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국 현대미술과 사진 속의 제주도

박영택

제주도라는 공간
제주도란 특정한 공간이 한국현대미술과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을까? 사실 우리 국토의 모든 곳이 이곳 작가들에게는 심미적 공간이자 작업의 소재나 주제를 제공해주는 원천임은 자명하다. 공간은 단순한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공간은 역사와 문화, 삶의 모든 것이 녹아있는 곳이자 무수한 삶이 살다 간 자취들로 자욱하다. 아울러 그 공간은 그 공간과 함께 해온 사람들의 미의식과 심미성을 발현시킨 근원이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장소인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가설하고 부려놓음으로써 삶을 영위한다. 모든 공간은 인간 사유가 서식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여백이다. 미술이란 인간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행위에 해당한다.
제주도란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거대한 섬이다. 그곳은 이국적인 정취와 아름다운 절경을 육지인에게 안긴다. 그래서 육지에 있는 모든 이들은 제주도란 공간을 일종의 파라다이스로 여기거나 일상적인 풍경이 아닌 매력적인 장면을 선사하는 장소로 인식, 찾아나선다. 당연히 많은 미술인들이 그것을 그림으로 사진으로 담아왔다. 그런 면에서 제주도는 아마도 가장 빈번하게 회화와 사진의 소재가 되어주었을 것 같다.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이 제주도를 찾아올 곳이다. 그들은 제주도에서 무엇을 보고자 할까? 제주도가 없었다면 그만큼 우리 미술계가 조금은 빈곤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성산일출봉과 노랑으로 물든 유채밭, 용두암과 제주를 둘러싼 바다풍경, 초가집과 해녀 등은 상투적으로, 관습적인 소재로 반복해서 재현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한국 구상회화의 전통 속에서, 혹은 사진 속에서 제주도는 그렇게 동어반복식으로, 단순한 소재주의로 재현되어 왔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나로서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에서 제주도를 다룬 작업을 찾아보면서 그중에서 지금까지 제주도를 다루어온 방식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제주도가 재현되거나 해석된 작업들을 선별해보고자 했다. 동일한 소재라도 해석과 재현이 방법론이 조금은 다르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그것은 기존의 제주도에 대한 판에 박힌 제현이미지와는 다른 그 무엇을 엿보고자 한 것이다. 제주도에 대한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재현에서 벗어나 제주도란 공간이 미술적으로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기존의 일방적이고 습관적인 제주도의 재현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례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제주도를 좀 더 풍요롭게 읽고 제주도란 공간이 지닌 다양한 의미층을 탐사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제주의 바다
제주도는 바다풍경을 우선적으로 안긴다. 따라서 작가들은 제주도의 바다를 즐겨 담아왔다. 제주도의 바다를 다룬 작가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것은 제주도의 바다가 다른 지역의 바다보다 더 바다답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 사진이야 그게 그것 같고 다 비숫해보이지만 오로지 아름답게, 심미적으로 보이기 위해 연출한 이른바 관광사진류나 달력사진, 엽서 또는 이발소 그림류와는 다른 바다를 보여준 작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제주도의 바다를 찍은 사진 중 돋보이는 것은 우선적으로 배병우(1950-)의 작업이다. 여수출생인 그에게 바다는 고향과도 같은 존재이며 그의 삶에 깊게 자리잡혀 있었을 것이다. 마치 김환기나 문신처럼 말이다. 1985년에 발간된 사진집 <마라도>에서 그는 제주 주변의 바다, 바닷가이 돌, 그리고 하늘과 섬들의 모습을 감미롭게 보여주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국토순례에 따른 한국의 자연을 체득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제주를 새롭게 발견했다고 한다. 약 2년에 걸쳐 작업한 <마라도>는 정밀한 메카니즘으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 경외감, 아름다움, 그리고 제주 자연의 광막함을 보여준다. 매우 정교한 포커스로 포착된 바다는 회화적인 동시에 디자인적 구성이 긴장감 있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후 배병우는 틈틈이 제주를 찾아 제주도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왔다. 사실 풍경을 바라보는 행위는 바로 풍경과 그 풍경을 앞에 둔 인간과의 관계 그 자체이며,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을 관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배병우의 제주도 풍경 역시 제주도를 바라보는 그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영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제주도 풍경(바다, 돌)은 보는 이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완결된 공간이 아니라, 그 속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역동적인 장소다. 그의 사진은 명료한 퍼스펙티브를 거의 상실해버린 듯 하다. 명확한 경계가 설정되지도 않고 공간과 시간을 측량할 수도 없는 그런 혼재된 기이한 풍경이다. 그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에 의존하게 한다. 그러니까 그가 사진을 찍는 것은 현실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자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행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힘과 스케일이 돋보이는 사진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에 만들어진 그 자연의 위용이 노출되어있다. 특히나 그가 찍은 바다는 늘 수평으로 자리하고 평화롭고 처연하게 드러누워 있지만 매 순간 급변하는 곳이다. 해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장소다. 따라서 바다는 여전히 주술적인 장소다. 그것은 인위와 과학과 이성으로는 설명되고 가늠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그 알 수 없음, 예측 불가능함이 더없이 매혹적이다.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가는 바다에서 그걸 절감한다. 바다는 우리를 온전한 무無로 돌려보낸다.

