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성동훈-돈키호테를 꿈꾸는 조각가

박영택

성동훈은 저돌적이고 힘이 돋보이는 작가다. 우선적으로 그의 생김새와 용모가 그 사실을 증거한다. 몸 전체에, 손바닥에 ‘힘 좋은 조각가’라고 쓰여있다. 꽁지머리와 얼굴 전체에 후광처럼 자라나는 수염은 덩달아 범상치 않은 인상까지 안긴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상이라고나 할까. 십 수년을 보아왔는데 항상 자신감 넘치고 건강한, 정력적인 아우라를 발산한다. 그리고 주체 못하는 힘을 발산시키기라도 하듯이 그 무거운 재료들을 가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마치 그는 시멘트와 철을 가지고 일종의 차력술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의 손에 의해 시멘트와 철은 휘어지고 잘려나가는 한편 서로 잇대어져 색다른 존재로 환생한다. 엄청난 규모로 일으켜 세우고 이질적인 재료들을 불로 연결했다. 근작은 거기에 덧붙여 기계적 조작과 잔재미를 일으키는 연출로 나아간다. 기계장치에 의해 열고 닫게 만들어놓았으며 그 안쪽에는 자잘한 사물들이 움직이고 선회하게 만들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스케일이 크고 대담하며 손으로 만든다는 사실의 자부심과 노동의 가치를 누구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작업 방법으로, 힘든 재료를 가지고 유희하면서 주물러 자랑스레 던져놓는다.
그의 조각 작품은 그를 너무 닮았다.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좀 노골적이다. 무거운 쇳덩어리와 시멘트를 자르고 불로 지지고 떼우는가 하면 떡치듯 연결해서 직립시킨 물질은 규모와 노동력, 좀 과하다싶은 시간의 투여가 요구되는, 그런 것들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그의 덩치만큼이나 단단하고 무겁고 그의 용기나 다소의 무모성에 비례해서 형성된 것들이다. .

90년대 초에 그가 보여준 작품 <돈키호테>는 그 규모나 힘에서 압도적이었다. 그야말로 ‘무식한’ 작품 덩어리였다. 그런데 그 시멘트로 들러붙은 덩어리들이 동물과 사람의 형상을 떠올려주고 이야기를 전해 주는 맛이 있어서 흥미를 유발했던 것 같다. 조각적 재료가 덩어리체로 나앉아 물성을 극대화하는 작업이나 방울토마토 마냥 여인과 아이들의 둥글둥글한 형상들이 가지치기 하듯 접목되어 붙여진, 아울러 유기적 생명체 운운하면서 등장했는 일련의 인체조각도 아닌 선에서 성동훈의 구상조각(덩어리이자 형상이고 물성의 극단적 표출이나 서사성이 있는, 익숙한 도상적 조각)은 신선한 편이었다. 그 당시 성동훈이 만든 그 조각덩어리 자체가 전시장으로 돌진하듯 들어와 가득 차버렸던 기억이 난다. 섬세함이나 정교하고 예리한 맛은 부재하지만 그냥 머리로 밀고 들어와 박히는 저돌성과 단순, 무식함을 기꺼이 작품 전면에 배치하는 야성은 그런대로 작가의 미덕일 수도 있었다. 노동과 힘, 재료와 함께 맨 몸으로 부딪혀 뒹군 시간의 궤적이 똘똘 뭉쳐있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재고 궁리하고 이른바 잔머리를 굴리면서 그럴듯한,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을 공들여 제작하는 일반적인 작업의 관행에 비해 그가 보여주는 작업방식 내지 작가적 생존전략은 그로부터 조금은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그런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었던 작가가 구본주가 아닌가 한다.(그러고보니 둘 다 구상조각대전 대상출신이다) 아니 그보다 먼저 임영선의 경우가 있었다. 사실 류인의 경우도 너무 뜨겁고 격렬하고 저돌적인 힘과 아우라가 전시장 전체에 진동하는 편이었다. 둘은 먼저 가고 임영선의 작업은 이전 작업의 연장선에서 여전히 충격적이고 스펙타클한 작업세계를 견지하는데 이제는 전자적 재료와 기계의 힘을 빌어 보다 뮤지엄적이고 비에날레적으로 연출, 구사하고 있다. 성동훈 역시 근작에서는 유압기술과 센서 등의 산업기술을 도입하고 이른바 키네틱 아트에 해당하는, 동력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조각을 선보인다. 여기에는 관객이 참여하고 개입하면서 반응하는 측면이 강조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곳에서는 그렇게 거대한 물성과 남근적인 덩어리감을 강조하는 쪽으로 극화되는 것이 마치 조각다운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그것은 공간을 장악해나가는 물성, 질량감을 조각의 특질로 여겨서 그 물리적 크기나 무게에 비례하는 노동력을 투입해 부풀어 올리는 형국인데 그런 연출과 작업방식은 한국 조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종의 관습이다. 재료를 가혹하게 혹사시킨다거나 엄청난 시간과 노동력을 투사해 몸으로 메꿔 나가는 작업말이다. 그것이 나름 조각의 미덕이 되고 여전히 손작업과 노동의 소중함에 대해 말해준다 해도 조각에 관한 앞서의 선입견과 무모한 관습들의 강고한 힘들에 의해 밀려나오는 많은 작품들을 보면 좀 괴이하다. 상상력의 부재와 조각에 관한 반성적이고 개념적 사유를 대신해서 시간과 노동, 물질로만 봉합하려는 태도는 아쉽다. 성동훈은 역시 앞서 언급한 한국 조각계의 다소 상투화된 틀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반면 동물을 소재로 한 우화적인 이야기의 배치, 인간의 가장 민감한 부위인 성에 관한 지속적인 형상화, 생태와 환경적 이슈를 건드리는 작업들, 힘들고 품이 많이 드는 작업과정을 거쳐 흥미로운 볼거리와 이야기를 전달해주려는 배려 속에서 자신이 작품을 위치시킨다. 근작은 그런 의도와 그에 적합한 방법론에 대한 고민의 일단을 펼쳐놓고 있다는 생각이다.

