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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시대의 자화상, 동시대 정물화를 보다

박영택

정물화의 등장
서구의 전통회화는 주어진 텍스트(신화, 종교, 이데올로기 등)을 도상화하는 그림을 말한다. 정물이나 풍경, 인물은 한결같이 종교적 주제나 신화를 드러내는데 동원된 소재인 셈이다. 그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최후의 만찬>, <가나안의 혼례>의 식탁을 채우는 음식물,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수태를 고지하는 천사의 백합꽃 다발이 16세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한 그림의 전체를 채우게 되었다. 변화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가구의 문짝, 그리고 종교화나 초상의 뒷면을 장식하던 정물그림도 점차 그림의 앞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실제를 보는 듯한 착각을 주는 섬세함으로 그려진 꽃, 과일, 야채, 사냥고기 혹은 어류를 어울려 놓은 그림은 1650년경, 지금의 네달란드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는 자연’이라는 의미의 ‘still-leven’ 이라 명칭을 얻게 되었고, 영어권 지역에서는 ‘still life’란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한 세기 뒤늦게 ‘죽은 자연’이라는 의미 ‘nature morte’로 정물의 명칭이 정해졌는데, 이 명칭은 17세기부터 행해진 해골, 모래시계, 시든 꽃과 과일, 깨어진 그릇 등을 통해 이 세상 존재의 ‘헛되고 헛됨’(바니타스)을 표상하는 정물의 한 범주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정물화란 대개 “움직이지 않는 기물을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정지한 삶’에 해당하는 ‘still-life’, 불어로는 ‘죽은 자연’에 해당하는 ‘nature-morte’로 표시한다. 서구의 정물화는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정물화는 주변에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보여주었다. 정물화는 주인공 역할을 하던 인물들을 점차 배제하고, 의인화된 알레고리를 지양하고 ‘사물들에 의한 예화의 제시’ (Exemplum) 만으로 내용을 이루어내는 경우였다. 17세기 네덜란드, 이 시기에 새로이 출현한 정물화는 경제가 급성장하고 부가 쌓이는 시기의 물질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17세기 네덜란드적 ‘자연주의 양식’ Naturalism 은 경험과학적인 발견을 통해 세계가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 존재한 반면, 한편으로는 인간적 이해의 한도를 넘는 정신적이고 영원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중세적인 믿음 역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정물화는 유비에 의해 사물을 파악하는 중세적 사고방식에 근거하며 신의 창조의지는 그 피조물들에 구현되어 있으며, 자연세계의 풍부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신의 말씀을 읽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니까 바로크 정물화는 ‘대우주에 대한 소우주의 유비’였던 것이다. 이처럼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독립된 장르로 확립되었던 정물화는 당시 중산층의 삶의 존재감을 증거해 주었다. 자신들의 실내를 장식하며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조그마한 정물화가 인기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네덜란드는 식민지 활동에 힘입어 유럽에서 지도적인 해상국가로 자리잡은 때였으며, 유럽의 금융중심지였다. 이완된 형태의 국가동맹(네덜란드공화국)체제였기에 다양한 종교가 보장되었으며 따라서 예술활동 역시 상당히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그림 역시 취향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자본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도시 귀족이나 예술후원자만이 아니라 농민이나 수공업자 역시 그림을 보고 즐기며 수장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정물화는 식탁그림을 지칭하는 용어였다고 한다. 식탁 위에 다양한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그린 그림이라는 얘기다. 식탁이란 인간 삶에서 기본적인 먹거리가 놓여지는 생존의 공간이다. 그곳에 올려지는 것은 삶을 영위하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식탁이라는 받침대, 좌대 위에 올려진 음식 내지 장식적인 사물들이 미술의 주제가 되고 인물이나 역사화와 같은 차원에서 그 존재성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먹고 사는 것이 종교나 신화보다 더 중요해진 삶이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비로소 인간 삶을 규정짓는 틀이 자본주의적 세계관으로 전환하는 분기점에 등장한 것이 다름 아닌 정물화였던 것이다. 사소한 사물들이 놓여진 식탁과 비근한 일상적 삶의 공간이 그림의 소재가 되고 여기에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미술이 그만큼 일상적인 삶의 지평으로 내려앉았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제 미술은 더 이상 신화나 종교, 관념적 차원의 정해진 소재를 강제 받던 데서 벗어나 자신의 주변 세계, 일상적 삶을 이루는 사물들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같은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물화의 등장이다.