제주의 바다를 엄격한 기하학적 프레임 안에 담아낸 이는 최병관이다. 프레임을 단호하게 치고 들어가 구획된 이 바다는 오로지 선들로 가시화되는데 그 선에 의지해 바다는 비로소 우리들의 시선에 파고 들어와 적셔진다. 수평에의 의지를 거느리고 무거운 질량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로 뒤척이는 바다의 수압이 인화지 표면에 밀착되어 있다. 화면 가득 바다가 차올랐다. 보는 이들을 오로지 그 바다와 대면시키는 구도다. 바다는 스스로 하나의 선을 만들고 그 가물한 경계에 하늘이 맞물려있다. 바다는 늘 하늘을 동반한다. 바다가 밀어낸 자리에 하늘이 있고 하늘이 보이는 자리에 바다는 멈춰있다. 바다사진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하늘사진이다. 그러니까 바다와 하늘은 늘 한 쌍으로 맞물려있다. 결국 바다를 찍는다는 것은 그 바다를 둘러싼 환경을 응시한다는 얘기다. 이 낭만적인 바다 앞에서 보는 이의 시선과 감정은 속수무책으로 자연 앞에 허물어져 아예 그 바다와 하나가 될 듯 하다. 그의 사진은 한 개인의 섬세한 신경줄과 섬약할 정도의 민감한 정신의 지진계로 포착한 세계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전적으로 빛과 선에 의지해 드러난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최병관은 그 빛을 심리적인 차원으로까지 끌고 가 사진을 우수와 낭만, 감성적인 차원으로 만들고 있다. 그의 바다 사진 역시 그 특유의 내면적 김수성의 결들이 감촉되는 사진이다. 그는 엄격한 구도, 기하학적 선, 절제된 색조 그리고 드라마를 가능한 배제한 체 바다를 본다. 보여준다. 그 바다는 계산된 구도, 프레임 속으로 걸려 들어와 화면을 다양하게 나누면서 뒤척인다. 사실 기하학적 선이란 인간의 인위적인 자연 지배와 사적 소유의 욕망으로 인한 것이었다. 모든 프레임은 결국 인간의 시선, 그 욕망의 시선으로 자연에 개입한다. 최병관은 그 기하학으로,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다를 건져 올린다. 그의 그물에 걸린 바다는 신선하게 환생한다. 그러나 모든 사진, 풍경은 결국 우리가 보았던 기억에 의존해 보여진다. 사실 그의 바다는 여전히 바다라는 드라마에서 그다지 자유롭지는 못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흠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위안이 되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 바다는 그렇게 우리가 가서 공유할 수 있는 바다이기에 그렇다. 그는 새삼스럽게 제주도의 바다를 다시 한 번 우리 눈앞에 절실하고 아름답게 인식시켜준다. 결국 그것이 이미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유사한 맥락에 박일구의 <남도의 바다> 시리즈 중 제주바다를 찍은 사진이 있다. 화면의 3분이 2를 차지하는 수평의 바다는 그대로 자신의 신체, 살을 평안하게 보여준다. 제주 바다의 청정함과 맑고 투명한 색채가 고요와 적막감 속에서 빛난다. 그는 사진의 기록성을 존중해서 특정 장소를 찍었지만 그 작업의 대상인 바다는 그 같은 기록성을 슬쩍 무화시킨다. 스스로 변화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 바다는 바다에 대한 우리들이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허망한 것으로 만든다. 그는 바다라는 시각적 물상을 가장 순수한 사진적인 방법으로 기록하고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사진의 기록성과 예술성이 사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속성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바다를 재현하는 기존 사진이 방식을 따르면서도 결국 바다를 하나의 색으로 환원시키는 방법(사진프로세스로 가능한)으로 추상화 한다. 따라서 그것은 익숙하게 보아온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마주하게 하는 바다의 낯선 초상이 되었다. 사진은 늘 익숙한 풍경을 거짓없이 보여주는 재현적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진은 매번 당혹감과 생경함으로 익숙함을 배반하는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제주도 바다를 자주 찾는 이의 하나가 바로 윤명숙이다. 그만큼 제주도의 바다 사진을 가장 많이 찍은 작가다. 