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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 길 위의 삶들

박영택

김수현의 사진은 도시의 특정 공간에 모인 젊은이들을 호출한다. 밤과 새벽에 클럽이나 카페, 편의점 혹은 길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누군가를 망연히 기다리고 서성이다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빠르게 선회한다. 도시의 젊은 이들은 그렇게 도시의 길바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렇게 만난 이들은 환한 가시성의 도시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몸을 숨긴다. 클럽이나 노래방, 술집이나 카페는 이들에게 소비의 공간이자 동시에 일탈과 꿈과 자유가 순간이나마 희망적으로 빛을 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속도감이 있고 순간적인 포착과 함께 화려한 인공의 색들이 단단한 화면구성안에 깃들어있다. 그는 도시 공간과 그곳에서 삶/유희와 일탈을 꿈꾸는 이들 사이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다. 그는 그렇게 현장성을 중시하고 그 순간, 그곳에 모인 이들과의 소통내지는 공감대를 강조한다. 동시대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기록적 측면도 깃들어있으며 동시에 왜 이들은 이곳에서 이렇게 생을 보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성찰이 묻어있는 사진이다. 그것은 현재를 고찰하는 학문인 고현학(考現學, Modernolgy)에 다름아니다. 어쩌면 도시적 삶, 도시에서 사는 젊은이들의 생에 대한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살아 온 시간보다 살아가야 할 시간이 더 많은 생활 속에서는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쉽게 망각하곤 합니다. 놀이라는 건, 때때로 그런 것들을 일깨워 줍니다. 어둠이 깃들면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클럽과 도심의 번화가를 가득 메우는 젊은이들의 물결. 축제라는 이름 아래 서로 뒤엉켜 있는 사람들. 마땅히 갈 곳과 놀이터가 없는 문화적 환경 속에서 오늘도 젊은 발길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작가노트)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으로 만들어내는 어떤 힘이 있다.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 따라 구성된다는 것이다. 도시공간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훈련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늘날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고도산업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길들여져서 산다는 것이다. 그 중심부에는 욕망과 허영을 증폭시키는 화려한 소비문화가 도사리고 있다. 알다시피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진정한 동력은 소비에 있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이 소비의 대상은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 상품에 각인된 행복이나 위세와 같은 기호가치다. 이 소비는 산업자본이 대중매체를 통해서 우리를 욕망과 허영이 각축장으로 이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지루한 노동을 견디는 몸과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피곤한 자신의 육체, 그리고 그런 육체를 다시 한정없이 잠식하는 소비와 욕망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렇게 정합적으로 훈육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의 일탈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소비의 형태를 강하게 띄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일탈과 유희도 돈이 없으면 안된다. 소비의 공간에서 소비자본주의의 욕망을 내파할 수는 있을까? 최소한 자발적인 자유의지를 통해 현실체제가 강제하는 틀에서 벗어나려는 제스처는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현은 바로 그런 지점을 눈여겨본다. 젊은이들은 클럽에 가서 일상적 삶의 관례와 틀에서 벗어나 과감하고 자유롭게,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한다. 이들은 외부와 유폐된 이곳에서 밖의 무지비한 현실을 도리질 하고 흔들어 내치면서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고자 한다. 최소한 그 시간만이라도 애절하고 안쓰럽게 자신들의 꿈과 욕망과 에너지를 솔직하게 발산한다. 김수현은 바로 그 순간에 말을 건넨다. 이들에게 이 순간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클럽에서의 몸짓은 도시의 젊은 이들이 간직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억압된 것에서 벗어나 그들 삶의 진정한 이유를 되찾으려는 간절한 제스처로 해독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공간은 거의 부재하다. 이 ‘유희적 인간’들은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유희나 꿈이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알다시피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과의 인격적 관계, 혹은 친숙한 관계인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 바로 도시에서의 삶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다. 따라서 신경과민을 피하기 위한 거리두기는 도시인 특유의 삶의 태도, 자유라는 감정의 기초가 된다.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의 암묵적 윤리인 것이다. 그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고독을 감내한다. 도시인들은 그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 대도시의 중심부, 거리와 백화점, 카페, 클럽, 술집,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도시의 군중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긴다. 이때 김수현은 홍대 앞이란 장소를 주목했다. 홍대 앞 이란 이름은 ‘일종의 이미지’다. 다분히 예술적이며 괴짜들이 거닐며 조금은 전위적이면서 자유분방한 곳, 그러면서도 무엇보다도 대안문화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그곳 역시 소비문화에 광범위하게 노출된 것이기도 하다. 김수현은 홍대 앞의 풍경을 본다. 카페와 상점, 클럽과 길 위에 있는 젊은 이들을 목도한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왜 왔을가? 무엇을 희망하고 꿈꾸는 것일까? 그들이 추구한 것은 과연 이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클럽은 공연장이기도 하고 모임의 장소이기도 하며 일종의 전시공간이자 무엇보다도 술판이자 남녀가 서로의 육체를 욕망하는 곳이다. 그 안에는 순간적인 사운드에 몸을 맡긴 뮤지션이나 순간적인 소비에 활용되는 물건들, 그 공간을 누비는 수많은 젊은 눈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도시에서의 고단한 생과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미래’에 대한 무게를 이곳에서 잠시 지우고자 한다. 그들은 클럽과 카페, 술집으로 가는 길에서 마냥 서성인다. 길에서는 모든 것이 지나간다. 길은 멈춰있는 곳이 아니다. 시간이 멈추지 않듯, 길의 것들 역시 멈추지 않고 모든 지나가는 것들의 자리가 된다. 도시의 길은 모든 움직이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길은 그렇게 늘상 붐비고, 늘 곧 잊혀진다. 젊은 이들은 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욕망하고 꿈꾼다. 새벽의 클럽 앞 도로변에는 밤새 클럽에서 춤을 춘 청춘들이 나그네들과 섞여 있다. 그들은 서로 힐끗거리면서 방황한다. 목적지 없이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들로 인해 길은 문화를 만든다. 김수현은 그 길에 서있는 이들을 바라본다. 클럽과 길 사이에서, 이 도시의 가공할 삶의 욕망을 유희하고자 하는 정신을 본다. 작가는 말하기를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발생적으로 이뤄지는 이들의 놀이를 보면서 인간이 자유 의지와 웃음을 가진 이성적 정신적 존재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모습을 재현한다. 사진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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