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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숙 / 살아있는 색면추상

박영택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벽, 그 벽의 피부에 붙어있던 면천이 벽으로부터 분리, 도출되어 나와 일정한 지지대에 의해 지탱되어 이루어진 사각형의 캔버스는 그런 의미에서 본래 벽이었던 자신의 태생적 시원을 상기시키는 구조를 보여준다. 납작하고 평평한 또 다른 벽, 벽을 추억하는 인위적인 벽,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인공의 벽, 그리고 사각형이란 꼴이 그것이다. 여기서 사각형이란 물리적 공간은 그림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조건이다. 이 존재론적 조건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는 그간 모더니즘미술에서 수많은 작가들의 작업 속에서 행해졌다. 그것을 물리적 실체로서 규정하고 그로인해 하나의 사물로 마감시키든 여전히 심리적, 정신적 공명을 자극하는 기이한 공간으로 설정하든 여전히 사각형의 납작한 캔버스란 시각적이자 심리적인 공간은 화가들의 작업실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일 자세로 직립해있다.

이명숙은 캔버스의 사각 공간을 변주한다. 아니 그 사각형에 또 다른 공간을 설정하고 그것이 여전히 보는 이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거나 무엇인가가 환기되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사실 회화(화면)는 인간의 상상력과 추상적 공간개념이 펼쳐보이는 지극히 인위적. 관념적 절대공간이다. 그러니까 평면 위에서의 일루젼은 자연에서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가정상 평평하다고 전제된 면 위에서 보여지는 허구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 허구는 미술의 운명이자 현실계를 인식하는 한 몸이다. 작가는 주어진 사각형 혹은 약간 옆으로 키워졌거나 비스듬한 사변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변형캔버스를 사용한다. 이 성형shaped 캔버스는 화가가 표현적인 행위를 하지않고도 그림에 다양성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주어진 캔버스의 형태 자체가 이미 그림이 내용, 표면을 채우는 물리적 흔적의 외형을 지시한다. 작가는 주어진 공간 안에서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아니 적극적으로 주어진 틀의 한계 내에서만 그림을 그린다. 아니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공간을 분절하고 색/물감으로 덮어나가고 그 어딘가에 가늘고 예리한 선들을 얹혀놓는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그리고 묘사한다기 보다는 주어진 공간에 공간을 가설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과 공간간의 길항작용을 실험한다. 검토한다. 마치 건축가들의 도면 작업처럼 이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공간유희’는 다분히 환영적이다. 그것은 일루젼을 거느린다. 이 일루젼은 실재하는 외부세계를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의 지각과 감각속에서 무엇인가를 야기하는 환상과 연관된다. 형태와 색채가 관람자 속으로 침투하고 반향을 일으켜서 그/그녀를 깊이 감동시키고자 한다.
색종이를 오려서 콜라주 한 마티스의 작업처럼 작가는 캔버스의 표면에 이런저런 면을 배치해놓는다. 색의 부피화, 색의 공간화를 통해 그 색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과 크기, 색채의 힘에서 압도하는 느낌을 던져준다. 순도높고 명징한 색채들은 캔버스의 피부를 덮어나간 흰색과 함께 몇 개의 색층, 색면을 구성한다. 그 면은 단색으로 정연하게 도포되어있다. 두 세 개의 색면들이 겹치고 맞물려있으며 형태간의 크기 관계와 색채간의 색상과 비중관계자 섬세하게 조정되고 있다. 그로인해 화면은 여러 공간을 만들고 묘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 부동의 추상화면이 살아있는 존재로 탈바꿈되는 듯한 착시가 가능해진다. 또한 한 화면에 최소한 세 개 이상의 색면/공간들이 겹쳐서 공간감을 자극하고 표면 앞으로, 뒤로 유동한다. 그로인해 입체감이 느껴진다. 공간에서 다른 공간이 생기고 공간과 공간이 중첩되고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의 맞물림, 겹침이 새로운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내부와 외부가 동시에 보여지고 드러나고 색면은 공간을 열어젖히고 절개한다. 여백같은 흰색으로 도포된 바탕면 역시 하나의 색면으로 자리한다. 그것은 단지 배경이 아니고 없는 것이 아니다. 그로인해 동양화 화면의 여백처럼 흰색 면은 생성적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단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음의 부재이고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떠오르는가 하면 생성적으로 되살아난다.