현대미술과 정물화
정물화란 서구에서 봉건의 몰락과 근대의 태동이란 시간대에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장르이다. 정물이란 원래 부동의 사물, 즉 움직이지 않는 사물이나 죽은 사물을 뜻한다. 죽은 자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경멸적인 용어는 17세기 프랑스에서 회화를 그 주제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성격을 규정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정물화가 다루는 자연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사물 역시 단순한 객체, 생명이 지워진 차가운 물건으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죽은 사물은 살아있는 사물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의미를 발생한다. 그리고 더 깊이 각인된 상처를 남긴다. 정물화는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의미를 지닌 장르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물화는 전적으로 화가의 테크닉을 과시하고 즐기기 위해 제작되어 온 역사를 보여준다. 꽃이나 과일, 기물 등 일상의 사소한 물건들을 소재로 하여 형태나 양감 등을 연습하기에 좋은 것이 정물화였다. 사실 전통적으로 서양미술사 담론에서 ‘정물화’라는 장르는 미술에서 가장 하위 장르로 취급 아울러 정물의 이 부동성은 흔히 사물의 고정된 한 순간의 포착과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조형예술에 있어서 그 공간형식(점유형식)을 실험하는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었다. 알다시피 정물을 소재로 한 세잔의 형식실험은 모더니즘 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세잔의 사과 하나가 미술을 재현으로부터 구조로 옮겨놓았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현대미술의 시원이라 불리는 세잔은 전통적 원근법이 아닌 원초적인 인간 지각으로 사물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세잔은 인상파 회화의 영속성을 처음에는 그의 정물화를 통해서 성취할 수 있었다. 세잔은 보들레르가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근대적인 미를 거론하면서 행했던 “근대를 생활하는 작가라면 자기 주위의 현실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곳에 있는 영구적인 것을 암시할 수 있는 요소를 그려야 한다.”라는 언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던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잔은 그의 정물화를 감각과 지성이 합치된 인식의 지평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렇듯 모더니즘 미술의 구조에 대한 관심은 사물(대상, 세계)의 부동성을,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죽은 세계 위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위한 온갖 형식실험이 가능해졌다는 애기다. 그러나 세잔느의 사과 그림이나 피카소, 브라크의 콜라주가 20세기 미술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정물화’로서가 아니라 각각 후기 인상주의, 입체주의로서 담론화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말하자면 인간의 위대한 행위를 기록한 역사화나, 자연을 찬미한 풍경화에 비해서, 일상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소재인 정물화는 진지한 주목을 받으며 연구될만한 대상이라기보다는 형태나 양감, 색채연습용 습작쯤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근대의 기형적 체험을 겪게된 우리의 근대 이후 미술이 양상도 그저 꽃과 과일, 화병만을 그림의 소재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기며 이 땅위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반복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 현대미술 속의 정물화
최근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서도 정물화는 여전히 강세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여전히 꽃과 화병 등을 기계적으로 공들여 그리거나 극사실적으로 묘사해내는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것들이 진부하고 상투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작가들은 그 사실이 조금은 깨림찍해서 약간의 변화를 꾀한다. 대상에 근접해서 그리거나 카메라 렌즈로 들여다보듯이 그리기도 하고 변형캔버스에 혹은 익숙한 과일, 꽃이 아닌 색다른 사물을 삽입시켜 새로워보이도록 연출한다. 구성을 달리하고 배열을, 그리는 방법론을 비튼다. 그러나 결국은 관습적인 정물화에서 크게 벗어나있지는 못하다. 그런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려지는 정물, 확장된 정물화의 연장선에서 살펴볼 수 있을 만한 그림들이 부쩍 눈에 띈다. 