름 그리고 드문드문 비치는 검버섯은 오랜 시간의 결과 그늘을 감촉시킨다. 탄력과 무게를 잃고, 윤기를 망실한 머리결과 피부는 메마르고 까칠한 상태에서 자기 존재의 무게를 죄다 내려놓는 중이다. 이제는 죽어 사라졌을 이 할머니의 뒷모습은 한때 지상에서 보여지고 만져지는 육체를 가진 이의 한 순간의 모습이다. 사진은 그렇게 존재했다가 망실된 이의 육체를, 존재를 오랫동안 응시하게 해준다. 작가는 친분이 있는 한 할머니의 얼굴과 벌거벗은 뒷모습을 찍었다. 할머니의 얼굴 정면을 부분적으로 건져올린 사진과 고즈넉이 고개를 숙이며 등을 보이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 할머니는 스스럼 없이 카메라앞에, 지인의 시선에 자기 모습을 맡겼다. 뒷모습의 사진인 경우, 누군가의 얼굴임을 식별하거나 감상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없이 그저 뒷통수와 어깨, 등만을 조심스레 열어보이는 장면이다. 그것은 정면성의 이미지, 초상사진을 위반한다. 거스른다.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를 다시 보여주는 그런 이미지다. 시선의 욕망 앞에 모든 것이 단박에 드러나고 알려지는 사진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을 통해 보여지지 않는 부분을 상상하고 유추하게 한다. 어깨 너머로 마지못해 들여다 본 듯한 얼굴이 드러난다. 아니 얼굴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다만 측면만이 보는 이의 시선 쪽으로 융기한다. 그래서 귀는 돌올하게 솟아오르고 머리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이 리드미컬하게 흐른다. 그 선은 몸에서 발아한 기이한 털들이자 얼굴과 머리부분을 구분짓는 영역임을 증거한다. 쪽을 지었을 머리가 지지대를 상실하고 무방비로 흘러내린다. 온통 하얀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시간과 세월 속에 탈색된 그 색채는 모든 것을 겪어낸 이의 종말같은 지점에서 가능한 기념비적 증좌다. 그 하얗게 새버린 머리카락을 통해 이 할머니가 살아왔을 삶과 인생을 온전히 가늠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인생이란 자기 생의 긴 시간을 겪어왔고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침묵 속에서 은빛의 머리털만이 파문을 짓는다. 그것은 결코 풍성하거나 찰지진 않지만 그 어떤 머리카락보다 서사적이다. 자신이 한 여자임을 증거하고 평생 그 머리카락을 감고 빗어넘기면서 단장하고 자기정체성을 표상했을 것이다. 그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애무되었을 것이고 이런저런 세파에 시달려 탈색되고 조금씩 빠져나갔을 것이다. 마음의 여러 근심과 한 숨에 의해 헝클어졌을 것이다. 작가는 이제는 생의 욕망과 여자로서의 성적 정체성을 조금은 탈각하고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노쇠하고 오그라든 여자의 몸을 대상화했다. 얼룩과 등, 그리고 머리카락에 집중해서 말이다. 할머니란 여자의 몸은 무엇일까? 그간 사진과 회화에서 끊임없이 아름다운 육체, 여체로 재현되어 온 것은 오로지 젊은 여자들이었다. 싱싱하고 탄력적인 살들로 풍성한 몸들이 관능적으로 시각화되어 왔다면 장숙이 찍은 할머니는, 늙은 여자는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여자의 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몸은 시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피부위에 서식하는 시간의 자취와 그늘이 발에 밟히는 이 사진에는 그렇게 시간에 저당잡혀 있고 세월 속에서 조금씩 소멸하다 어느 순간 무로 돌아가 버리는 육체의 허망함과 덧없음이 침처럼 고여있다. 그래서일까, 할머니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 속 눈동자에는 침같은 눈물이 어른거리는 듯도 하다. 그 몸과 얼굴은 할머니의 것이자 결국 나의 것이기도 하다. 장숙은 그렇게 할머니의 눈과 등에서 그것을 보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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