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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정 / 문자

박영택

현대미술은 미술이 문학에 종속되어 온 역사를 부정하고자 했다.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의 완전한 삶을 추구했고 그 결과 미술에서 문학적인 요소가 지워지고 이야기는 배제되었다. 서양의 재현의 전통 속에서 그림과 글은 상호의존, 서로 밝히기, 종속과 같은 이미지아 기호는 공모관계이것이 고전적 재현 체게의 최종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의 회화 이미지를 보다 명쾌하게 보충 설명하기 위해 문자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 회화 속에 문자이미지 도입은 재현적 그림 속에서 그 그림을 지탱해주는 담론의 흔적을 제거하여 둘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그림은 아무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형상일 따름이며 글 역시 아무런 이미지를 환기시키지 못하고 자신의 형태 속에 갇혀 있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상일 따름이다. 말하고 있는 것은 던어 그 자체다. 미셀 푸코는 조형적 재현의 공간과 언어적 창조의 공간 사이의 구분을 페지한 사람이 바로 폴 클레라고 규정하였다. 클레 이후 15세기 이후 서양미술을 지배하고 있었던 조형적 재현과 언어적 지시 사이의 분리는 폐지된다. 문자와 이미지는 완연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고 그 둘은 만나서는 안 되었다. 이제 그림은 보고 있는 것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림의 표면이 그림 자체의 존재성을 지니게 되었음은 모더니즘미술의 일반적인 작업에서 흔하게 보는 경우다. 현대 미술은, 그림은 의미와 내용을 지닌 소통체계이기 이전에 순수한 시각적 대상으로 감상되고 이해되기를 원했다. 미술은 그 자체로서의 순결한 삶을 부여받았지만 이미지의 본원적인 힘과 내용을 상실한 체 다소 난해하고 폐쇄적인 게임, 또는 논리의 체계 속에서만 보호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류가 이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로 그들은 무엇인가를 소통하고자 그리고, 써나갔다. 그것이 일종의 문자가 되고 그림이 되었다. 상형문자나 이미지-문자간의 구분이 없이 그 둘이 혼재되어 들러붙은 일종의 기호들이 우리가 만나는 그 시대의 흔적들이다. 그것은 그림이자 문자였고 상징이자 이야기며 문장이고 책이고 약속이며 기억들이었다. 암벽이나 돌의 피부위에, 나무나 양피지, 혹은 짐승의 껍질 위에 각인되고 새겨지고 얹혀진 그 기호들은 분명 독해와 의미의 수용을 요구했던 것들이었으리라. 이미지와 문자는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 둘은 상호 보조적이자 불가분의 관련성 속에 공존하였을 것이다.

미처 판독 불가능한 문자들의 체계는 마냥 신비스럽다. 어쩌면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매력을 부여하는 것도 같다. 선사 시대인들이 남겨놓은 상형문자나 기호들 혹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이집트의 상형문자, 오래된 갑골문자 등이 그렇다. 상상력과 자의적인 독해의 개입을 자극하고 부추키는 옛 문자들과 이국의 문자들은 오로지 시각적 대상으로 자존한다. 그것은 쓰여진 것이자 새겨지고 그려진 것들이다. 문자의 형상은 심미적이고 조형적이며 매력적인 이미지다.
이현정은 어느 날 작업실에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한다. 텅 빈 캔버스앞에서 순간 망연한 감정을 기억한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이 텅 빈 화면은 일종의 공포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도무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은 작가는 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심정이 문득 부끄럽고 자괴감이 밀려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화면에 ‘부끄럽습니다’란 문자를 썼다. 다 쓴 후에 조금씩 지워보았다. 직접적인 표명은 낯설고 약간 흐릿하게 지우고 덮어나가는과정에서 그것은 이미지/그림에 유사해졌다. 그로부터 문자작업은 시작되었다. 2005년도의 일이다.문자는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감정을 그림으로 그리기보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기보다 문자로 기술하는 것이 보다 직접적이고 간편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을 써나간다는 것은 그림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순간 이내 테레핀으로 슬그머니 지우고 붓질로 덮어나가면서 문자를 흐릿한 몽환적인 잔상, 이미지인냥 연출한다. 그러나 어렴풋하게나마 문자는 읽힌다. 보는 이들은 지워지고 흐려진 문자를 가까스로 읽어나가면서 내용을 파악한다. 화면앞에 주의를 기울여 작가가 연출한 표면을 공들여 읽기/보기다. 작가는 수다를 떨거나 낙서하는 본능적 습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공허함과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자 투항이며 공백, 공허를 찹지못하는 조바심이다. 혹은 마음속에 생각속에 무수하게 일어나는 것들에 제대로 몸을 주지 못해, 그럴듯한 형태를 만들어주거나 부여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곤혹스러움이나 절망감 같은 것의 토로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말은 늘 소통의 오해를 초래한다. 그것은 적절히, 완벽하게 전해지지 못하고 아울러 자기 목구멍 밖으로 온전하게 외화되지 못한다. 언어와 문자는 늘 불구적이다.

