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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유성 / 셀 수 없는 세계

박영택

제유성의 그림은 작은 장난감들을 화면 안에 빼곡히 채워놓은 것 같다. 아이들이 놀다가 어지럽혀 놓은 것들 같기도 하다. 화면 가득 채워지고 쌓여진 사물들은 공간공포증을 떠올리는 한편 집요한 수집과 소유의 욕망 또한 보여주는 것들이다. 아이들의 갖고 노는 장난감이 구축한 흔적은 어른들 세상의 축소판이다. 아이들의 육체 안으로 허용될 수 있는 규모로 이루어진 사물, 세계는 어른의 육체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사인 셈이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이나 장난감 들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대리물, 이른바 ‘alter-ego’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들은 비논리적으로 뒤섞여 있는 삶의 양극적 측면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구축한 기이한 세계는 놀이와 유희의 흔적 속에 자신들의 모순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한때는 나/우리의 세계였지만 지금은 낯선 타자가 된 그 시공간을 순간 맞닦드리게 한다. 어린 시절 인형과 장난감을 갖고 놀았던 그 때의 추억과 기억, 어떤 상황성을 상기시키는 편이다. 인형과 장남감은 실제 인간과 사물을 그와 유사한 것으로 대체하고(의사모형물) 아이들은 이를 가지고 어른의 세계를 ‘시뮬레이션’한다. 연기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가상의 왕국을 건설하고 구축하면서 방어적이고 폐쇄적 세계상을 구현, 그 안에서 심리적인 안도감을 유지하기도 한다. 혹은 기존의 질서에 편입되기도 보다는 다른 세계의 질서, 어른들이 만든 영토가 아닌 다른 영토를 꿈꾼다. 그것은 현실 안에 가설한 비현실의 세계, 영토이다. 작가는 그 같은 유년기의 놀이체험을 다시 평면의 화면 안에 그림그리기를 통해 추체험하고 환생시킨다. 생각해보면 미술이란 것 역시 현실세계에 구멍을 내고 비현실의 세계상을 가설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림의 세계, 자신이 허용하고 제어하고 통어하는 사물/이미지들은 현재 자신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일상의 힘겨움과 충돌한다. 제유성의 이 집요하고 편집적인 그림그리기는 그런 현실의 충돌과 갈등을 해소하거나 혹은 비교적 안전한 그림 안에서 소멸시키는 완충작용과 관련된다. 어린아이들의 그림 그리기와 동일한 욕망이다.

사각형의 캔버스 화면은 실재이자 동시에 가상의 공간이다. 그것은 현실계가 아니라 상상 속에서 아니 그림 속에서만 가능한 모종의 상황, 상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림에서는 무엇이든 상상되어지고 감행된다. 경계도 없고 금기도 없다. 작가는 그 안에서 작은 단위체인 사물이미지를 가지고 이를 무한히 증식시켜가면서 어떤 풍경, 상황을 만들어나간다. 비교적 커다란 화면에 아주 작게 그려진 형태, 사물은 기본적인 도형들이자 레고, 장난감 부속품, 그리고 짝을 맞춰 결합되어야 할 최소한의 단위들이다. 삶에서 필요한 물건, 도구의 형태를 닮았으며 실재하는 것들의 미니어춰이기도 하다. 이 조각, 파편들은 다른 것과 서로 합쳐져야 어떤 상태를 만들 수 있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완벽한 짝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직전의, 흩어진 개별단위들이다. 이것들은 원근과 사물간의 관계가 무화된 진공 속에서 부유한다. 명확하고 분명한 형태를 지닌 것들이 모여 추상적인 풍경을 만들었다. 크기가 작아지고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사물의 크기관계가 지워진 상태에서 이 사물들은 미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들은 오로지 작가의 자의적 선택과 관심에 따라 배열되고 재편되었다. 그림 그리는 순간, 그 과정과 시간 속에서 작가는 비로소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놀이한다. 이 유희적 그리기는 마치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모든 것을 상상하고 적극적으로 즐기는 체험으로 녹아든다. 그래서 작업은 일종의 ‘축제’가 된다.