꽃과 과일을 대신해서 일상의 용품, 사물들이 전면적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그것이 작가 존재의 투사나 현실을 반영하는 매개, 혹은 미술에 대한 개념적 질문을 던지거나 기존의 정물화에 대한 반성적 측면에서 그려지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것은 매혹적인 상품, 사물을 공들여 그리거나 그것들을 채집해 그리는 일, 소소하고 비근한 사물로 채워진 자신의 일상(공간)을 그리는 일이다. 그것은 이전의 관습적인 정물화와 포개져 있지만 또한 그것과는 조금은 다르게 소비사회의 사물들로 둘러싸인 현실을 반영하는 제스처로도 다가온다. 사물을 빌어 말을 하고 사물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일이다. 작가들은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소비문화의 현실의 한 단면을 사물, 정물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소비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상품은 결정적인 볼거리요 매력적인, 감각적인 사물이다. 그것만큼 강력한 대상은 없다. 그 사물을 보는 순간 곧바로 욕망의 거푸집은 거의 광속으로 작동한다. 자본의 촉수로부터 결코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상품들로 가득한 매장은 소비자의 욕망을 지배하는 장소이며 물건을 미친듯이 사는 소비 형태로 끊임없이 욕망을 채워야하는 거푸집이다. 그곳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 낙원이다.

소비사회의 정물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라고 부른다. 오늘날 소비가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한 원동력이기에 그렇다. 오늘날의 개인은 소비자로서의 개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사물(상품)만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소비를 포함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생활의 상품화 과정을 통해 사물들은 실제적 기능과 물질성에서 자신의 의미를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체계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대신하거나 재현하는 그 무엇을 우리는 ‘기호’라고 부른다.
“소비는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이며 기호이다. 소비행위는 사회적으로 규정받으며 사회의 구성원에서 각각의 의미를 부여해준다. 이러한 소비의 기호적 표현을 통해서 사물은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된다.”(보드리야르) 그런데 이 사물들은 구체성을 통해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서 소비된다는 특징이 있다. 어떤 욕구를 만족시키기 보다는 어떤 지위를 의미화하기 위해 사물들이 소비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물간의 차이적 관계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니까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욕구란 특정한 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차이에 대한 욕구, 즉 사회적 의미에 대한 욕구이다. 여기서 사회적 차이의 논리란 사람들이 사물(상품)의 구입과 사용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러한 차이를 부여하는 것이 다름아닌 기호다. 간추려 말하면 기호가치는 물질문화를 지배하고 이러한 지배를 통해서 일상생활을 상품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은 인간으로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판가름하는 거의 유일한 잣대로 작용한다. 경제력이 없는 자는 놀 수 도 없고 더군다나 소비를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이 사진은 ‘화폐를 지불하는 대중적인 놀이의 장소’를 보여준다. 그 안에 공허함과 텅빈 갈증을 견딜 수 없어 끊임없이 뭔가를 채워 넣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삶이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디자인, 스타일, 이미지, 광고, 포장 등을 중심으로 한 삶의 외관 생산 즉 ‘상품미학’에 거의 편집증적으로 투자하는 이유는 개인 주체들을 상품소비를 통해서만 자아를 확대하는, 즉 ‘소유개인주의’에 포획된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상품미학의 기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을 소비자본주의의 라이프스타일에 통합하기 위하여 그들의 가치, 인식, 소비 형태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상품미학은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한 실현불가능한 약속을 통해 개인들로 하여금 상품에 매료되도록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인데, 사실 대중은 상품의 이데올로기 효과에 의해 기만당하기 보다는 상품을 자신을 차별화하며 드러내는 기호로 보기 때문에 상품소비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태영은 명품 브랜드(기호)의 향수병을 구입해서 그 사물의 표면을 하얗게 칠하고 이를 다시 사진으로 촬영했다. 다른 어떤 제품보다도 사치품으로서의 향수병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오브제다. 기호가 사라진 사물은 무척 당혹스럽게 위치한다. 