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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옥 /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버려진 장소

박영택

플라스틱 생수병은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사물이자 오브제다. 그 안에 담긴 물은 위생의 필요성과 환경오염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으로 사용하는 물이자 동시에 자연의 물을 일정하게 가공한 인공의 물이다. 자연이면서도 자연과 조금은 다른 자연인 셈이다. 이제 생수는 가장 보편적인 식음료가 되었다. 수돗물이나 자연 그대로의 물은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기에 그렇다. 얼마 전해도 우리가 물을 이렇게 사먹는 것이 보편화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생수가 진정으로 천연의 물맛이나 환경오염으로부터 그토록 자유로운 물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환상이다. 역설적으로 생수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서 소모되고 버려진다. 일회용 생수병, pet병이 초래하는 환경오염을 생각한다면 생수의 소비는 좀 역설적이다. 편의점이나 식료품점의 냉장고에는 생수병이 가득 도열해있다. 그 안에 담긴 맑고 투명해 보이는 물은 계곡물이나 천연암반수이거나 지하로 파고들어가 추출한 질 좋고 맑고 순수한 물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래서 모든 생수병의 로고디자인은 한결 같이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이나 자연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인이 소비하는 ‘산수화’다. 이른바 볼빅 산수, 에비앙산수, 삼다수 산수가 그것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박윤영은 몇 해전 수묵화로 ‘에비앙산수화’를 그린 적이 있다. 나로서는 그런 작업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산수화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산수화를 통해 갈망했던 이상적 자연에 대한 흠모나 그와 연관된 친연적 삶을 구가하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욕망은 동시대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박광옥의 생수병을 소재로 한 작업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앵글로 이루어진 다소 낡고 녹슨 진열대에 플라스틱 생수병이 진열되어 있다. 마치 대형마트에 놓여진 무수한 생수병을 만난 듯한 느낌이다. 물이 가득 담긴 생수병은 무겁고 단호해 보인다. 맑고 깨끗한 물이 역설적으로 상당한 무게감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pet병에는 투명한 물 대신에 투과되지 않는, 불투명한 시멘트 덩어리로 채워져 있다. 아니 그렇게 해서 떠낸 생수병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캐스팅 기법으로 만든 조각이자 오브제의 재현이고 복제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는 레디메이드 pet병을 거푸집 삼아 그 안에 시멘트 물질을 집어넣어 떠내는, 상당히 간단하고 기본적인 기법을 사용한다. 이후 플라스틱 용기는 해체되거나 파손된다. 사라져버린다. 대신 그 안을 점유했던 시멘트덩어리가 pet병의 외관을 뒤집어쓰고 실재 pet병인 것처럼 연기한다. 위장한다. 시멘트는 물과는 사뭇 먼 거리에서 생수병에 대한 선입견이나 기대를 지우고 낯선 느낌을 야기한다. 생수병 안에 가득 담긴 시멘트란 마실 수 없고 물이 지닌 여러 속성을 완벽하게 차단한다. 작가는 pet병의 표면에 부착된 상표를 지우고 그 안에 담긴 물로 빼낸 후에 오로지 용기로만, 구멍을 지닌 틀에 시멘트반죽을 해서 밀어 넣었다. 가득 채워 넣었다. 알다시피 조각이란 주어진 물질의 내부로 파들어 가거나(빼내는 작업) 물질을 첨가해서 공간을 체적화 시키는 방법(채워넣기) 등이 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이미 존재하는 일상의 오브제들, 다양한 용기의 내부를 채어 넣는 일에 흥미를 가졌다. 소주병이나 pet병에 마치 석고 반죽과 동일하게 시멘트를 반죽해서 적절한 농도를 맞춘 후 용기의 작은 입구로 흘려 넣었다. 시멘트덩어리는 용기를 가득 채우고 더 이상 주어진 용기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들어간다. 이 채워넣기는 묘한 쾌감을 준다. 그것은 안을 억압하고 기존에 그 안을 채웠던 액체성을 고체화시키는 질적 변화를 야기한다. 당연히 액체가 들어있어야 할 pet병에 단단하고 먹을 수 없는 시멘트덩어리가 대신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다분히 초현실적인 자리바뀜이거나 본래의 용도를 폐기하는 공격성이 깃들어있다. 작가는 일정한 시간이 기다림, 그 양생의 시간을 경과해 이룬, 굳어버린 차가운 시멘트덩어리로 맑고 투명한 물의 느낌, 이미지를 제거한다. 빛들을 투과하고 모든 것을 투명하게 비추는 물의 속성을 차단한다. 물과 정반대에 위치한 시멘트가 pet병에 물 대신 점령하고 있는 형국은 보는 이들에게 심리적인 충격 내지는 약간의 악몽을 동반한다.

