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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동행-로버트 카파 '극단에 선 시선'

박영택

이미지란 기억의 수단이다. 찰나적이며 이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을 영원히 각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장의 스틸 사진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사진은 ‘기억하는 거울’이기에 그렇다. 사진의 발명 이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사진으로 기억되고 보존되며 거의 실시간으로 동시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진의 기능이 빛을 발휘하면서 수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전쟁 사진이었다.

20세기는 전쟁이 시기였고 사진가들은 그곳에서 본 것을 보내왔고 이는 다음날 신문, 잡지에 실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했다. 전쟁을 통해 비로소 사진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가 명료해졌으며 사진이 여론을 형성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한편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결정적인 매체가 된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전쟁사진가로서 꼽히는 이는 로버트 카파다. 그는 운이 좋게(?) 2차 세계대전, 스페인내전, 중일전쟁, 베트남전쟁 등이 일어난 공간에 갈 수 있었고 현장에서 본 것, 찍은 것을 잡지사에 송고했으며 그로인해 전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한 장의 사진은 정수리를 깨는 무기가 된 것이다.
1913년에 헝가리에서 유대인 부모를 둔 앙드레 프리드만 (카파의 본명)은 한 손이 육손인 체 태어났다. 부모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아버지는 노름에 빠져있었으며 그는 공부는 못했고 늘 찢어진 바지를 입은 체 몽상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사회정의와 개혁을 위한 정치 참여적 행동으로 인해 헝가리에서 추방당한 후 그가 간 곳은 베를린이었다. 17세 때였다. 얼마 후 부모로부터의 원조가 끊기자 무일푼이 된 그는 먹을 것과 일거리를 찾아 헤맨다. 당시 그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그래서 사진가의 조수생활을 하며 라이카 카메라 작동법을 배우고 사진의 기술적 장점을 익히면서 사진가, 저널리스트를 꿈꿨다. 당시 독일은 정치적 혼란기였고 점차 나치당이 집권하려던 시기였다. 공포와 폭력이 난무하던 암울한 그 시기, 그는 나치를 피해 독일을 떠난 이후 파리와 뉴욕으로, 전쟁터로 떠돌아다녔다. 타고난 천하태평의 성격과 뻔뻔함을 지는 그는 항상 유쾌했고 언제나 순간을 즐겼고, 인생에 대한, 특히 음식과 술과 여자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남자였다.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고향과 집을 떠나 무일푼으로 방랑하며 살아가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의 삶과 유럽대륙 전체가 점차 전운으로 물들어가던 시기는 정확히 부합한다. 그는 기꺼이 자기 시대 안에서 소진되어갔다. 어쩌면 예술가란 존재는 주어진 현실의 틀 안에 자족하기 보다는 그 경계에서 새까맣게 타버리면서 견디는 자들이다. 미래가 없는 현실, 고향에 갈 수 없고 가족도 없이 무일푼이었던 그는 오로지 순간에 매달렸다. 극한 적인 전쟁터와 술과 도박, 담배 그리고 여성은 그에게 유일한 구원이자 자극이었다. 수많은 여성과 관계를 가졌던 그는 잉그리드 버그만 같은 영화배우와도 염문을 뿌렸다. 그의 어머니는 회고하기를 카파는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여자들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에게 전쟁과 섹스는 동일한 대상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접근하려는 것과 미지의 여성에게 다가가 함께 한다는 것은 동일한 지점이 있다. 그는 타고난 예리한 육감으로 전쟁 직전의 공포와 광기가 뒤덮은 당시 현실을 찍었고 이내 그 광기가 폭발한 전쟁터로 내달렸다. 그는 모든 이들이 싸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사진을 찍고자 했다. 특히 스페인 내전에서는 유명한 <쓰러지는 병사>를 찍었다. 이 사진은 1937년 7월 12일 <라이프>19쪽에 “총알이 관통하는 순간 쓰러지는 스페인 병사”라는 사진 설명과 함께 게재되었다. 포토저널리즘의 역사상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진은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견줄 만한 시각적 힘을 지닌 전세계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대담하고 단호하게 전쟁의 극한으로 다가가 한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해낸 사진작가로 기억된다.
전쟁터에서는 현재,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만이 인간의 머릿속을 채운다. 본능과 직감이 모든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을 밀어내는 곳, 전쟁터다. 앞서 이 사진을 찍고 유명인이 된 그는 짙은 속눈썹과 검은 눈, 언제나 담배를 아랫입술에 붙인 냉소적으로 보이는 입, 약간의 눈웃음으로 여성들을 사로잡았으며 늘상 술과 노름에 집착하면서 모국 헝가리로 추방될 위험, 여전히 무일푼인 아슬아슬한 삶을 살았다. 당시 그의 상황, 시대 상황은 안정이나 평범한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극단적인 삶속에서 극단적인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고 그곳에서 도박을 하듯 결정적인 전쟁사진을 찍었다. 카파의 사진은 모두 전선에서 찍은 것이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찍은 사진들이다. “오늘도 중요하지 않고 내일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게임의 끝이야”(카파)

베트남 전쟁 사진을 찍어달라는 <라이프>지의 주문을 받고 전선에 간 그는 1954년 5월25일 지뢰를 밝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너무 가까이 간 것이 화근이었다. 생전에 그는 “만약 당신 사진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면. 바싹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쟁터에서 지뢰를 밟아 죽은 그가 남긴 것은 호텔 계산서 몇 장, 약간의 도박 빚, 카메라 몇 대, 우아한 양복들, 그리고 그의 사진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찍은 그 사진들은 그가 보았던 야수의 시간, 광기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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