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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 생명있는 것들의 희열

박영택

제주에서 온 그림들은 비릿하고 짭짤한 내음을 머금은 해풍과 야생화에서 번지는 아찔한 향기와 새소리, 운우의 정에서 번지는 신음소리 등을 가득 안고 밝게 빛난다. 활기차게 약동하는 생명있는 것들의 몸짓이 부산하고 대지에서 움트고 번져 나오는 꽃들이 어지러이 가득하다. 따뜻하고 환하게 눈부시다. 그 자연 속에서 은거하듯 집에 좌정한 이가 있고 골프를 치는 이들도 있다. 작가 자신의 삶의 반경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나와 있다. 이른바 생활이 그림이 되고 있다. 그 생활은 천혜의 제주 자연에서 새삼 발견하고 느끼는 생의 이치나 자연의 순리 같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골프를 치면서 겪는 세간사의 인정이나 인간 본연의 초상인 듯 하다. 그 세계는 극단적이기도 하고 서로 상보적으로 위치해있다. 우리가 자연안에서만 혹은 현실계의 각박한 틀 안에서만 살 수 는 없다. 그 세계를 넘나들고 흔들고 타고 넘어가면서 사는 것이다. 지극히 평화롭고 안온해 보이는 집안에서의 삶과 경쟁과 욕망으로 부산한 골프장 풍경은 이 작가가 이해하고 보여주는 삶의 서로 다른 그러나 한 몸에서 나오는 얼굴이다. 이 두 개의 세상을 자연은 변함없이 보듬고 풍요롭게 채워준다. 자연을 생활과 함께 묶어내고 자연에서 일러 받아야 하는 삶의 이치를 주술적으로, 기복적으로 그려보이는 그림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전통사회에서 이미지를 통해 추구했던 마음, 사유와 동일하다.

그래서 이왈종의 그림에는 문인화에서 엿보는 탈속과 은거, 은둔의 취향이 깊이 스며들어있고 그 위에 민화가 표상하는 신화적이고 토착적인 세계관, 주술적 생사관과 그 도상들이 가득 차용되어 있다. 덧붙여 불교미술의 장엄미도 몇 겹으로 올려져있는가 하면 그 위로 우리 전통미술의 흔적들이 눈송이처럼 내려앉아있다. 수묵으로 구현된 탈속적인 미감의 이미지가 좀 더 해학적으로 위치한 위에 강렬한 진채로 수놓아진 민화나 화려한 색채와 현란한 꽃이미지로 직조된 꽃창살문의 이미지 등이 얹혀져 한 화면에 공존하고 버무려져있는 식이다. 절충이거나 종합, 통섭의 손길 아래 모든 것들은 곤죽이 되어있다. 한지를 두툼한 질감효과로 일으켜 세워 담벼락이나 돌담처럼 보여주어 벽화그림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가 하면 평면작업뿐만 아니라 부조와 조각을 넘나든다. 수묵으로 그려진 윤곽선 안에 채색이 결합되어 일체화되는 동시에 도자기나 골프공의 표면에도 그림을 확장시킨다. 그는 모든 평면/피부에 반복해서 자기만의 트레이드화 된 도상들을 증식시킨다. 그것은 매순간 자기 삶을 확인하고 그림 그리며 그 실존의 삶을 채우고 있음을 증거하는 동시에 무료와 딴 생각, 잡념이 깃들지 못하게 시간을 그림으로 메꿔 나가는 행위이다. 그는 전통미술의 여러 다양한 양상들을 자기 일상의 이미지와 뒤섞어 ‘생활산수’, ‘생활민화’ 혹은 ‘생활춘화’, ‘생활풍속’이라 부를 만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에는 언제나 작가 자신과 생활공간, 친구들과 자연풍경이 등장한다. 이 변함없는 소재들은 약간의 변주를 거느리고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된다. 마치 우리네 일상이 그렇게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듯이, 변함없이 흘러가듯이 말이다.

