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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률 / 신화적 세계와 합성된 인물산수화

박영택

박항률의 그림은 전통적인 인물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우며 숭고한 자연풍경이 광막하게 펼쳐져있고 그곳 어딘가에 한 사람이 고독하게 은거하고 있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물론 군자나 신선을 꿈꾸던 선비 대신에 소녀(혹은 머리를 깍은 중성의 인물)가 위치하고 있고 단정학 대신 백로나 작은, 나비 그리고 신화에 등장하는 비어나 인면조, 천마와 같은 반인반수 등이 인물 주변을 맴돌고 있다. 새나 나비는 인물과 영적인 교류를 나누는 존재로 다가온다. 화면 속 소녀는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와 영적인 교류를 통해 이른바 물아일체의 상태를 희구한다. 열망한다. 관조와 명상을 통해 자연의 신비를 체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는 의지다.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는 그림 속 인물의 눈은 보는 이를 동참시키면서 함께 저 세계로 유도한다. 등잔이나 촛불, 더러 달빛은 깨어있야 하는 눈을 은유한다. 옛선비들이 자연풍광 앞에서 가만히 자연을 응시하고 물을 바라보고 관조와 명상을 통해 자연의 본질, 이른바 도를 깨닫는 한편 바람직한 인간 삶의 원형을, 이른바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그림, 자기 삶의 수양적 차원에서 기능했던 인물산수화의 한 변용을 이렇게 달콤하게, 조금은 우수적인 분위기 아래 만나고 있다. 21세기 인물산수화인 셈이다.군자를 꿈꾸는 선비라면, 나아가 신선이 되고자 한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를 보여주는 이미지이자 삶의 공간에 어떻게 거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경구처럼, 벼락처럼 안기는 그림이 인물산수화인데 이는 일종의 종교화이자 주술적인 이미지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동양화의 사회적 기능의 하나가 바로 ‘은자적 삶의 이상화’이다. 나로서는 바로 이 지점이 산수화의 핵심적 기능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결국 현실적, 세속적 삶의 의무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끊임없이 긴장을 부여하면서 스스로의 삶의 자정역할을 가능하게 해주는, 추스려 주는 힘이다. 그레서인지 그림 속 선비들은 대부분 자신의 육체를 ‘에지edge’에 위치시킨다. 가파른 모서리에 갖다놓는다. 그곳에서 세속의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난 은사는 만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물아일체)를 꿈꾸며 천지자연의 정신과 합일하는 궁극적 즐거움(도)를 강렬히 희구한다. 생각해보면 작가란 존재 역시 세속적 삶의 상식적 감수성과 보편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끊임없이 밀어내면서 독자한 삶의 감수성과 실천을 보여 주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박항률의 그림은 동시대인의 이상적인 삶, 현대인이 꿈꾸는 저 세계의 상을, 그 유토피아를 이미지로 재현하는 편이다. 그의 그림은 자신의 인성에서 번져나온다. 인간적인 면모가 그런 그림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맑고 청초한 세계가 물씬 풍겨나는 그림이자 전통동양화의 코드에 한국근현대미술의 주된 경향으로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는 목가적이고 향토적인 요소를 접목시키고 그 위에 동시대 삶, 문화의 화두인 명상과 신화적 요소들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그림이다. 이 시대, 대중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인물산수화의 의미도 박항률 그림에 드리워져있지만 그 날카로운 ‘에지의 정신’보다는 스타일과 감각으로 너무 매만져져있다는 느낌, 그리고 생의 안락과 평화를 희구하는 대중들의 미술취향과 밀접하게 조우하는 내용과 형식의 틀에서 그림이(특히 소녀의 얼굴상) 그 보편적인 미적 취향과 관념에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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