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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은 / 일회용 사물의 환생

박영택

언젠가 워홀은 “팝아트란 사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알다시피 그는 상표가 그대로 부착된 대량 생산의 공산품을 그대로 그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 충격은 닳아지고 휘발되었다. 그러나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의 상당수는 여전히 워홀의 전략을 유전받고 있다. 사물을 좋아하고 특정 브랜드가 부착된 상품에 매혹당하는 강도는 이전에 비해 훨씬 강력해졌고 따라서 사물과 특정 상표, 상품을 미술적으로 다루는 작업들도 무척 많아졌다. 사실 전통적인 예술에서 사물은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사물은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의 심리상태나 정신적인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와 예술에서의 사물은 더 이상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가치를 대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자율적인 요소가 되었다. 큐비즘에서 보듯이 사물은 거의 추상적인 형태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1960년대 팝아트와 함께 사물은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처럼 사물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바로 다름 아닌 소비사회라는 얘기다. 단연 현대는 사물의 시대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고, 그 체계를 탐구하려는 예술이 상품으로서의 사물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소비란 ‘재화의 효용을 소멸시키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실제 물건을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써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소비의 대상은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물건이어야 한다. 알다시피 현대사회는 그 소비를 학습하게 하는 사회이며 소비가 사회적 노동이 되었다. 현대 사회는 격렬한 소비와 사치가 지배한다. 소비를, 사치를 강요하는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소비자로서의 개인에 머문다. 안세은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사물, 상품에 주목한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일회용품, 그중에서도 종이받침, 생수병 뚜껑 등이다. 한 번 쓰고 이내 버려져야 할 것들이고 너무 많고 흔해빠진, 하찮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멸시키기에는 아름답고 견고하고 아까운 것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쓰고 버려지고 마는 것들을 수집, 채집했다.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된 종이 받침을 캔버스에 확대해서 그려놓는가 하면 다양한 생수 병뚜껑을 집적, 배열시켰다. 원본으로부터 낯선 존재로 탈바꿈되는 동시에 이른바 ‘리사이클링’적인 작업이라고도 부를 만 하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은 본래의 사물을 단지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병뚜껑을 조형적으로 ‘각색’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미 존재하는 사물들을 다루는 오브제작업, 혹은 ‘레디메이드’를 다루는 작업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그 일회용품이 주는 어떤 정서적인 측면이다. 꼭 그것만은 아니지만 작가는 그렇게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무수한 사물들을 보면서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일회적으로 스치고 간과되는 파편적인 현대인의 삶과 운명을 떠올려본다. 획일화된 상품의 겉포장, 디자인을 통해 가볍고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현대, 현대인의 삶을 은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동안 무수한 사물,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그 모두를 반복적으로 소비하면서 살지만 정작 진정한 교감이나 교류란 불가능한 현실, 형식적이고 고독한 틀 안에서 타인과 사물, 물건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무엇일까를 작가는 질문해본다. 여기서 종이 받침이나 병뚜껑은 매일 되풀이 되는 작가 자신의 일상을 대변하는 사물/매개다. 자신의 일상은 그것과 함께 일회적으로 소모되고 반복된다. 그 사물의 피부에 문득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이다.
종이 받침을 캔버스에 부분적으로 확대해서 그려놓은 그림은 자잘한 점들의 산포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펄이 들어간 흰/회색의 물감/점은 어두운 배경을 바탕으로 별처럼, 눈송이 처럼 반짝이면서 소중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자아낸다. 단순히 소모되고 마는 일회용 종이 받침의 운명을 순간 역전시키는 것이다. 이 추상적인 점들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특정 사물의 피부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묘사한 것은 분명 아니다. 여기서 구상과 추상, 재현과 비재현의 경계는 마냥 흐려진다. 붓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스텐실 기법으로 찍어서 만들어진 점들이 종이 받침의 문양을 다만 ‘시늉’하고 있다. 흑백의 단일한 색상에 의해 반복적으로 증식하는 점은 미묘한 환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규칙적이고 규격화된 패턴을 만들어보인다. 사실 그렇게 이루어진 형상이 무엇인지 구별하기는 어렵다. 종이 받침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화면은 촉각적인 점들의 융기로 덮여있고 무수히 산개하고 번져나가는 유기적 생명체의 잔영을 순간 안기기도 한다. 유동적으로 흘러다니는 점들은 시선을 교란하고 화면을 약동적인 그 어떤 것으로 돌변, 팽창시킨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 단조로운 점찍기는 표면을 덮는 힘과 장력을 발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강박도 거느린다. 주어진 공간을 촘촘히 채우고 가지런히 정돈하고 그것들로 인해 완성과 안정감을 추구하는 작가의 심리적인 속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 고된 육체적 노동은 일종의 치유적인 작용도 한다. 반복적인 리듬, 미묘하게 변해가는 음악적인 리듬과 일정하게 가지런히 정돈되는 점들은 심리적인 안도감/ ‘무념무상’의 시간을 안기는 것이다. 동시에 물감/점은 작가의 신체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작가가 화면에 남긴 붓질/점은 그녀의 현존의 흔적인 셈이다. 이 표시들은 작가의 사인이기도 하고 창조적 주체로서의 그녀의 실존을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일회적으로 소모되고 피상적 관계 속에서 소멸되는 현대인의 삶과 운명 속에서 개별적인 점 하나를 반복해서 찍고 그것으로 일회용품의 아름다운 형상을 환생하는 동시에 자신의 실존적인 의미망을 각인하는 제스처가 다름아닌 그녀의 그림/작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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