우리가 사물, 상품을 본다는 것은 결국 그 기호를 보는 것이고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물, 상품에 대해 지니고 있는 기억이란 것은 결국 차이를 자아내는 디자인과 기호에 있다. 보는 이들은 그것이 본래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으며, 또한 그 기호가 어떤 차이를 생산해낸 것인지 연상한다. 이처럼 기호의 소비이면서 동시에 실제 물건을 소비하는 것은 실제의 행동인 동시에 상상, 허구의 행위이다. 사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다. 이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실체의 세계가 아니라 가상현실의 세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장태영이 명품 향수병을 선택하고 그 표면을 동일한 상태로 연출함으로써 사물간의 차이를 무화시키려는 제스처는 분명 상품미학에 대한 비판적 맥락에서 자리하고 있어 보인다. 주어진 순간에 식별이 가능하고 뚜렷한 미적 불변요소들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상표, 상품이다. 특히 이 사치상표들은 ‘아주 좋은 품질의 제품, 모방할 수 없는 스타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아주 비싼 것’이란 뜻이다. 현재는 명품에 대한 취향이 일반화되었으며 유명 상표에 대한 태도가 이전보다 계층화가 덜 되었다. 그에 따른 상표에 대한 대중숭배, 복제품의 확산, 모조품의 증가를 보게 된다. 모두가 명품 브랜드를 갖고 다닌다. 진짜가 어려우면 짝퉁이라도 소비한다. 소비는 단순히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 사회를 상징하는 사물을 소비하는 행위를 말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티적 마케팅이란 감정과 감각성, 일상생활을 미적으로 만들기 위해 역점을 두기 때문에 소비와 사치와 맞물려 돌아간다. 소비와 사치를 욕망하게 하고 그것을 기호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는 집단적인 차원에서 학습, 훈육된다.
최혜경 또한 향수병을 그린다. 한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향수병들이 사람이 키만큼 크게 그려져있어서 기념비적으로,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흰 바탕 위에 그려진 향수병들은 눈부신 조명을 받아 유리병과 그안의 액체가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보는 이들을 한없이 유혹하는 반짝이는 표면, 아찔한 향수의 내음, 아름다운 디자인과 색채는 선망의 대상이자 욕망의 결정이다. 그것은 시각 이전에 후각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급박하게 알린다. 작가는 전통적으로 회화에서 공간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서 사용하는 원근법적 요소와 물체의 질량과 부피를 알려주는 표현을 그림에서 배제하고 납작하게 향수병만을 독대시킨다. 그것은 광고이미지를 통해 각인된 향수병의 존재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구체적이지만 비현실적이고 견고하지만 비즉물적으로 다가온다. 향수란 것이 원래 그런 존재다.

한 슬은 립스틱, 컵, 하이힐, 커터 칼 등 자신의 일상적 사물들을 크게 확대해 그렸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흔한 일상의 사물이자 사물(私物)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변 사물들은 모두가 대량 생산된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사물들을 그림 안에서 새롭게 시각적 인식의 대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사소하고 인공적인 이 사물들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문제점을 제시하기보다는 물건 개개의 색과 형태를 커다랗게, 기념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사소한 물건의 재발견을 통해 넘쳐나는 인공적 생산물에 파묻혀 무의식적으로 반복되어지는 우리의 일상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진보라는 자신의 하루가 시작되는 곳, 너저분한 사물들로 가득찬 화장대를 보여준다. 자신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소이자 자신의 일상을 풍경처럼 보여주는 곳이다. 작가는 무질서하게 늘어져있는 화장품의 모습을 위에서 조망하듯 그렸는데 이는 마치 복잡한 도시의 형태를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모두 각기 아름다운 향과 모습을 지녔지만, 어느 것 하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작품 속의 화장품 병들은 많은 터치와 색으로 잘 포장되었지만, 그중 가장 돋보이거나 혹은 그 반대인 것도 없다. 그저 서있는 병들 그 가운데 하나 일 뿐이다. 이것은 어떤 장소나 공간에서, 다시말해 다수 속에서 돋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주인공이 되려고 내적으로 노력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묻혀버리고 말아버리는 자아의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대중 속의 침묵이 존재한다.”(작가노트)
박윤경은 일상 속의 소품들, 특히 소비사회 속에서 접하게 되는 인공적이고도 감각적인 소재들을 그렸다. 특히 이른바 여성적 정서의 상징이랄 수 있는 하이힐을 시각화했다. 그것은 여성의 정체성과 욕망을 상징하기도 하며 관능성과 성적 매혹을 드러내는 사물이기도 하다.
