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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진 / 집과 숲, 공생의 관계

박영택

최해진은 종이에 수묵채색으로 도시의 주거공간을 그렸다. 구체적인 현실의 한 풍경인 동시에 그로부터 추출된 공간이다. 사실적이고 핍진한 묘사가 건물의 외관을 더듬고 있다면 집주변에 빽빽한 숲이 춤을 추고 더러 집안의 창에는 나무들이 자라나는 비현실적인 장면이 공존한다. 집에 숲과 자연을 첨가하고 그 둘의 친연적 관계를 더욱 고조하고 있다. 집이 채색에 의해 사실적으로 재현되고 있다면 집을 둘러싼 공간은 수묵선염이나 채색물감이 번지고 퍼져나가는 식으로 연출되었다. 집이나 건물은 사람들의 육체가 일하고 쉬는 곳이자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은닉하는 장소다. 집이야말로 타자와 구분되고 분리된 상태에서 온전한 가족구성원만이 생을 영위하는 공간이다. 집은 완강하고 고립된 장소이자 동시에 편리하고 자유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친근한 공간이지만 타인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을 소유하면서 그 집안에 가족공동체의 생을 유지, 관리한다. 아울러 그 집은 그 집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실존을 구축하고 있는 핵심적인 장소다. 최해진의 그림 속에는 도시의 보편적인 주거공간이 밀집해있거나 그것들이 나무와 숲, 해와 별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적조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른바 낮동안의 사회생활, 노동과 일이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 비로소 휴식과 안락을 경험하고 있는 집의 외부가 점등하는 불빛과 드문드문 피어오르는 풀과 밤하늘, 별빛의 광채에 의해 반짝이는 장면이다. 도시의 야경이지만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기계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의 성격을 이미지로 보듬어내는 편이다.

공간이란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의 시간과 그동안 되풀이되었던 특정한 경험이 축적되고 있는 장場이다. 그리고 공간이란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삶이 조직되는 구체적 형식이고 경험과 사유가 여타 다른 사회적 요소들과 직조되도록 하는 물리적, 인식적 지반이다. 또한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가 하면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물리적인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공간은 물질적인 측면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는 정체성과 인식을 형성하는 사회적 의미 또한 지니는 것이다. 아울러 도시의 공간은 ‘장소’들로 구성된다. 공간이 추상이라면 장소는 구상에 해당한다. 공간이 ‘공존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양상’이라면 장소는 그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총체이며, 공간이 구조화된 체계로서 서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장소는 풍경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또한 공간이 사유의 대상이라면 장소는 체험의 대상이다. 여기서 일상생활이 총체적인 것처럼 장소 또한 총체적이다. 도시 속의 집이란 공간, 장소는 이처럼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제적 대상’이다.

작가는 도시의 그 집들을 관조한다. 문제적 공간을 생각해본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드는 시간, 하나씩 점등하는 불빛으로 드러난 방안과 집의 외부를 바라다보면서 그 안에 살고 있을 누군가의 삶과 그 몸을 떠올려보았던 것 같다. 그들에게 집이란 공간은 무엇일까? 나에게 집은 어떤 곳일까?

집밖의 세계가 불안하고 두려우며 또한 무한한 경쟁과 이기와 욕망으로 들끓는 곳이라면 집은 그런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고 격리시켜주는 공간, 즉 인간이 자연의 적대성과 거기서 오는 물리적 위협과 불편함, 심리적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다. 세상에 시달리고 지쳐버린 내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씻어주며 평안을 되찾게 해주는 공간이 집이다. 따라서 작가는 집이란 공간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원천이며 힘이고 열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개별적인 공간이 모여서 동네/도시를 만들고 세계를 만든다. 따라서 작가는 그 작은 공간/집이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빈곳처럼 느껴지고 하등의 차이가 없는 물리적인 실체로 보이겠지만 실은 그 안에는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무한한 에너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네들의 사랑과 온기가 있으며 나아가 다들 생을 희망하고 꿈꾸면서 자신들만의 낙관적인 세계상을 유토피아처럼 그 거주공간에 힘겹게 가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집이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그 주변에 둘러쳐진 숲과 나무와 같은 식물성의 세계로 인해 가능하다고 한다. 숲은 생명을 상징하고 나무가 우거진 숲은 물의 순환과 토양의 생성, 보존에 깊은 영향을 주며 많은 생물이 서식지로 기능하는, 그야말로 생명의 장이라는 것이다. 숲은 “세상만물의 원소를 품고 이성보다는 비현실적인 신비함의 세계로 생명력을 발휘”하기에 인간이 거주공간과 반드시 함께 자리하고 있는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밤이라는 시간, 별과 달 역시 그러한 신비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장치가 된다.

작가의 그림은 한결같이 밤풍경이다.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집들이 층층이 쌓아올려지거나 빼곡히 밀집해있다. 예를 들자면 한 그림의 제목 역시 <7시 47분>이란 구체적인 시간을 달고 있다. 그 시간은 가족들이 집으로 귀환하는 시간이다. 밤이 되어 보금자리로 회귀하는 시간인 것이다. 동시에 밤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기운이 은연중 뿜어져 나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밤은 꿈꾸고 상상하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다. 그림 속에는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 등이 빌딩과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고 전면에 나와 있다. 다세대주택이나 여러 가구가 한 곳에 모여 사는 그런 집들의 외형이 흥미롭게 그려져있다. 그 각각의 집의 형상은 그만큼 다채로운 삶의 이력과 생의 상황을 증거한다. 대부분 위에서 조망한 시선은 마치 산수를 그리던 시선이 고스란히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각도가 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공간 속에는 사적 존재뿐만 아니라 익명의 존재들이 몸으로 쓴 삶의 이력, 개별적인 존재들의 입김과 발자국, 역사에 등재되지 않은 이들의 소박하지만 절실하게 살았던 소소한 내력들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따스한 시선으로 집들을 훑어나가는 작가의 마음은 그 집들에 더 많은 숲을 선물처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에서는 자연과 집의 관계란 비정하다. 녹지는 마냥 지워지고 망실되고 경제적 이윤에 의해 차가운 물질로서의 집들만이 좁은 공간에 밀집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사정이다. 작가는 그 같은 장소에 무성한 숲과 나무를 꿈처럼 안겨준다. 이 식물성의 세계가 집들을 보듬고 감싸고 있다. 제 스스로 완벽해 인간의 작위가 전혀 필요치 않았던 자연 속에 주거공간을 만들고 그 소박한 장소에서 늘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선조들의 삶의 유토피아를 재현한 것이 ‘산수화’였다면 최해진의 이 그림은 삭막하고 비정한 도시의 집들에 산수화에서 엿보는 자연과 삶의 그 상생적 관계를 힘껏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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