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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 자연이 그리다

박영택

회화는 한정된 사각형의 용기 안에 물감/안료를 채워 넣는 다양한 스타일에 의해서도 이야기된다. 그것은 외부세계를 참조하지 않고도 특정한 이미지를 재현하지 않고도 자존한다. 대신 색을 지닌 물감이 자신의 물리적 존재감을 어떤 시각적 대상으로 구현하고 있다. 물감은 작가의 신체에 의존해 화면의 피부와 속 안으로 들어가 그 본래의 바탕을 또 다른 존재로 환생시킨다. 천에 시술된, 착색되고 마치 염색된 듯한 바탕 면은 시각성에 있어 지각되는 실체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물감의 흔적, 얼룩이자 모종의 이미지를 또한 연상시킨다. 김미경의 화면은 뭐랄까, 꽃 같기도 하고 생명체의 운동이나 세포의 분열 같은 상을 떠올려준다. 그러나 그것은 물감이 순간적으로 번지고 퍼져나가다 순간 응고된 상태로 동결되어 있을 뿐이다. 물감, 질료들이 문득 어떤 형태를 지향하다가 돌연 멈춰서있다. 그로인해 긴장감이 서린 화면은 시간이 숨을 멈춘 상태로 탱탱하다. 이른바 구상과 추상, 재현과 비재현이 공존하는 그런 형국이다. 결국 모든 것은 보는 이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져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그림은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이의 관점과 마음/욕망에 의해 가변적인 상으로 상상되어지기를 허용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김미경이 보여주는 화면은 분명 하나의 회화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회화라는 문화가 사라진 후 여전히 남겨진 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습관이다. 작가 역시 전통적인 회화의 재료들을 가지고 다시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은 이전의 회화로 규정되지 않아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화적인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사각형의 캔버스를 바닥에 눕혔다. 일상적 삶의 공간과 그림의 공간이 일치되는 순간이다. 순간 시선은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간다. 정면성의 법칙이 무화되고 일점투시의 조망의 체계도 사라지고 난 후 수평의 시선이 어떤 편애 없이 화면을 바라본다. 캔버스는 대지처럼 누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자세로 투항한다. 그것은 몸을 열었다. 작가는 화면위에 물감(피그먼트를 사용하는데 이 피그먼트 자체가 무거우니까 화면에 고이게 된다)을 붓는다. 붓을 쓰지 않고 따라서 직접적인 손맛을 느낄 수 없게 질료를 쏟고 그에 따라 손에 망령처럼 붙어있던 습관적인 그리기의 유혹과 모든 미술사의 역사는 잠시 사라졌다. 아니 망각되었다. 물감을 화면 위, 안에 붓는 행위는 아무것도 없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바탕에 사건을 일으키는 일이다. 무엇을 그리기 보다는 어떤 상황을 극적으로 연출하고 물리적인 법칙의 인과관계를 시각화하는 일이다. 모든 사물은 인과관계 속에서 실재한다. 개별적인 사물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물감은 천을 만나 새로운 관계로 접어들고 아래로 흐르면서 중력의 법칙을 받고 아울러 시간의 지배 속에서 변화해간다. 바람과 공기, 온도와 습기도 조용히 관여한다. 여기에 작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물감을 흔들고 방향을 달리해주며 모종의 형상, 효과를 찾는다. 경사면을 조율해가며 캔버스를 돌려가는 과정을 통해 물감은 흐르고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방향성으로 난 자취를 만드는 것이다. 주어진 틀 밖으로 나가려는 물감의 관성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물감은 작가의 신체 안에서, 의식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된다. 그는 물감을 보듬고 품고 어르면서 그것들이 원하는, 그것들에 합당해 보이는 어떤 상황을 안긴다. 기울기에 의해 물감은 맹렬히 돌진하다가 또 다른 경사면의 제공에 의해 이내 다른 쪽으로 퍼져나가고자 욕망한다. 캔버스의 경계까지 내처 달리면 다시 안쪽으로 밀어 넣어지고 그렇게 한정된 사각형의 틀 안에서 물감들은 자기 생존의 영역을 지도화 한다. 그 주어진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물감은 다만 한계상황 내에서, 임계지대 안에서 자신의 생을 욕망한다. 그렇게 이루어진 이미지, 얼룩은 사각형의 꼴에 의해 제한된 것이다. 