박현정은 선과 색채를 사용하여 사물의 형상이나 이미지를 평면 위에 투영한다.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일상의 소품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물을 응시하고 그것을 재구성하였는데 이 의도된 평면적 이미지들은 원본이 되는 대상들의 실재성을 깨뜨린다. 디지털 프린트와 같이 매끈한, 가상적인 그 무엇과 같이 그려져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종의 현실의 시뮬라크르로서 존재한다.


허구와 바니타스의 세계
이승희 역시 소비의 욕망, 사물의 소유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려는 현대인의 속성을 정물로 보여준다. 그것은 소유를 통하여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은 인정욕망이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타자의 선망을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시선을 통하여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품을 구입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이지만 사실 소비의 체계 안에 길들여지는 것이고 이는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코드화된 가치들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브랜드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어 소비품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사회에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습을 여러 가지 사물로 대체하여 표현한다.
작가는 미디어를 통하여 이미 만들어져 사용된 이미지(잡지광고 혹은 기성제품들)들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들로 표현한다. 그것들은 어쩌면 덧없고 헛된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물화의 오랜 전통인 ‘바니타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신을 포장하는 사물이 평면에 어지럽게 펼쳐지고 겹쳐져,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는 결코 상품으로는 만족되지 않는 현대인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황순일의 작업 역시 익숙한 정물화의 구성을 따르면서 일종의 바니타스적인 어둡고 눅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가는 극사실기법으로 바로크 시대의 바니타스 정물화를 재해석한다. 짙고 캄캄한 배경을 뒤로하고 각종 채소, 과일 그리고 고깃덩어리를 등장시킨 작품이다. 정물이라는 것은 죽어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 작가는 그러한 죽은 사물에서 살아있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정물과 더불어 배경에 나타나는 스피커는 죽음에 대한 경고를 나타내는 레퀴엠을 상징한다고 한다.
박재웅은 식물들의 시간성을 추적한다. 자기들의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길고 긴 여정을 통해 결국은 타생물체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형되고 섭취되는 소재들을 정물대 위에서 새 생명을 부여하고 의인화시켜 다시 재탄생에서 소멸까지의 과정이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연상시켜 준다. 그것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작가자신도 함께 시들고 소멸해 간다. 기록되어진 식물들은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에 병렬식 구도로 배치되어 그려지고 연속적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런 형태의 반복은 우선 시각적인 면에서는 화면에 리듬감 또는 연속성을 부여하여 정지된 화면에 시간적 요소를 개입시킨다. 동시에 화면이 외부의 공간으로 무한히 지속될 것 같은 확장효과 또한 가져온다. 모든 생명체는 결국 죽음, 소멸, 무로 돌아가는 치열한 과정을 겪어나간다. 죽음을 잊지 말라고 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잇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그림이다. 이것 역시 바니타스, ‘메멘토모리’를 연상시킨다.
홍경택 은 빈틈없이 화면을 가득 메운 연필과 책, 그리고 이것과 관계없는 물건들이 낯설게 어우러진 강렬한 원색의 그림을 보여준다. 공간공포증을 보여주듯 일정한 화면에 빼곡히 들어찬 사물들은 대량생산된 사물, 엄청난 정보, 낭비적인 생산 등등을 연상시킨다. 지극히 팝적인 소재를 매개로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데 작가는 자신이 그려낸 화면 위의 세계를 통해 일종의 판타지를 추구한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세계이자 허구의 세계이다.