성동훈의 근작은 소를 탄 돈키호테와 소가죽으로 만든 거대한 소파/의자 그리고 유리구슬과 조명으로 빛나는 사슴, 철과 잔디로 이루어진 인공생태정원, 머릿속/구름 속 풍경을 보여주는, 다소 복잡하고 무척 까다로워 보이는 공정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규모가 큰 이 작품들은 조각/설치에 해당한다. 여전히 금속성의 재료를 통해 이를 용접기법으로 연출하고 있는데 그가 사용하는 금속들이란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실용적 차원에 쓰여지는 기계부품 같은 것들을 콜라주한 것들이다. 아울러 자잘한 철선들을 일일이 붙여서 메꾼 다음 갈아서 반질거리는 표면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른바 정크아트에 속하고 레디메이드를 활용한 작품인 셈이다. 일상생활에서 생긴 폐품이나 잡동사니를 소재로 제작하는 미술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서 기계의 부품 등 현대문명이 토해 낸 산업폐기물이나 공업 제품의 잔해를 소재로 사용하는 작가 등이 미국과 유럽에서 동시에 등장했는데 그것은 버려진 산업쓰레기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의 범람과 과잉의 생산과 소비를 겨냥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후 도시 생활의 소비 물자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특히 버려진 소비 물자를 오브제로 구체화시키는 과정을 거쳐 이 정크 아트는 무척이나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성동훈의 작업도 그런 의미에서 정크아트적 속성을 지니는 편이다. 그런데 산업용 기계나 철조각 등을 자유롭게 잇대어놓고 용접, 콜라주 해나가면서 만들어놓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생명체다. 차가운 금속성이 뜨겁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모방한 것이다. 우선 소나 말이 그렇고 사슴과 같은 우제류 및 은유화 된 성기들이 그것이다. 성/성기 역시 인간이 살아있음을 자각시키는 매개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죽지 않고 건재함을 증거 하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고 유한한 생을 이기고 후손을 통해 생명을 연장, 순환시키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성이란 살아있으며 지속해서 살고자 하는 욕구에 다름아니다. 성동훈의 작업에는 다분히 팔루스적, 남성중심적 성관념이 깃들어있다. 플라스틱 조화로 피부가 뒤덮힌 소와 그 위에 올라탄 인물은 자연스레 돈키호테를 떠올려준다. 성동훈의 트레드 마크가 된 돈키호테다. 그의 성향과도 부합되며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상의 은유로 작동하는 한편 익숙한 도상으로서 흥미와 이야기를 자연스레 전달해주는 매력적인 소재다. 구슬이 연결되어 만든, 내부에 조명이 발광하는 우제류인 사슴도 등장한다. 그는 오랫동안 동물을 재현/모방하면서 그 동물을 빌어 인간세와 삶의 여러 이야기를 풍자와 해학으로 다루어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그의 장래 희망은 목장주였단다. 지금 그에게 목장은 없지만, 해서 살아있는 소나 말은 부재하지만 대신 그는 안성 작업실에서 마음껏 원하는 동물들을 불러들인다. 그의 손끝에서 소와 말, 사슴 등은 다채롭게 환생한다. 마치 피그말리온 마냥 자신이 꿈꾸는 동물을 자유로이 만들어내고 있다. 철과 시멘트, 구슬 등으로 만들어진 동물상은 물론 사실적 재현과는 거리가 멀다. 다분히 상징적인 형상을 통해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로 자리한다. 알다시피 우제류는 고기와 젖, 뿔과 털 그리고 노동력까지 인간에 제공함으로써 오늘날 이 땅에 인류가 살기 좋은 조건이 되게끔 가장 헌신적인 희생을 바쳐온 동물들이며 진화에 가장 성공한 동물들이다. 특히 솟구친 뿔은 확고하고 당당하게 서있어서 강인하고도 아름답다. 성동훈은 우제류의 그 뿔이 더없이 좋다고 말한다. 그런 이유와 함께 우제류를 보여주는 것은 오늘날 인간, 사회, 자연생태계의 파괴와 근원적 우주생명의 질서로부터의 이탈이 극에 달한 현실 속에서 그 생명의 본성을 인식하고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그 생명운동은 따라서 인간도 동물의 결국 한 종이며 자연계의 생물집단 중에서 고작 소비자의 일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시키면서 인간과 자연이 동등하다는 ‘생태주의’ 그리고 일찌기 일리아 프리고진(Iiya prigogine)이 언급했던 진화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도 슬쩍 떠올려준다. 그리고 그것은 곤충과 파충류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있고 나무와 풀이 자리한 ‘인공정원’이란 작업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읽힌다.