그녀는 오랜 시간 오로지 바다만을 찍어왔다. 작가는 그동안 무수한 바다, 그러나 한결같은 바다이면서도 너무 현란한 바다를 보았고 이를 사진에 박아왔다. 바다의 시간을 기록했다. 누구보다도 바다를 많이, 오랫동안 응시했을 것이다. 바다는 사람들을 간섭하거나 강요하거나 보채지 않는다. 그저 까마득한 세월, 그 자리에 와서 보고 있는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헤아리기 힘든 시간을 보여준다. 한결같이 뒤척이고 흐르면서 그렇게 자리해있는 더없이 무심한 존재다.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이를 사진으로 담는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에 그럴 것이다. 사실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무를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에 도착한다. 세속의 끝자리에, 삶의 마지막 경계에 바다는 처연하게 드러누워있다. 떠나온 자들은 무엇보다도 바다를 본다. 어디에선가 떠나온 자신의 절대적인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기에 그럴 것이다. 작가는 바다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한다. 바다를 사진으로 촬영하겠다는 의지나 욕망이기 전에 그냥 바라본 상태에서 부득이 나온 사진이다. 좀 역설적이지만 바다에 가서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오랜 시간 보내다가 어느 순간 그 바다가 변이를 일으키는 상황,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뒤집어지는 순간’을 잡아채 온 것이다. 그리고는 바다를 등졌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현실과의 불화나 세상과의 두려움이나 불편함을 바다에 와서 지워나가는 한편 돌변하는 기후의 변화나 바다와 하늘의 격렬하고 장엄하게 급변하는 상황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대리만족을 경험하고 다시 일상으로 귀환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바다에서, 제주 바다에서 위안과 아늑한 휴식을 느낀다고 한다. 기회만 되면 바다로 달려가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앉아 바다를 응시하고 자신을 다독거리고 정화시키고 치유해서 돌아오는 것이다. 작가는 어둠이 깃들기 직전의 일몰 무렵이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새벽, 눈비오거나 태풍이 휘몰아칠 때 바다를 찍었다. 오랜 세월 체험을 통해서 특정한 계절과 시간대의 대기나 광선이 만들어 내는 효과를 생리적으로 체득했을 때 가능한 사진이라는 생각이다. 작가가 찍은 사진 안에는 하늘과 바다뿐이다. 아울러 사계절이 그 위에 내려앉아있다. 그러니까 비가오거나 눈이 내리는 바다, 형언하기 어려운 구름과 색상으로 가득한 하늘, 인간의 언어와 문자가 수식할 수 없는 자연현상의 변화무쌍함을 사진으로 가까스로 건져 올렸다. 작가의 관심은 재현대상 그 자체라기보다는 빛 자체인 듯도 하다. 빛에 의해 바다풍경은 고정되어 본 적이 없다. 자연은 늘 그렇게 변화무쌍하다. 당연히 바다는 고정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다는 데 그 매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실측과 시측의 경계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 자연은 늘 변화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하물며 시체도 맹렬하게 변화한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완벽한 소멸의 지점을 향해 미친듯이 나아간다. 그러나 그 사진이 그 순간을 온전히 기억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바다사진은 그 순간을 저장하지만 이내 다음 사진으로 옮겨다니면서 표현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그것과 함께 보낸 기억을 간직하고 저장하겠다는 부질없음 사이에서 길항한다. 일반적인 풍경적 ‘씬’과 ‘프레임’을 통해 바다이미지를 재현하지만 그 재현은 지연되면서 다음 바다사진으로 하염없이 넘어간다. 그것이 여전히 작가가 바다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이다.

