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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 / 빛의 조각을 조각하다

박영택

김연은 스테인레스스틸이라는 금속성의 물질을 이용해 자연/물을 모방한다. 스테인레스스틸의 표면에 주름을 잡거나 약간의 굴곡을 주어 리듬과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 놓고 조명을 던지면 이내 표면의 주름은 출렁이는 물결이나 파문, 바다와 구름, 하늘과 태양빛이 연상된다. 금속의 표면을 거울과도 같은 곡면으로 다듬는 과정을 통해 그것이 반사하는 빛의 양상을 조절하고 또한 금속면의 굴곡이 일으키는 현란한 반사가 만들어내는 투명성이 작업의 주된 효과 전략이다. 따라서 보는 이들은 조명을 받아 스테인레스 스틸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그것이 벽에 부딪쳐서 만들어내는 빛의 산란 까지 포함해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몽환적이고 심리적이기까지 한 빛의 장으로 초대된다. 그 빛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현상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주어진 전시장 공간을 실제 자연공간으로 이탈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여기서 강한 착시적 효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우리가 마치 바다나 강의 수면을 바라보았을 순간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금속성의 물질덩어리는 사각형의 입방체가 되거나 달이나 배의 형상을 지녔다. 그것들은 전시장 바닥에 누워있거나 벽에 붙어있다. 보는 각도와 거리, 이동과 시간의 경과 속에서 ‘상처 입은’ 물질의 피부는 조각조각 빛을 뿌리면서 마냥 눈부시게 다가온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마감된 형태는 그 안에 물결/파문과 금속 자체의 견고한 질감과 표면의 마감을 단호하게 보여주면서 공존한다. 미니멀리즘에 유사하게 물질은 단호하게 마감되어 있지만 그 표면은 인상주의적인,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흔적이 개입되어 있다. 아울러 차가운 금속성의 물질은 부드럽고 유기적이며 시간의 지배를 받는 자연을 모방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손길이 의도적으로 개입되어 물의 현상을 재현한 것과 금속성의 물질 그 자체의 물성이 극단적으로 노출된 부위가 서로 충동하고 길항하게 한다. 그리고는 그 두 개의 세계가 한 면에서 만나 문득 하늘과 바다/물을 보여준다. 이 풍경조각은 결국 빛에 의해 파득거리는 바다의 인상을 가설한 것이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김연의 작업은 금속이 금속성을 지우고 물이 되거나 한 순간의 빛의 파동으로 전이되는 체험을 안겨준다. 그것은 본래의 물질의 속성을 지우거나 위장하는 일이다. 하나의 물체가 지닌 고유한 속성이나 그 물질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상식적인 이해를 순간 망각시키면서 낯설고 색다른 존재로 비약시키는 눈속임이기도 하다. 그로인해 금속성의 육체는 자연의 몸, 물의 질료를 욕망한다.

김연이 만든 이 의사자연은, 자연현상은 오로지 은색으로 발광하는 스테인레스스틸과 조명, 표면의 주름을 잡는 일과 몇 가지 형태를 접목시킨 결과다.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최대한의 자연현상을 연출 하고 있는 셈이다. 이때 조각은, 물질은 회화가 된다. 아니면 영상이 되고자 한다. 회화가 2차원적 평면을 속성을 하고 그 안에 일루젼을 주는 일이라면 혹은 주어진 평면성을, 그 존재론적 조건을 극대화하는 일과 관계된다면 조각은 3차원적 공간에 부정할 수 없는 사물로, 입체로 자존하는 것이다. 김연의 조각은 3차원의 물질들이 2차원, 표면의 효과와 회화적 지점으로 몰려간다. 그러는 와중에 3차원적 존재감이 순간적으로 망각되는 편이다. 조각은 덩어리나 형태, 부피나 궤적이라기 보다는 표면과 피부의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물질은 오로지 피부로만 존재하고 그 표면이 빛과 만나 생겨나는 효과로 회화성을 건드린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매우 추상적이다. 이를 테면 정광호의 조각은 오로지 선으로만 존재하는 기이한 조각이다. 그것은 주어진 사물의 피부에 기생한다. 납작한 사물의 세계에 붙어 다니면서 회화의 영역을 조각적으로 먹어치운다. 조금은 다르지만 김연 역시 바다, 물의 피부, 그 수면에 기생한다. 그러나 물/바다는 표면과 내부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거대한 질료덩어리다. 꿈틀거리고 뒤척이며 오로지 표면으로만 다가오는 듯 보인다. 그러나 물은 표면이면서 그 내부이기도 하다. 두 개는 분리되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는 어쩔 수 없이 덩어리를 끌어들인다. 사각형의 입방체나 일정한 두께를 지닌 원형, 또는 배의 형상을 하거나 마치 변형캔버스처럼 잘라내 풍경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구조로 자리한다. 금속들을 자르고 잇대어 ‘풍경화’ 한다. 그 금속의 피부를 갈거나 두드려 하늘과 산, 출렁이고 반짝이는 수면을 만든/그린다. 감각적으로 자연을 모방한다.