그의 그림은 이야기 그림이고 도상적이며 무엇보다도 기복적이고 주술적이다. 생의 근원적인 염원과 기원을 그린 이미지들이다. 제주도에서 보내는 연서 같은 그림들은 자신의 한가로운 일상, 주거공간을 보여준다. 여자와 차를 마시거나 섹스를 하고 더러 그녀의 잔소리를 듣거나 구박을 견디는가 하면 홀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드러누워 책을 읽는 장면이 만화처럼, 삽화처럼, 이야기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또는 친구들과 전쟁 같은 내기 골프를 친다. 둘 다 작가의 현재의 삶, 반복적인 일상을 보여주는 정경들이다. 손에 잡힐 것 같은 이 소소하고 한가해 보이는 하루의 일과가 반복해서 그려진다. 이렇듯 그는 돌담으로 둘러쳐진 집에서 보내는 매일의 일과를 그림일기처럼 보여준다. 집 뒤로 커다란 나무나 꽃들이 병풍처럼 가득하다. 그 위로 장수를 상징하는 나비가 날고 더러 봉황이 날아오르는가 하면 부부금슬을 뜻하는 새들이 한 쌍으로 지저귄다. 더러 벌거벗은 여자들이 날아다니고 추락한다. 꽃과 물고기, 집과 각종 꽃들, 여인과 탑, 집과 강아지, 골프백은 그의 그림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이미지다. 그 사이로 다양한 체위를 벌이는 남녀의 모습이 숨은 그림처럼 껴있다. 이 이미지들은 여전히 주술적이고 부적 같은 의미를 두르고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기복적 이미지를 그려보이고 아울러 그 부적 같은 이미지들을 관객들에 선사한다. 이 재미나고 장식적이며 더없이 친근한 주술적인 그림은 그만큼 대중들에게 익숙하고 친근하며 좋아하는 그림이 된다.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우선적으로 조선선비의 은거정황 隱居情況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심산유곡에 자리잡은 누각안에서 서안에 기대앉아 세차게 흐르는 계류를 망연히 바라보는 은사그림 또는 눈 덮인 겨울날 만개한 매화의 화려하면서도 강인한 자태를 곁에 두고 작은 집 안에서 선비가 홀로 책을 읽고 있는 <매화서옥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왈종의 그림을 보노라면 분명 그 같은 그림에서 엿보는 세계가 내려앉아있다. 그가 지향하는 삶의 편린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만난다. 그가 얼마나 조선 선비들의 그림세계에 깊이 경도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왈종은 그 나름으로 현재의 삶에서 옛 선비들의 그 같은 삶의 방식과 여운을 따른다. 극도로 생략된 풍경 속에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감을 두르고 건필의 먹선으로 소략하게 지어진 집안에 좌정한 선비그림에 비해 더없이 화려하고 무척이나 장식적이고 너무 매만져지고 무척 ‘예쁜’ 그림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 안에 흐르는 정신기이랄까 기류는 선비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아울러 그는 한국 전통미술의 다양한 흔적들을 골고루 섞어서 그만의 화면 구성과 틀 안에 버무려놓았다. 여기에는 단지 형식적이고 외양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그 저간에 흐르는 세계관, 사물관이랄까 모종의 정신이 간결하게 추려져 함께 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가 평온하고 평등하게 조화를 이루는 장면으로 나앉았다.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만물의 그것으로 치환되며, 인간은 우주만물의 극히 작은 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인간의 눈으로 대상을, 자연을 바라보고 질서지우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전도된 시각을 영위한다. 이른바 대칭적 사유가 그것이다. 또한 만물이 평등한 모습으로 등장한다기보다 오히려 범신론적인 체계를 보여준다. 인간과 생물에게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상이 모두 동등한 정령을 지니는 생명체로 등장하며 그것들은 서로 융화하고 침투하고 또 변형되기도 한다. 그는 이를 중도의 세계’라 칭한다. 그것은 너와 나의 상대적 개념이 없고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으며 사물마다의 존재방식이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이는 다름아닌 우리 전통미술이 보여주고 들려준 내용이다.