서유라는 책장, 책이 마구잡이로 뒤죽박죽 쌓여있거나 상하좌우로 확대되고 있는 양상을 그렸다. 마치 읽다가 던져둔 듯한 책들은 펼쳐지거나 접혀진 상태로 드러나 있고 책 등에는 제목이 적혀있다. 유사한 내용의 책들이 제목에 따라 같은 공간에 모여있다. 분류와 체계, 질서가 작동하지만 정작 그 책들은 혼돈 속에 버려져있다. 책이란 지식, 역사와 경험, 기억의 총체들이다. 무수한 사상과 사유들이 혼재한 체 방치된 형국이기도 하고 저 마다 다른 생각과 의견의 갈등과 충돌을 떠올려주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이 습득한 지식의 책을 장정이나 제목을 재가공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붓질을 배제한 체 반짝거리는 화면은 이 재가공한 화면이 순간 사실이라고 믿게 만든다. 파편화된 이미지이며 별개의 책에 존재하는 그들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조합되고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보는 이들을 은밀히 책의 내용을 상상하게 하거나 그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편이다. 한편으로는 그 모든 생각과 기억의 덧없음도 은연중 중얼거린다.

그리고 존재의 투사
최은경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 놓인 비근한 사물들을 담담하고 적막하게 그렸다. 그것은 사물의 재현이면서도 동시에 비현실감이 감도는 기이한 색채와 발림, 붓질의 효과 등에 힘입어 야릇한 정조를 풍긴다. 방안에 놓인 책, 거울(축 발전이란 문구가 쓰여진), 문짝에 붙은 부적, 시든 화분 등은 작가 자신의 실존적 공간에 대한 심리적 무드를 드리우는 동시에 그 사물들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되묻는다. 사물들은 실질적인 삶의 편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분히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차원에서 삶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안성하는 투명한 재떨이와 담배꽁초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투사한다. 매우 시실적인 그림이지만 그것은 단지 사물이 재현이란 목적으로 위해 투여되기 보다는 적당한 순간에 멈춰있다. 사물을 묘사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느낌이 나온다고 여겨지는 지점, 정도에서 손을 뗀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이 투명한 재떨이는 감정이입을 하기에 적합한 사물이 되고 그것을 그림으로써 개인적인 만족 역시 추구하고 있다.
이정민은 음식물을 그렸다. 혹은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을 그렸다. 여기서 음식은 폭식과 거식의 중간 상태에서 생성되는 우울함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 그것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 사연과 맞물린다. 이른바 이 ‘빈지-퍼지 신드롬은 현대인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비정상적인 식욕을 보이거나 특정 음식에만 현저한 욕구를 느끼는 것을 이야기 한다. 작가는 아크릴과 먹이라는 다분히 비친화적인, 이질적인 두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그려나가면서 이른바 존재의 결핍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경심은 밥상을 소재로 다양한 음식물이 놓여있는 장면, 정물을 그렸다. 한지에 채색으로 그려진 온갖 음식과 밥상의 풍경은 우리네 소소한 일상에 대한 여러 애환과 추억, 사연과 시간 등등을 온전히 상상하게 한다. 식사에 관련된 개인의 애틋한 추억과 기억, 상념을 부풀려내는 이 그리기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로서 기능한다.


나오는 글
무수한 사물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 사물, 물건은 매혹적인 욕망의 대상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매개나 수단이 되고 있다. 혹은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상하고 있는 일상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자연의 일부를 삶의 공간으로 절취해서 끌어들인 과일이나 꽃 대신에 도시의 일상과 주변 환경에서 취한 사물들이 그것들과 함께 하거나 그것을 대신해 등장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오늘날 작가들은 백화점이나 샵, 혹은 커피 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안락한 행복을 꿈꾸거나 경험한다. 그 장소와 그곳을 가득 채운 물건들이 다름아닌 주술이고 기복이며 유토피아가 되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 강도가 점점 ‘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켠으로는 그 사물들, 물질들은 자본이 없으면 내 것이 되지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소외시키고 위축시킨다. 그 사이에서 흔들리고 갈등하는 모습들도 엿보인다. 따라서 작가들은 그토록 풍성하고 화려한 사물들 사이에서 그것과 나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이를 그림안으로 불러들인다. 또는 자기 주변의 사물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조용히 되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대의 새로운 정물화는 현실에 대한 다층적인 메타포로 연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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