김연이 보여주는 물/자연풍경은 단색조로 이루어졌다. 주어진 금속 자체가 지닌 색상과 그 표면을 갈아서 생겨난 색채, 그리고 요철을 지닌 표면에 빛이 내려앉아 자연스레 생겨난 음영이 그것이다. 발광하는 은색과 순간 드리워진 어두운 부분, 예리하게 갈려진 표면의 차가운 실버톤, 구리를 다듬은 면 등이 조합되어 빛에 의해 현란하게 뒤척이는 바다풍경을 상상하게 해준다. 알다시피 바다는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되어져,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증발의 방향으로 나아가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물의 실체인 것처럼 바다는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바다의 색상은 그저 희희낙락할 뿐이다. 바다는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역사가 바다에 내장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의 사이를 오가며 바다는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작가는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것으로서 뒤척이는 바다의 몸, 물 자체를 촉각적으로 전달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면 김연의 작업은 인위와 불임의 것이, 생명 없는 것이 생명을 흉내 내는 일이다. 스테인레스스틸이라는 금속이 자연/바다를 모방한다. 재현한다. 사실 모든 예술은 늘 자연을 모방해왔다. 자연만이 생명이 있고 움직임이 있으며 시간의 자장 속에 생을 영위한다. 인간 역시 그런 존재이기에 자신을 자연의 한 ‘조각’으로 여겼을 것이고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연동되어 자신의 생을 조망했을 것이다. 자연과의 이 연결고리 속에서 목숨을 궁구했다는 사실은 자연과 예술의 연관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자리한다. 동양의 문화와 예술은 생명 있는 자연을 아닌 내 자신과 동일한 그 자연대상을 해명하는 것에 온전히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아름다움과 신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로지 자연만이 그것을 드러낸다. 자연은 아름다움을 스스로 완벽하게 잉태한다. 조금의 가식이나 인위의 간섭 없이 제 스스로 완벽한 자연은 인간이 따르고 동화될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옛 동양인에게 물은 모든 사유와 철학의 근간을 제공했다.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농경문화와 주어진 자연조건 속에서 그 같은 인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형태의 다양성과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물은 자연이 이치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우주 원리들을 개념화하는 주요한 모델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물을 그린 그림, 물이 들어간 그림이 전통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함축하고 있는 존재며 인간사유와 행동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산수화란 것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알리는 동시에 산과 강(물)의 풍경에 의해 상징된 우주 안에 한 사람을 묘사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일러주는 그런 그림이다. 물에 대한 철학이 도상화 되어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김연의 작업도 어느정도 그런 연관성 속에서 다가온다. 나는 그녀의 작업을 내려다보고 혹은 눈높이 위로 가설된 물질의 표면을 응시하면서 실제 자연풍경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한 추체험을 하게 된다. 아니 그것은 작가의 계산된 의도이자 목적이었을 것이다. 한없이 출렁이는 물결만을 보여주는 마원(馬遠1190-1225)의 그림도 떠오른다. 아니 우리가 바다에서 보고 온 모든 풍경이 죄다 연상된다. 왜 김연은 우리에게 물/물결을 보여주고자 했을까? 옛사람들이 물을 바라보고 그런 그림을 그렸던 이유와 새삼스레 접목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혹은 김연 자신의 물에 대한 관심, 애정과 취향이 내려앉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이 작가는 오랫동안 그 물을 조각화, 형상화, 감각화 하는데 몰입해온 시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물/자연에 대한 형상화가 비근한 감상과 낭만의 자취로부터, 코드화 된 상징적 질서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고 다소 소박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아쉬움, 그리고 재료의 정교한 마무리와 연출이 좀 더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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