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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영 / 숲에서 만난 생명

박영택

더없이 적조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나무 몇 그루와 이런 저런 꽃들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고 그 사이로 작은 새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녹색과 연보라, 혹은 하늘색을 닮은 단색조의 배경 위로 자연의 한 풍경이 꿈처럼 펼쳐졌다. 적막한 오후의 어느 시간대, 햇살이 환하게 부서져 온 자연 풍경이 사금파리나 비늘처럼 눈이 부시게 반짝이고 그 안에 서식하는 온갖 생명체들이 고요히 수런대며 즐거이 공생하는, 조화로운 그런 장면이다. 인간의 형상은 지워지고 오로지 나무와 풀과 꽃, 그리고 새와 햇살과 바람만이 자기들끼리의 삶을 만끽하고 있다. 자연은 경계를 나누어 서로 다투거나 분리되지 않고 공생한다. 자연은 모든 생명체를 모두 힘껏 껴안는다. 자연은 그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를 무한히 회임하고 길러내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자연을 어질다(仁)고 여겼다. 덕을 지닌 자연/산은 분란과 다툼, 마찰음이나 상대를 희롱하는 현란한 수사 없이 내내 평화롭다. 말을 지운 자리에 자기 생의 본능에 충실한, 순리와 이치에 합당한 작은 몸짓만이 그림자처럼 고요하다. 바글거리는 무수한 생명체들의 이 평화로운 공존은 무척이나 경이롭다. 인간으로는 꿈도 꾸기 어려운 경지다.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만들고 저지르는 온갖 세속의 것이 이내 남루하고 구차함을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연에 대한 작가의 그윽한 관찰과 경험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편린이 편안하게 감촉되는 그런 그림이다. 좋은 그림이란 결국 자기 삶의 반경과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사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는 자신의 집 주변을 감싸고 있는 자연/숲에 대한 경험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 숲에 대한 일종의 심상적인 기록이자 상징적인 이미지를 빌려 쓴 단상, 일기의 성격을 지녔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비교적 한적하며 풍요로운 자연과 이마를 맞대고 살 수 있는 공간으로의 이주는 그간의 그림세계를 좀 더 구체화하는 동시에 심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여전히 자연이 인간의 삶과 예술에서 절대적인 원형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사실 자연만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느끼고 모방할 따름이다. 작가는 그 자연의 빚어내는 아름다움과 변화무쌍함과 놀라운 조화를 그림으로 옮기고자 열망한다. 그래서 자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소요하고 알고자 한다. 제대로 느끼고자 한다. 여기서 미술은 자연의 외형을 모방하는 동시에 ‘나’ 역시 자연계의 한 부분이란 사실에서 연유하는 연대감, 그리고 인간의 현실적 삶과 자연계에 대한 상대적 인식 등으로 넓혀가면서 이에 대한 여러 느낌과 감상이 다시 그림 안으로 수렴 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래서일까, 소은영은 일상에서 늘상 보고 접한, 깨달은 자연/숲에 대한 이미지를 기술한다. 그것은 실재 하는 자연풍경인 동시에 작가만이 보고 느낀 또 다른 자연풍경이다. 자연 속 생명체들을 단순화시킨 그림은 그 이미지, 기호들이 넓고 아득하게 펼쳐진, 그래서 원근법에 의하거나 특정 시점에서 바라보거나 구획하지 않은, 마냥 무한함을 불러일으키는 평면성이 강조된 화면위에서 유영한다. 그것들은 마치 떠다니거나 부양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확정적인 형태가 아니라 생성적인 형태들이며 고착되거나 정지되어 있는 것이기 보다는 가변적이며 모호하기까지 하다. 사실 그것이 자연이고 생명체의 본래 모습이다.

특히 장지에 수간채색으로 오래 우려내고 침잠시킨 색채의 바다, 뜰 위에 그려진 나무와 풀에 반해 새의 형상은 종이를 오려 붙여놓았다. 이 콜라주는 평면위에 자그마한 융기를 일으켜 촉각적인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그려진 그림과 달리 그 위에 부착된 존재/대상을 강조하기도 하고, 납작한 평면위에 ‘사건’을 일으키는 한편 부드럽고 감각적인 손맛, 모필의 감촉과 그로인해 생기는 윤곽선을 대신해 그것과는 다른, 다소 기계적이고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외형의 선을 충돌시킨다. 또한 작가는 화면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반짝거리는 실/줄을 올려놓았다. 팽팽한 긴장을 주며 도열한 선들은 그림위에 올려진 오브제로서 그 실의 반짝임이 숲속을 비추는 햇살의 느낌을 시각화해준다. 또는 일정한 결들이 바람이나 공기의 흐름 혹은 드리운 발 사이로 바라보는 자연풍경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촘촘히 쳐놓은 줄이 오히려 화면에 풍성하게 일군, 회화적 맛으로 가득찬 ‘내용’을 부분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인상도 든다. 자연이란 거대한 생태계는 엄정한 질서와 순환의 구조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는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고 각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제 스스로 삶을 온전히, 충실히 영위한다. 특히 식물성의 존재들은 제 몸에 햇살과 공기와 물을 받아들여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 자족한다. 그것들이 무수한 또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연명시킨다. 또한 인간에게 아름다움도 선사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계절마다 피어나는 제 각기의 꽃들과 나무와 풀, 그 사이로 이런저런 생명체들이 뱀처럼 지나간다. 특히 작가의 그림 속에는 새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새들은 날개를 접고 작고 얇은 다리로 걸어 다닌다. 천천히 보행명상을 하듯 지나간다. 그런 새의 여유로운 자태는 결국 작가의 분신에 해당한다. 작가 역시 그렇게 집주변의 자연을 소요하면서 은밀한 즐거움을 맛보다보면 이런저런 생각과 몽상이 거품처럼 일어나고, 그러는 동안 자기 마음도 자연처럼 고요히 가라앉는 체험을 경험 했었을 것 같다. 자연 속에서 저렇게 살아가는 생명체들, 새들의 생애에서 작가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나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것이 단지 상투적인 자연예찬이나 감상적인 경험보다는 주어진 환경, 자연의 엄정한 구조망 속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삶 안에, 자신의 몫으로 은일하는 이의 삶이 무엇일까라는 문제의식 같은 것이었으리라고 본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결과적으로 투명한 외로움과 목숨 가진 유한한 존재들이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서글픔 같은 것을 만난다. 거대한 영원 앞에서 찰나적인 생을 살다 소멸될 운명에 처한 이들의 꿈같은 삶이 그런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소은영의 그림은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그보다는 고독하고 서글픈 슬픔의 힘이 더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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