이 색면들의 배치는 공간감을 연출하고 면과 면이 중첩되면서 조각적인 효과 역시 자아낸다. 평면성과 공간감 사이에서 조금씩 떨고 있는 그것은 경계에선 면들이자 평면과 입체의 틈에서 움직이는, 생성적이고 활력적인 면들이다. 색면들의 형태는 정확한 사각형의 꼴이라기 보다는 그 형태감 안에서 약간씩 무너져있다. 정확하고 날카로운 기하학의 직선이 슬쩍 융기하거나 흔들거나 완만한 사선을 껴안고 있다. 단순하고 딱딱해 보이는 화면은 일순 부드럽게 이완되고 조금씩 흩어지는 부분을 허용한다. 일관된 색채로 이루어진 색면에 침투하거나 그 속을 통과하는 또 다른 색채의 얇은 기둥인 단선이 그 유동성을 더욱 자극한다. 색면을 최소화한 그 선은 크고 무겁고 넓은 부위에 상대적으로 가볍고 얇고 적은 가시성을 지닌 존재로서 감정이나 메시지를 드러내는 필촉, 제스처, 물성의 연출을 대신한다. 마치 사군자에서 엿보는 선, 선을 치는 호흡과 신체의 활력이 엿보인다.
색채가 발라진 표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자잘한 붓질들이 무수히 얹혀져있는 매우 복잡한 구성을 보여준다. 수없이 다른 시간과 공간들이 떠오르고 묻히고 덮어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 모든 흔적, 시간의 결들은 균질하게 마감된 색면의 층 아래로 잠긴다. 겉으로는 더없이 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이는 색층의 안은 결코 단일하거나 단호하지 않다. 완성도 높은 밀도와 깊이를 거느린 화면은 촘촘히 베어있는 붓질과 물감/색채의 미세한 차이가 환영을 자극한다. 그것을 좀더 강화하거나 일종의 악센트로 작동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얇고 가는 선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주어진 공간에 또 다른 공간을 가설하고 다시 그 사이 어딘가에 가는 선을 부여해 공간을 엮어주고 분리하고 다시 이어주기를 반복하고 단호하고 넓은 색면에 감각적으로 선을 가설한다. 그 선들은 색면을 가로지르고 납작하고 평평한 부동의 색면에 ‘스피드’를 준다. 보는 이들은 그 선에 의존해 공간을 유영하는 환영을 접한다. 인간적인 내음을 동반하는, 떨림을 지닌 선은 마치 바느질의 시침자국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색면의 공간 내부를 횡단하면서, 바탕과 칠해진 부위를 통과하면서 몇 개가 색면으로 인해 부풀려진 공간감을 다시 평면화시킨다. 동시에 색면안에서 단조로움과 부동성을 가볍게 지워나가며 생동감과 시간의 추이를 증거하는 선이기도 하다. 그로인해 면들의 긴장감은 더욱 고조된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여전히 생동감있고 움직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느낌으로 ‘확’ 하고 와 닿아야 하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가 그친 자리에 오로지 감각과 감수성, 느낌에 호소하는 그런 그림말이다. 복잡하고 스팩타클하고 동시대의 흐름에, 조류에 부침하는 그런 그림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미술의 시각성에 근거하고 있는 고급한 추상미술말이다. 그것은 이 복잡다단한 동시대 사회에 침묵과 단순함을 제시한다.

이명숙은 주어진 사각형의 캔버스란 물리적 공간, 그리고 화가 자신을 표상하는 물감/색을 통해 이루어진 전형적인 색채추상을 선보인다. 그 안에서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낙천적이자 평범한 것에서 발견되는 즐거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상투적인 아름다움이나 재현의 기호에 순응하는 것, 혹은 기존 미술계의 관습적인, 상업적인 코드에서 가능한 거리를 둔 자리에서 그녀만의 ‘절제된 야망’을 보여준다. 아울러 모더니즘의 색채추상을 진부하거나 시효가 지난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회화의 기본적인 속성을 다각도로 건드리는 선에서 새롭게 파생시킨다. 자신의 감각과 취향에 전적으로 의존해 나가는 이 신경줄이 날카로울 수 밖에 없는 회화는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납득하는 절대적인 세계, 취향과 감각이 기준이 되는 예술이다. 나로서는 동시대미술이 그런 취향과 한 개인의 고급한 감각들을 점차 소멸시키고 있다고 본다. 집단화된 미술의 흐름, 거대 자본의 힘, 특정한 이념이나 담론의 무게가 개인들 각자의 감성을 억압한다. 그에따라 최근 격조있는 추상미술을 보기 어려워졌다. 여전히 우리가 좋은 추상미술에서 감상하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고 가능한데도 말이다. 우리 미술계에 아직도 이 같은 미술관을 지니고 오로지 그 세계를 심화시키는 작가들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명숙의 그림 또한 그런 세계를 풍경처럼 보여주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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