모든 생명체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은 음과 양의 왕성한 교류 내지는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생명력은 꽃으로, 한 쌍의 사람의 사슴, 새로 그려진다. 그것이 지상의 모든 생명있는 것들이 여전히 윤회하고 살아가는 영원한 힘이자 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그는 그러한 힘과 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외설스럽게 삽입된 섹스장면 혹은 다양한 체위를 해학적으로 그린 형상들은 보는 이에게 은밀한 관음증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주술적인 기원도 깃들어 있다. 그는 인간생명의 본능을 표현한 남녀의 엉킴을 솔직하게 그려나간다. 영원한 섹스에 대한 동경이나 두려움, 그리고 왕성한 생명력을 소망했던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발설하듯 그려낸다. 죽음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섹스이다. 신라의 토용들이 캄캄한 무덤 속에 들어가 한 것은 다름아닌 영원한 성행위, 출산 등이다. 아울러 섹스는 가장 원초적인 놀이이자 희열, 권태나 지루한 일상을 망각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런 열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건드려준다.
그런가하면 사찰 꽃창살의 구성과 미감 또한 강하게 전이된다. 평면회화는 물론이고 그가 최근에 시도하고 있는 입체작품과 부조에서도 그 영향관계가 선명하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들이 흩날리는 듯한 문창살, 꽃살은 사찰에서 그 화려함의 정점에 서있다. 사찰의 꽃살이 갖는 의미는 화엄과 기예의 두 가지라고 한다. 불교에서 꽃은 법이요 진리며 극락이다. 그리고 신성함을 의미한다. 꽃은 그 자체로 완결된 여래의 씨앗이다. 꽃은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것을 화려한 형색으로 보는 것은 인간이다. 감각적 욕심 때문에 꽃을 자극적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변질시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 꽃에서 분별상을 찾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유마경>은 가르친다. 또한 꽃창살은 꽃만이 아니라 무수한 생명체가 죄다 달라붙어 연결되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이렇게 연기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생명 하나하나가 모두 지극한 불성이라는 가르침이다.
이왈종의 그림 또한 그 연기적 고리가 핵심이다. 범신론적 공간구성은 그로인해 파생되어 나온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말하기를 인간이 우주만물의 작은 부분임을 깨달아 중도의 정신, 즉 모두를 포용하며, 그 포용된 것을 주객으로 분리할 수 없는, 저마다의 독자적인 절대가치를 인정하는 세계를 지향하여 자연과의 조화롭고 평등한 관계를 이룩하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있다고 한다.

서귀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업실에서 그는 매일 8-20시간씩 제주의 청명한 햇살과 바람, 파도를 애인처럼 끼고 그림에 몰입한다고 한다. 가능한 오후 5시 이전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그림에만 집중하고 그렇게 매일 그림을 아무 생각없이 그리고자 한다. 그의 그림은 반복된 도상과 엇비슷한 구성들이 줄을 이어 반복된다. 무심하게 몰입하고 잡념없이 그림에 집중하기 위해 가능한 생각없는 그림, 아니 생각이 끼어들거나 이런저런 궁리로 흐르는 것을 막고 가능한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자기 손에서 본능적으로 이끌려지는 대로,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런 의도를 더욱 밀고 가기위해 그는 최근 나무를 깍고 다듬어 채색을 하는 목조각 혹은 부조적인 작업을 한다. 작업에 전념하면서 딴 생각이 끼여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욱 손이 많이 가고 따라서 무척 몸이 고된 작업을 의도적으로 끌어안고 간다는 생각이다. 그 안에서 재미를 추구하고 즐거움을 찾고 그런 그림을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고 즐기고 더구나 많이 사가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는 참 행복한 작가이고 복이 많은 작가이다. 자기 생의 축원적 의미로 수놓아진 그 부적이미지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소중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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