물감 위로 또 다른 색을 지닌 물감이 올라가고, 색깔 자체마다 밀도가 조금씩 다른 물감이 미디엄과 털펜타인 등과 함께 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시간차 공격’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차이를 두고 물감을 붓고 흘리고 몰고 가는 것이다. 그로인해 성질, 상태가 다른 것들끼리의 충돌과 예기치 않은 만남은 서로를 흡수하고 밀치면서 파열음과 조화가 공존하는 기이한 소리를 낸다. 또한 부분적으로 닦아내고 다시 물감을 얹히는 과정을 통해 화면은 안료가 외부조건과 만나 이룬 다양한 묽기, 장력과 입자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또한 여러 겹, 층들을 투명하게 보여주면서 환영을 자극하고 동시에 표면에 들러붙은 입자와 퍼지고 스며들면서 이룬 길과 띠, 농담의 차이에 의해 구분되어진 경계들이 흥미로운 시각적 요소를 제공해준다. 그것은 우연과 작위 사이에서 진동한다. 자연과 인위가 기이하게 얽힌 상태말이다. 그런 것들이 문득 원하는 상태,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쨍한’ 느낌을 드러나는 순간 멈추고 그 흔적/이미지의 윤곽을 단호하게 둘러친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흔적을 도려내듯 나머지 부분(배경)은 단색의 오일로 마감한다. 그것은 이미 설정된 흔적/이미지와는 달리 다른 차원의 공간감을 느끼도록 연출되는데 이때 색의 선택은 무척 중요하다. 작가는 가능한 보색관계, 최대한 어울리지 않는, 서로 충돌하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런 색을 사용하는데 그 주변 색은 안에 있는 움직임을 강조하는 색으로 규정되는 셈이다. 작가는 지나는 말로 말하기를 사실 자연의 색이 그 같은 부조화의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더없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손을 떠난, 붓을 지운 이 회화는 작가의 신체적 행위의 틀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작가의 적극적인 행동의 간섭만큼이나 이 그림에는 자연이란 절대적 조건이 이미 들어와 있다. 중력과 시간, 운동 등의 물리적 법칙과 엄정한 자연의 이치가 이 그림에 어떤 상황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림, 자연을 닮은 그림을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카오스고 우연적인 듯 하면서도 엄격한 법칙 아래 자리한다. 작가는 물감을 회임하고 이를 다시 새로운 존재로 내뱉는다. 나와 물감의 이 경계없는 조우는 일종의 불이不二의 경지에 유사해 보인다. 나와 물감이 혼연일치가 되는, 구분없는 상황말이다. 캔버스에는 아무 형상도 드러나 있지 않지만 동시에 그것은 무엇이든 형상화시킨다. 그것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부재다. 마치 동양화에서의 바탕, 여백의 의미를 상기시켜준다. 언제든 무엇이 될 수 있는 이 화면은 그대로 마음을 닮았다. 우리 마음 역시 실체가 없다. 언제든지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 또한 마음이다. 김미경의 화면이 그렇다. 그것은 단일한 무엇으로 고정되고 규정할 수 없는 화면이자 무엇이든, 마음 가는대로 가능할 수 있는 화면이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생명을 품고 잉태하고 시간과 조건에 순응하며 변화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캔버스 역시 물감을 품고 일정한 시간을 견디고 자연조건에 순응하면서 그 무언가를 남긴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것이 꽃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무방하다. 다만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그 질료들과 함께 한 작가의 노동과 마음이 자연스레 고여있다 발효되어 나온 것이다. 그린다는 행위와 그 순간에 몰입해 들어가 재료와 일치되는 순간을 꿈꾸는 일, 그것들이 순간 기적 같은 상황을 이미지로 남겨주는 그 경이로운 때를 기다리는 것이 결국 그림 그리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삶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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