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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우-강남대로를 그리다, 기록하다

박영택

뱅뱅사거리를 지나 우성아파트 앞에서 하차했다. 버스는 그 같은 이름을 단 정류장, 특정 장소에 멈추고 떠나기를 반복한다. 누군가 내리고 탄다. 강남대로에 위치한 한 정거장에서 작가는 알록달록한 ‘조끼’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찾아오는 이를 위한 배려 같다. 우리는 근처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에 내려 아주 작은 작업실 공간에 들어갔다. 강남대로 377번지에 있는 18층 건물의 901호가 작가의 작업실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숫자로 표시된 장소에서 살거나 일한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공간의 지표 안에서 서식한다. 등본을 비롯한 각종 서류상에 기재된 숫자가 내 삶의 공간을 대리한다. 부동산적 가치 속에서는 몇 평, 시가 얼마라는 수치가 전적으로 나를 대신하고 주소지가 그 사람의 경제적 수준과 삶의 질을 평가하는 결정적 단서로 작동한다. 보이지 않는 자본의 흐름이 공간 역시 규정하고 있다. 도시는 공간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창밖으로 강남대로가 한 눈에 조망되었다. ‘뷰’가 무척 좋은 작업실이다. 하루 종일 밖을 내다보면서 이런 저런 상상, 공상을 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도시는 그런 면에서 거대한 볼거리다. 거대하고 투명한 창만 있다면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그 장면은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은밀한 관음적 시선을 마냥 허용해준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수많은 건물과 가로수, 간판과 도로, 질주하는 차들과 사람들이 보인다. 도시는 그런 면에서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자연풍경과는 달리 끊이지 않는 소음과 움직임, 물질의 위용과 속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이동을 환각처럼 안긴다.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 되어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거듭한다. 통일적이지 않고 분산적이며 파편적이자 추상적이다. 작업실 벽면에는 그 일대를 보여주는 부동산 지도와 강남대로의 거의 모든 풍경을 촬영한 사진과 작가의 그림들이 빼곡히 붙어있다. 순간 부동산중계소에 와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이 작업실은 주변의 공간을 실측하고 지도화 하고 기록하는 일종의 아카이브사무실인 셈이다. 작가의 작업실 공간이 고스란히 작업의 내용을 규정하고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이 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작업실 주변을 작업의 테마로 삼아 이를 관찰, 실측, 보행체험을 통해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작업이 되고 있다. 이 근사적 사고와 체험은 내가 본 것, 나의 환경, 일상을 그대로 작업으로 끌어안는 데서 비롯된다.구글어쓰와 네비게이션, 지도와 카메라, 비디오 그리고 자신의 보행체험과 스케치를 종합해서 강남대로일대를 정밀하게 그려나갔다. 기계와 몸의 종합적인 인식으로 이루어진 지도/그림이다. 육체와 탈육체적, 초육체적 확장이 동시에 공존한다. 자신의 몸의 지각에 철저하면서도 그 지각의 불충분함, 모종의 결손을 보충하고 보완한 것이다. 그 결과는 지도이자 풍경화이고 자신의 주변을 기록하고 의미부여를 한 그림일기이자 사적인 삶의 공간을 목록화한 자료집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앞의 현재 풍경, 삶의 현실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그려나간 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고현학적 관심을 강하게 접한다. 고산자 김정호처럼 작가는 강남교보에서 양재역까지 펼쳐진 강남대로를 무수히 오가면서 길가의 모든 건물과 가로수, 간판과 그 길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가능한 죄다 담았다. 도시 자체의 기록이고자 하여 투시도법을 피하고 위에서 내려다본 구도, 걸으면서 본 구도, 좌우로 펼쳐진 구도를 한 화면에 종합했다. 다양한 시점이 평면 안에 공존한다. 얼핏 고지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조선시대 의궤도나 행렬도를 떠올려준다.

작가가 보기에 도시는 그 하나하나의 개체를 낱낱이 판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 몰려다니며 흐르고 있을 뿐이다. 마치 기계의 정해진 작동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 유기적 흐름을 그대로 그려보이고자 한다. 유기적 흐름을 그리기 위해 강남대로의 풍경을 길을 중심으로 해서 지도처럼 그렸다. 건물의 폭과 건물 사이의 거리는 자신의 보폭으로 측량했고 도로를 그리기 위해서는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도로표시 등은 기록하고 그려나갔다. 그런가하면 사람과 차, 나무 등 땅에. 바닥에 위치한 것들은 건물의 5층에서 10층 정도의 높이에서 촬영했다. 여기에는 사진기와 비디오카메라가 함께 했다. 각 건물이 층수를 일일이 세어나갔으며 간판 등도 보이는 대로 꼼꼼히 기록했다.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이 집요하고 강렬한 집착과 응시 그리고 기록과 보존에의 열망은 결국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대한 자각과 순간성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문과 그것들과 결코 분리되지 못하는 나라는 개체, 주어진 환경의 맥락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규정받으며 존재하는 인간/나 역시 그에 따라붙는 의미들이다.

부동의 건물 아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기를 반복하고 검은 타르로 마감된 차도에도 또한 그렇게 수없이 많은 차들이 달리고 멈추기를 거듭한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슨 약속이 있나, 어떤 일들을 하고 있을까, 혹 내가 알고 있는 이는 아닐까? 저 건물과 차안에는 또 누가 있으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저 들도 나처럼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도시를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멈추지 않자 작가는 거리로 나섰다. 그 길을 걸으며 사람들과 함께 하고 주변 풍경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장지에 연필로 건물과 가로수, 차도와 차, 신호등, 사람의 윤곽을 그리고 각종 문자와 숫자를 기재했다. 장지의 표면이 건물의 색상을 대신하고 나머지는 부분적으로 채색을 가하고 먹을 입혔다.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 공존하고 종이의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다가 부분적으로 설채되는가 하면 360도로 이루어진 풍경이 환각적으로 선회하면서 실제와 가상이 겹쳐진다. 그림자와 입체감은 지워지고 실루엣과 얇고 흐릿한 색채가 작가의 주관이나 감흥을 지우고 담담하게 도시를 기록하고 있다. 기존 풍경화가 재현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도시가 환생한다. 그것은 전통적 산수화의 시선이나 구도, 근사체험을 공유하면서 그 위에 당대 도시공간과 맞닦드리며 살아가야 하는 작가 자신의 실존적 체험, 고현학적 관심을 집요하게 얹혀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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