흔히 pet병 안에 담긴 물을 연상하는 관자에게 그는 낯선 물질을 안겼다. 시멘트에 물이 들어가서 pet병 안에 담긴 물과는 완전히 다른 물질을 만들어 물을 대신하고 있다. 그는 분명 물을 무서워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물이 보여주는 투명함과 그 안으로의 무한한 깊이 같은 것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투명함이 자아내는 막막한 깊이 그리고 빛의 난반사를 지우고 차단한다. 이제 pet병에 담긴 물은 시멘트덩어리가 되었고 투명함은 불투명함으로 액체성은 고체성으로 빛은 어둠으로 그리고 더욱 무거워진 질량감으로 채워진 어떤 결정감이, 모종의 완벽한 체적화, 그로인한 무거운 침묵이 이루어진 것이다. 동시에 이 작업은 작가의 역할을 상당히 소극적인 차원에서 제어한다. 작가는 단지 용기를 선택하고 시멘트를 반죽해서 붓기만 하면 된다. 채우면 된다.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 그러니까 물질이 그 스스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내부가 굳어 고체가 되면 외부를 제거하면 된다. 외부는 내부가 되기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로 했던 것이지만 이제 내부가 외부가 된 이상 외부는 의미가 없어졌다. 내부는 그대로 외부가 되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나 차이는 사라졌다. 안과 밖이 그대로 일치하는 조각이다. 안으로부터 차올라 고스란히 모든 외부의 피부가 된 것이다. 그의 작업은 물질을 고정시키고 머물게 한다. 시간의 경과 속에 가라앉고 무겁게 굳어가는 한 물질의 생애를 관찰한다. 굳어버린 시멘트는 pet병을 모방한다. 그러나 그것은 pet병이 아니라 시멘트덩어리다. 도회의 삭막한 건물의 외관이나 소통이 차단된 차가운 질감을 연상시키는 물질이다. 그 물질이 그저 무겁게 직립해 나란히 서있다. 철가루로 인해 녹이 슨 듯한 느낌을 자아내거나 버려진 공간이나 쓰레기 등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이 살다가 가버린 빈 곳, 오래된 시간의 흔적과 쓸모없어진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는 불모의 공간, 빈 집이나 폐허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작가는 그 같은 공간, 장소에서 느낀 복합적인 심리나 여러 잔상을 설치화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벽돌과 이상하게 부풀어 오른 유리로 만들어진 용기(남자의 발기된 성기나 구멍 등 성적 은유가 강한 동시에 덧없이 팽창하는 헛된 욕망, 혹은 알 수 없는 상황성을 연출한다)나, 시멘트로 떠낸 pet병 등이 뒹구는 전시공간은 그대로 버려진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불임의 시멘트 덩어리들, 벌겋게 산화된 사물의 피부 사이로 어디에서가 희미한 발신음처럼 혹은 모든 것이 죽고 사라져버린 후에 겨우 살아남아 어딘가에 교신을 하는 듯한, 다소 절박해 보이는 조명(희망?)이 겨우 반짝인다. 전체적으로 서늘하고 어둡고 죽음의 느낌이 강한 이곳은 우리 각자가 언젠가 한 번은 와 본 듯한 느낌을 준다. 모두들 빈 집과 폐가에 대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연출한 이 공간은 동시대 삶과 문명에 대한 은유인 것 같다. 이곳은 분명 현재의 풍경이지만 문득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듯한, 혹은 아직 도달하지 않는 미래의 어느 낯선 공간에 놓여진 듯한 그런 느낌을 시각화한다. 야기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공간에 서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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