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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 흩어진 시선

박영택

명료성에서 벗어나 인지가능하지 않은 모호함과 애매성을 안기는, 명확한 지시성에서 벗어난 흔적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사진이 지닌 인증성과 지시성을 슬그머니 지워버린, 뭉개버린 사진말이다. 그것은 형상 없는 색채의 주름, 이미지 없는 살들의 흔들림으로 가득하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다름아닌 꽃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하고 경험한 꽃의 어느 한 부분을 암시해주고 있다. 꽃의 내부, 중심으로 육박해 들어간 속도감 있는 시선의 포착은 그 이외의 나머지 부분을 순간 날려 버렸다. 흩어진 대상은 색의 입자로, 인화지의 표면질감으로만 응고되어 있다. 입자가 촉각화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아직 잠에서 덜깬 자의 눈으로, 혹은 술취한 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꽃의 내부인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미지다. 꽃, 특정한 대상을 응시한 결과물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꽃이기를 멈춘다. 꽃이어도 좋고 그것이 아니어도 그닥 상관은 없다. 꽃에서 받은 인상은 구지 꽃의 형태를 유지, 간직하면서 남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물에서 받은 정서, 감동이나 인상, 그 기억은 이미지로만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고정시킬 수 없는 어떤 느낌으로 스민것이다. 단일하고 명확한 이미지, 형상의 그물에서 빠져나가 가물가물한 자취, 기운, 기미로만 떠돌고 맴도는 것이다.
김은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찍었다. 작가는 꽃의 중심, 근원에 다가가 이를 핀홀카메라로 찍는다. 핀홀 카메라의 작은 바늘구멍으로 들여다 본 꽃은 색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모든 꽃을 좋아하지만 그녀는 향기있는 꽃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해서 향기가 좋은 꽃을 찾는다. 꽃은 위안을 주고 마음을 다독이며 상심한 내면을 치유한다. 꽃만을 응시하다보면 이 세상의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거둬지며 그간 가슴에 가라앉아있는 모든 것들 또한 눈과 마음에서 빠져 나간다. 특히 작가는 꽃을 눈으로 보기 보다는 향기로 만난다. 눈을 감고 그 향기에 가득 취해본다. 코가 얼얼해지도록 냄새에 몸을 맡긴다. 사실 시각이 아닌 후각은 치명적인 기억을 안긴다. 냄새는 추억을 거느린다.

작가는 그 꽃의 냄새, 후각을 사진으로 담고자 한다. 냄새로 인해 떠올린 모든 것들 역시 사진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이 바싹 당겨진 근접한 거리는 시선을 지우고 후각기관만을 최전선에 놓는다. 냄새를 맡기위해서는 꽃의 내부로 가까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곳은 식물의 성기, 우주의 중심, 생명의 근원이다. 꽃과 꽃잎 이외의 것들은 뭉개지고 흐려져 있다. 흔들린다. 형태를 가능하게 하는 선은 사라지고 유동적인 색채의 흐름과 시간의 결들만이 그저 아롱진다. 희미한 잔영과 흐릿한 색채가 온통 뿌옇게 펼쳐진다. 그래서인지 마치 색채추상화를 보는 듯 하다. 붓으로 그려진, 물감의 자취만으로 얼룩진 회화와도 같다. 그림과 사진의 경계 역시 모호해진다. 모더니즘 회화, 색채추상이 그림을 이루는 존재론적 조건인 평평한 캔버스의 표면과 물감과 붓질이 특정 대상을 재현하는데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자족적인 조형적 질서를 이루면서 보는 이에게 호소하듯, 김은영의 사진 역시 주어진 대상 세계에서 출발해 이를 보여주는, 재현하는 사진에서 비재현적 사진 아니 재현과 비재현 사이에 서있는 사진, 그래서 인화지의 표면, 피부에 얼룩진 색채, 입자만이 가득한 사진을 보여준다. 그것은 문득 비현실적인 꿈이나 몽상의 한 자락처럼 비친다.
대상은 이내 흩어지고 시선은 분산되고 마음은 무형의 것으로 흐른다. 부득이 특정 대상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로부터 신속히 발산, 발화되어 달아나는 울렁이는 마음의 상태만 진맥처럼 흔들린다. 떨린다. 이 떨림은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서 그 대상의 외부에 있는 이, 관자들이 엿보는 것,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이 꽃이라는 사실은 최소화해서 알려준다. 아니 알려준다기 보다는 상상케한다. 사물의 지시성에서 빠져나오는 사진이다. 다만 냄새와 느낌, 기미와 떨림을 안스럽게 떠오려주는, 조심스레 재현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인지 가능한, 보는 이들이 인식하고 있는 해서 그 대상, 형상에 대해 지니고 있는 기대치를 뭉갠다. 그래서인지 익숙하면서도 다소 낯선 사진이 되었다. 대상은 머물지 않고 고정되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대상을 정적으로 가둘 수 없음을, 이 흩어진 시선들은 발언한다. 한 장의 침묵으로 절여진 사진들이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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