앞서 작가들이 보여준 바다사진은 사실 엇비슷하다. 기후나 광선의 차이는 있지만 바다 자체는 단순한 대상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들은 비교적 탁월한 감각으로 제주도의 바다를 각자의 예민한 차이에 구도, 빛, 색상 등으로 약간씩의 차이를 보여준다. 반면 같은 바다라 해도 관점이 다른 작업도 있다.
정인숙(1962-)이 보여주는 제주도의 바닷가는 그동안 익숙하게 보았던 제주풍경과는 사뭇 다른다. 그녀가 찍은 제주도(1966)풍경은 다름 아닌 제주도 해안선에 자리하고 있는 철책들이다. 물론 그녀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남한의 모든 해안선을 따라 순례 하면서 그곳 곳곳에 설치된 철책과 방어물, 군사시설을 찍었다. 제주 바닷가도 그중의 한 장소다. 그녀는 남한의 전 국토, 특히 해안가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들과 여전히 강고한 반공이데올로기와 전쟁의 공포, 분단의 현장 등이 남긴 상처를 드러낸다.
“내가 사는 이곳, 알고 싶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궁금해졌습니다. 동쪽부터 찾아갔습니다. ...이 사진작업은 1987년 동해바다 여행길에서 시작됩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한반도 남북 분단의 비극은 이미 시작되었고, 체제상 편향적인 반공교육을 받았기에 그동안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모습들입니다....끝없이 이어진 철책길 따라 눈물 한숨 가득 찬 분단길 따라 머물고 지나친 이 땅은 불구의 나라, 하나가 찢겨져 불구된 나라였습니다. 치유될 그날을 소망합니다. 이 흔적 걷어낼 그날을 기다립니다.”(작가노트)
그녀는 제주도 해안가에 있는 철조망, 군사시설을 촬영했다. 일종의 다큐먼트 작업인데 군사기지나 시설의 철책이나 방벽을 사진 찍는 이 같은 행위는 성역의 침범으로 간주되는 동시에 이를 공격한다는 뜻도 지닌다. 그것은 반공국가가 설정한 금기를 은연중 위반하고 성역을 침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찍은 철책, 장벽 및 초소들은 정전 이후의 지형학적 변경과 파괴의 흔적이다. 자연에 부당하게 가해진 이 흉터들의 사진은 아직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언제라도 개발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은 ‘만성화된 심리적 억압의 징후’(최민)에 다름아니다, 그러니까 정인숙의 사진은 남한 사회에 깃든 집단적 무의식, 의도적 망각의 결과를 지적하고 있다. 제주도 해안가에 설치한 이 장소는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초소나 벙커다. 그 속에 세워진 위장용 병정 인형 등은 사실 군사시설이라기보다는 엉뚱하고 허접한 오브제들이고 괴이하게 배치된 일종의 초현실주의적 설치(인스톨레이션)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저것들이 간첩의 침투를 과연 막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방아용 진지나 초소인지 아니면 흉내만 내는 형식적인 연출공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흉물스런 초소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의 해안풍경에 느닷없는 분단현실과 전쟁공포를 조장하는 선전용 이미지다. 그것은 바닷가에 온 민간인들을 통제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바다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터무니없는 장벽이기도 하다.