그 축제 같은 그림 안에는 본인만이 추구하는 세계에 대한 꿈이 펼쳐진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그림을 그려나가고 공간을 파들어 가는 한편 사물들의 크기와 관계를 자의적으로 구성해나가면서 즐긴다. 그것은 흡사 단어들과도 같다. 다양한 단어들을 결합해 문장을, 자신만이 독해 가능한 텍스트를 만들어나가는 흥미를 안고 있다. 여전히 작가는 집과 건물을 연상시키는 기호들을 반복적으로 그린다. 외부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보호해주는 보금자리나 안식처가 집이란 공간일 것이다. 집에는 문과 창문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통로들이다. 경계와 경계를 허물고 연결시키는 그 틈/사이가 작가의 주된 관심이다. 창이나 문은 정신들이 왕래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안과 밖, 외부와 내부가 하나로 이어지는 접점이다. 창과 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도 인다. 작가는 그것이 궁금하다고 말한다. 아울러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는 부재하지만 의인화된 물체들과 구슬, 씨앗, 알(생명체)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며 구르고 퍼져나가는 장면이다. 그것은 마치 삶이 터져나갈 것 같은 심정의 시각화로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작가 자신의 심리적 전개도에 매우 유사하다.

작가는 무수한 시간동안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현실적 삶의 중압감이나 심리적인 부담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평면의 화면에 부유하는 형태들은 두께를 지닌, 음영을 간직한 그래서 요철과 입체감이 나는 사물의 형상이다. 아이들의 레고게임의 부속들 같고 장난감 집기의 부품들 같다. 집과 계단, 탁자나 의자, 사각형과 다양한 형태들은 알록달록한 색채를 지닌 미끈한 플라스틱질감으로 마감되어 있다. 그것들은 공간에 마구 쏟아져 나와 떠돈다. 셀 수 없이 증식되는 이 수많은 개체들은 공간을 저마다 채우고 점유한다. 셀 수 없다는 것은 시선에 복종하거나 길들여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계이지만 눈에 보일 수 없는 세계를 역설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 자체로 독립되고 완결되어 보이는 세계, 그러나 불안정하고 불명료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로 자족되는 상황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어쩌면 쓸모를 상실해 보이는, 덧없이 떠도는 사물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당당하게 위치시킨다. 이 셀 수 없는 무한함, 양의 과다, 중첩은 이 세상과 현실에 대한 은유 같다. 한정되고 제한된 몇 개의 사물들이 배열과 만남을 달리하면서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어 보이는 것은 관계성의 지향과 소통과 인연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덧붙여 반짝이는 구슬들이 사방에 흘러넘치면서 생명체가 발아하고 증식된다. 딱딱하고 각진 사물성의 세계가 아니라 부드럽고 유기적이며 흐물거리는 질감으로 말랑거린다. 복잡하고 마구 뒤섞인 상황의 강조는 미로 같은 삶의 부산함과 산란함 역시 보여준다. 아이들의 ‘색칠하기 놀이’처럼 공들여 각각의 도형, 형상을 칠하고 음영을 만들고 요철을 이루어 그것들끼리 어우러진 어떤 세계상도 보여준다. 그런데 그것은 계획적이거나 목적적이지 않고 과정 중에서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그려나가다가 우연히 그렇게 되어버린 세계다. 그것이 작가가 보는 세계일 수 있다. 자기만의 요새나 왕국을 건설하고 그 안에 은거하는 이 꿈꾸기는 자폐적인 동시에 고립과 은둔을 희구하는 마음의 반영이다. 지독하고 고집스러운 그리기로 버텨나가는 자신만의 삶에 대한 이야기, 독백이기도 하다. 시선들이 속수무책인 그림 앞에서 나는 그 독백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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