근작에서 그가 중점을 둔 것은 이른바 유압장치와 센서 등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그리고 움직이는 키네틱 조각이다. 사람의 두상과 구름의 형상을 한 물체가 서서히 열리고 닫히기를 거듭하면서 그 내부를 보여준다.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안의 풍경이 드러나면 이내 비행기와 불상, 코끼리 등 여러 오브제들이 부착된 구조가 천천히 회전한다. 작가는 자신의 머릿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자기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세상의 온갖 정보와 가치들이 어지러이 선회한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부침하고 혼재하는 그런 풍경이다. 그런데 그것은 정확히 형상화하거나 온전히 다 보여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갈까? 내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살고 있는 가에 대한 물음을 소박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듯 근작은 다채로운 관심(성, 생태, 의식의 세계, 자아 등)을 관객이 함께 참여하고 개입하는 작업으로 만들어나가면서 키네틱의 요소가 강한 쪽으로 풀려나가고 있다. 여전한 그만의 스케일감각과 무모함이 공존하고 그의 성실하고 장인적인 손맛이 내려와 앉아있다. 그러나 지금의 기계장치와 조작술은 사실 새삼스럽지 않다. 이 같은 키네틱이 그의 주제와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결되고 있는가도 좀 의문이다. 욕심같아서는 그가 만들고 부려놓은 것들에서 원시성과 야성이 유지되면서도 동시에 좀 더 세련되게 마무리된, 감각적인 매듭이 돋보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