제주의 오름
제주도는 바다만이 아니라 여러 아름답고 독특한 자연경관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많은 미술인들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단연 오름이다. 이 오름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이곳만의 풍경이다. 부드럽고 유연하며 곡선을 지닌 오름은 산이자 무덤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자연관, 생사관 그리고 하늘과 산에 대한 종교적 사유를 건드린다. 자극한다. 이 오름은 대부분 옆으로 길게 누운 수평의 구도 속에 포착된다. 배병우와 고남수의 오름사진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많은 작가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는데 최근에는 미술인들이 그 사진을 통해 다시 오름을 그리고 있는 모습도 본다. 이미 사진가들에 의해 해석된 프레임과 구도 등을 차용하고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동시대 화가들이 사진적 시선을 동경하거나 모방하는 추이이자 사진을 통해 비로소 오름을 다시 보게 되었음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반면 미술인으로서 독자한 시각으로 오름을 형상화하고 있는 경우는 제주도 출신의 강요배의 그림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배병우는 바다 사진과 함께 오름을 찍었다. 그는 제주도를 시간 날 때 마다 방문하면서 제주도 분화구들의 흔적인 와곡한 오름이 선과 덩어리를 사진으로 담아왔는데 그가 찍은 오름 사진은 그대로 수묵화다. 그의 흑백사진은 예술의 기본인 단순화의 원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짙고 깊은 검은 색조가 오름의 형상을 단순하고 힘있게 담아낸다. 그는 제주의 기생화산 ‘오름’을 이른바 ‘산 시리즈’라고 부른다. 오름 즉 산을 천공(天空)으로 생기(生氣)하는 ‘오름’의 생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가 흑백사진으로 담은 오름들은 미묘하고 풍부한 흑백의 계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흑백의 질서를 통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은 사물들 사이의 멀고 가까움과 사이의 어울림이다. 그리고 그에 의해 사물들 각자의 의미와 비중이 드러난다. 사진은 즉각적 즉물적으로 대상을 현전시킨다. 사진이 현전시키는 대상 또한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사진적 이미지’이다. 이 오름은 배병우의 시각에 의해 재구성된 오름이다. 다시 보여주는 오름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관점에 의해 변형되지 않은 피사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술로서 사진이 배격하는 것은 관념과 이미지가 아니라 ‘통상적인’ 관념과 이미지이며, 그것이 추구하는 것은 ‘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다른 모습, 다른 질서일 것이다.

고남수(1969-) 역시 오름을 전문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사진작가다. 그는 오름의 사계를 온전히 보여준다. 배병우사진과 마찬가지로 흑백사진에 검은 무게와 검은 부피를 지닌 오름을 담아내고 있다. 화면을 압도하는 검은 오름의 능선이 절묘하게 포착되고 있다. 그것은 관능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거의 수평으로 화면의 삼분의 이 내지는 전면을 점유하고 있는 검은 오름은 그 자체로 수수께끼나 신비스런 덩어리이자 매력적인 풍경이다. 그것은 화면에 순수한 선, 하염없는 곡선들이 남긴 기이한 자태이기도 하다. 흑백사진의 계조 속에 이 덩어리의 내부는 결코 단일하거나 단순하지만은 않다.
배병우와 고남수는 오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낸 이들이다. 아름다움이란 본래 자연 속에 숨어있는 것이 우연히 드러난 것이다. 본질적으로 자연에 뿌리 두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 사진가들이 오름사진은 증명한다. 이외에도 오름은 많은 사진작가들의 피사체가 되고 있다.


제주의 자연풍경
제주도 자체가 지닌 풍경적 요소들을 재현하는 일은 그곳에서 산 자들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이방인의 눈이나 관관객의 일시적인 방문에 의해 포착되기 어려운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 풍경을 일관되게 담아온 사람으로는 사진가 김영갑과 제주도 사람이면서 그곳에서 살며 그리는 강요배가 대표적일 것이다.