이 그림은 사물들을 보여준다. 작가가 취급하는 사물을 보여준다. 화필, 물감, 터치 등이다. 물질을 흩어지게 한다. 그것은 롤랑바르트가 말한 이른바 ‘팔랭프세스트’(Palimpseste/ 이미 쓰여있는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자를 쓴 양피지나, 혹은 여러번 가필, 정정, 삭제를 거쳐서 아주 달라진 작품을 가리킨다)와 유사한 흔적이다. 그것은 또한 글쓰기와 회화를 혼합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미묘한 호흡과 기운이 흐르는 화면은 보는이들은 스스로 참여한다. 문자를 자기식으로 읽거나 독해하고 채운다. 마치 낱말맞추기를 하듯이 관여한다. 개입한다. 이 그림은 손으로 쓰는 것이 유일한 사건이다. 그것은 페인팅이다. 하나의 회화, 그림으로 만드는 일이다. 여전히 손은, 육체는 화면위로 부유하고 캔버스란 공간과 함께 호흡한다. 그곳에, 그 안에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그려넣기는 정말 어렵지만 대신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기술한다. 그것은 특정한 감정상태를 표시하는 문자이거나 일기의 한 부분이다. 뭉개지고 훼손된 상처같은 문장은 마치 물에 젖어 망가진 편지나 일기를 연상시킨다. 의도된 흔적들이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상하고 그려내는, 써내는 문자/글을 지우는 것은 일종의 소통행위에 대한 절망이나 소통불가능을 이야기하고 그러나 여전히 판독될 만한 문자의 남김은 그럼에도 약간의 소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작가의 소망을 전한다. 언어/문자를 무로 돌려버리는 동시에 여전히 미약하나마 그 문자/언어를 되설리려는 이중성이, 양가성이 공존한다. 동시에 언어/문자를 지우고 덮어나가면서 기호는 물질로 흡수돠어 붓질과 물감 사이에서 부유한다. 제한된 몇가지 색으로만 한정된 화면은 우선 초점을 상실하고 흔들리고 뿌옇다. 경계를 파괴하고 흐리게 하는 기법이다. 그래서 시각적인 것 너머의 비시각적인 부분들을 떠올린다. 동시에 감정의 여진을 남긴다. 비시각적 세계의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호함을 보여준다. 이 모호함의 공유란 동시대 작가들의 공통된 지점이기도 하다. 명료한 망막중심주의에 기반하지 않는 이 눈에 이물질이 끼여있는 듯한, 눈병에 걸리거나 점차 눈이 멀어가는 이들에 의해 안타깝게 붙잡힌 사물, 눈 먼자의 영역인 듯 그러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캔버스에 물감과 붓질을 구사해 문자를 쓰고 지우는 작업이 그다지 효과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저 추상표현주의나 질료와 터치로 자족하는 회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물론 흥미롭게도 문자, 그것도 어느정도 가독성이 잇는 문자의 등장은 내용을 대체하고 호기심어린 볼거리를 만들어주지만 현재의 방법론이 작가의 의도에 부합되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띤지 아쉽다.

<부끄럽습니다>와 같은 작품은 점차 안쪽으로 소멸되어 가는 듯이 그려져서 문자의 지시하는 바와 그림의 형식이 비교적 잘 맞는다고, 효과이라고 보여지낟. 그러나 <일기>는 그에 비해 너무 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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