김영갑(1957-2005)은 1985년 제주도에 정착한 후 2005년 루게릭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제주도의 자연을 담아왔다. 그는 죽고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제주에 있다. 작가는 매 계절 변화하는 제주도의 자연을 ‘삽시간의 황홀’이라고 표현하면서 사진에 담아왔다. 그는 파노라마사진(6×17)으로 제주이 풍경, 사계절의 풍경을 촬영했다. 정형화된 회화적 구도를 무시하고 과감하게 화면 중간을 가로지르는 수평구도로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 파노라마 사진은 가로와 세로가 약 3대 1의 비율로 제주도의 광활한 지평선구도를 가장 아름답게 담아낸다. 그는 제주 사람들이 미처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섬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사진에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제주 사람이 아니면서도 제주사람 누구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욱 제주의 자연을 사랑하고 감동을 받으면서 이를 사진으로 기록한 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궁금해서 사진가가 되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다. 대자연의 신비를 느끼고 땅의 오묘한 조화를 깨달았다...초원에도, 오름에도, 바다에도 영원의 생명이 존재한다.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느낌으로써 나는 생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 나는 자연을 통해 풍요로운 영혼과 빛나는 영감을 얻는다. 초원과 오름과 바다를 홀로 거닐면, 나의 영혼과 기억 그리고 자연이 하나가 되어 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도 없다. 귀를 먹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

강요배(1952-)는 ‘방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무언가를 꿈꿀 수 있는’ 자신의 고향 제주의 역사, 풍경을 그려온 작가다.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고향 제주가 겪은 역사적 상흔을 형상해왔다. 1992년의 <제주민중항쟁사>가 그것이다. 반일항쟁과 한국전쟁, 4.3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제주도 도민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항거의 역사를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 제주도 민중항쟁의 피어린 고난의 역사에 대한 후대인들의 각성을 일깨우고 그 민중항쟁의 현재성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한 것이 그의 역사 기록화다. 이후 90년대 초 고향으로 낙향 한 후 지금까지 그는 사계에 따른 제주의 풍광을 진한 애정과 그만의 필력 아래 흩뿌려놓는다. 1994년 화단에 첫 선을 보인 제주 풍경은 지금까지 숱하게 그려진 낭만적인 제주그림들과 크게 달랐다. 세찬 물살에 거무튀튀해진 허한 갯바위, 검붉은 산들과 오름, 거친 흙 밭이나 황야, 투박한 생김새의 들풀들과 나무가 무게있게 조율된 절제된 색채로 거칠게 혹은 섬세하게 드러낸다. 주체못할 것만 같은 기운으로 용트림하는 제주의 독특한 자연환경이었다. 그간 대다수의 작가들이 제주자연을 그리던 장식적이고 맥빠진, 꾸며진 구상화의 고루한 틀에서 벗어나 애정과 공감의 눈으로 제주의 역사와 삶의 무게가 눅진하게 녹아흐르는 풍경을 그려온 것이다. 일단 그가 세심하게 제주도라는 섬의 지질학적, 풍토적 특질에 주목하면서 자연 자체에 대한 경의를 한축으로 하고 다른 한축으로는 제주도의 역사와 제주민중의 삶의 애환과 의지 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이 복합적인 의미들을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적 풍경에 접목시켜 정서와 감동으로 들어 올려내는 그만의 힘은 매우 중요한 성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벅찬 스케일과 대담한 구상, 그의 몸에서 얼핏 접하는 정기가 베어있는 활력과 조선조 사대부의 꼿꼿한 서체를 연상시키는 필력의 ‘드는 솜씨’를 구사해 진지한 풍경화의 경지를 느끼게 해준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본토베기 제주도 사람만이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제주풍경이다. 이 제주풍광은 ‘한 사물을 감싸고 있는 전체 콘텍스트 속에서 그것을 올바로 보면서 그 결과물로서 그림을 감상하는 자의 감수성과 감각, 사고 등에 함께 작용하는 감동(소통)을 주어야 한다’는 강요배 자신의 리얼리즘론(어떤 단일한 형상을 통해 인간 삶의 여러가지 복합적인 국면과 정서들을 응축하고 집약하는 능력)의 확장선에 걸려있음도 인정된다. 무게있게 조율된 절제된 색채를 업고 드러나는 제주의 풍경은 다름아니라 세찬 물살에 거무튀튀해진 허한 갯바위, 검붉은 산들과 오름(얕은 언덕), 거친 흙밭이나 황야, 투박한 생김새의 들풀들과 나무, 돌팍에 얽히고 설킨 덩굴들, 한낮의 황금빛 보리밭 들판, 마파람에 뒤척이는 수수밭, 샛바람에 수런대는 잡초들, 엉겅퀴 언덕과 달밤, 콩밭, 조밭 등인데 이는 제주도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자 감성과 상상력, 자연과의 관여를 풍부하게 해준 제주도의 땅과 현실이다. 혹자는 그래서 이 풍경을 ”삶과 역사를 응결해 자연의 순정성을 한껏 높였다.“고 노래하고 또 다른 이는 그의 풍경이 복합적인 관조와 명상의 계기를 붂돋아 준다고도 하였다. 이 작가에게 있어 제주는 단순한 고향도 독특한 풍경을 지닌 자연도 아닌 그 무엇이다. 그는 제주를 이렇게 말한다.“제주는 하나의 완결된 공간이다. 중앙의 한라산은 끊임없이 지나가는 구름을 잡아 비를 내리고 안개를 만들어 내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감추곤 한다. 산에 내린 비는 산속에 깊이 스며들어 해안까지 내려와 그곳에서 비로서 샘으로 솟는다. 해안가 바다 속의 풍광은 또 하나의 다른 세계이며 장관을 이룬다.”그만큼 그는 제주의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경의와 존경의 염을 갖고 있기도 하고 동시에 제주의 특수한 역사적 현실과 제주도민의 고난과 질곡을 그 자연과 더불어 깊이있게 체득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제주도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진작가 김옥선(1967-)은 최근 <함일의 배>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이 사진은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한국이라는 이국의 땅에서 일상의 삶을 즐기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이 작업은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의 기존 사진적 접근 방식과 더불어 인물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사진에 대한 충동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집단 또는 개인 행동양식,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자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연약함, 감각적 기쁨, 내면적 미 등에 대한 것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이 작업의 시작은 핸드릭 하멜(Hendrick Hamel, 한국식이름 : 함일)이라는 인물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조선 땅을 밟고 돌아간 서양사람이다. 한국에 13년간 체류하였던 외국인으로 한국을 서양에 소개했던 첫 인물인 함일을 빌어 그로부터 350년이 흐른 현재, 한국의 외국인들은 억류되어 생활했던 함일 일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이국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이들을 촬영했다. 사실 김옥선도 제주에 정착한지가 13년을 넘어선다. 다이빙 샵을 운영하며 배를 만들고 있는 작가의 남편인 랄프(Ralf)가 제주도에 정착한지도 같은 시간이다. 김옥선과 랄프가 삶의 터전으로 제주도를 선택했다면 앞서 언급한 17세기에 제주 해안으로 어쩔 수 없이 떠밀려왔던 네덜란드 선원들은 이 섬에 억류당한 이들이다. 오늘날 많은 외국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 정착하고 있다. 작가의 관심을 집중시킨 건 그들이 인생을 즐기는 곳이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한국/제주도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은 우리가 여기서 살고 있는 방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작가는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들은 함일 일행과는 달리 자의에 의해 한국에 들어와 한국의 전통과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들의 이국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취업이나 여행을 왔다가 또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에 의해 그들은 현재 한국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함일과는 다른 의지와 애정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는 그들 자신도 잘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유목민이다. 그들은 함일과는 다른 의지와 애정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사회에 융화하면서도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사고방식, 생활방식이 비슷한 이들을 만나 교류하고 이질적인 한국문화에 나름의 ‘퓨전 문화’ 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자국 내에서의 답답한 일상을 탈출하여 이곳에서 또 다른 자신의 ‘배’를 만들어 또 다른 희망의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들을 사진 ‘함일의 배’라고 칭하였다. 사진 속의 그들은 한결같이 무엇을 행하다가 문득 쉬고 있거나 멈춰있다. 어딘가를 응시하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거나 이제 막 일/놀이/노동을 끝내고 편안한 호흡을 가다듬고 있거나 안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포즈는 자신의 삶에서 나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포즈들이다. 따라서 작가는 그 사진을 통해 “그들의 꿈은 무엇이고 다이내믹 코리아가 그들을 붙잡고 있는 원더풀한 이유”(작가노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김옥선 자신도 독일인 남편과 함께 제주도에 내려와 살고 있다. 제주도를 삶의 장소로 선택하고 정박한지 어느덧 13년의 시간이 흘렀다. 함일 일행이 ‘어딘지 모를’, ‘그 어딘가’라 이름지었던 제주라는 섬에 억류당했다면 오랜 시간이 흘러 이들 커플은 자의에 의해 이 섬에 왔다. 그리고 다른 많은 외국인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이 땅, 이 섬에 와서 살고 있다. 근작은 그렇게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행복과 자유를 충만하게 보여준다. 김옥선은 제도와 편견, 인습과 틀, 보이지 않는 타자의 시선에 종속되는 관계를 부단히 넘어서면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녀가 사는 재주도란 섬에 매료되어 온 외국인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육명심은 제주도 특유의 ‘검은 모살뜸’ 을 촬영했다. 검은 모래찜질은 제주도 사투리로 검은 모살뜸이라 부른다. 이 모래찜질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오래된 전통적 민간요법이라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한 여름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 검은 모래밭으로 가서 모래 속에 몸을 깊이 파묻고 찜질을 한다고 한다. 사진은 모래 속에 들어가있는 사람들이 몸을 보여준다. 그들은 모래/자연과 하나가 되어 마치 산처럼, 들처럼, 바다처럼 워있다. 자는 듯,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늙은 사람들이 표정은 모든 세속의 근심과 아픔을 뉘여놓은 모습이다. 이렇게 뜨거운 날, 모래 속에 들어가 있으면 사대삭신 육천마디 쑤시고 저리던 병이 모조리 낫는다고 말한다. 이 고장 특유의 검은 모래찜질이야말로 특별한 효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는 사실 무척이나 지혜로운 피서법이기도 하다. 이열치열인 셈이다. 육명심은 이렇듯 제주도 사람들 특유의 민간요법이자 전통에 주목한다. 제주도라는 공간 특유의 산물인 검은 모래를 치유의 수단으로 다루는가 하면 더위를 극복하는 방편으로도 삼고 있는 데서 선조들이 삶의 지혜와 제주사람들의 자연친화적이고 슬기로우며 소박한 삶의 방식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검은 모살뜸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주로 여자들이 몰려 들어와서 찜질을 하고 잇다. 대부분 나이든 분들이고 평생 일만하다가 골병든 아낙네들의 육신들이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제각각 몸에 몇 가지씩 병을 달고 사는 신세인 것이다. 이들이 얼굴과 몸에서 자각는 자신의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세군데 있던 검은 모래찜질밭이 북제주군의 삼양 검은 모래사장 하나만 남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마저도 재래식 모래찜질밭과 새로운 해수욕장이 한데 뒤섞여서, 이전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던 토속적인 행토색이 많이 증발하였다고 작가는 무척 아쉬워한다. 육명심의 이 검은 모살뜸 사진은 그간 우리 나라 땅에 살아가는 기층민이 전통적인 삶을 다룬 그의 작업의 연장선에 걸려있다.


나오는 글

제주도의 풍경과 그 안에서의 삶을 담은 이미지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이 이미지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고 접한 것 중에서 선별되었다. 따라서 제한적이고 부분적이다. 이외에도 제주도를 다룬 뛰어난 작품, 작가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기존에 제주풍경을 담아내는 무수한 작업들의 그 한결같은 상투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제주도를 해석, 재현한 것들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물론 그 새로운 지점이란 것이 무척 피상적이고 모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대다수의 작가들이 제주자연을 그리던 장식적이고 맥빠진, 꾸며진 구상화의 고루한 틀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제주도를 단지 소재로만 다루는 작업도 가능한 배제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추려진 작가, 작업들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제주도는 이곳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장소이다. 그리고 그 관심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들이 제주를 찾고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작업을 해오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결과들이 현재 한국미술을 비교적 풍요롭게 한 목록들이다. 다른 장소도 마찬가지지만 분명 제주도란 공간이 미술인들에게 주는 영향은 크고 넓다. 그간 한국현대미술에서 제주도는 어떻게 형상화되어왔는가? 왜 그렇게 재현되었을까? 그들은 제주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제주도만의 매력이란 무엇일까? 제주도란 공간을 어떻게 읽고 형상화할 것인가? 이런 질문과 궁금증은 앞으로 좀 더 해명되고 연구할 과제를 던져준다. --------------------------------------------------------------------------------------
1 김승곤, 서정적인 자연의 표류자, 『배병우』,아르비방 총서01, 시공사, 1995/ 『배병우』,아트선재센터, 2002 참고
2 김승곤, 윤명숙의 바다사진, 『바다』, 일, 2003 참고
3 최민, 희망과 안타까움, 불구의 땅, 『정인숙사진집』, 눈빛, 2003, 5-10쪽 참고
4 이성복, 『오름오르다』, 현대문학,2004 참고
5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Human&books, 2004 참고
6 『제주의 자연-강요배』, 학고재, 1994,참고
7 최연하, 『사진의 북쪽』, 월간사진, 2008. 49-63쪽 참고.
8 『육명심사진집-검은 모살뜸』, 눈빛, 2009 참고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