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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환 / 인쇄물의 기이한 환생

박영택

종이만을 사용해 조형적인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도 꽤 있다. 종이라는 존재, 물성을 다양한 변형태로 보여주는가 하면 그것이 기존의 회화를 대체하고 더 나아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김춘환의 경우도 그렇다. 그 외에도 무척 많은 작가들이 종이가 지닌 매력을 흥미롭게 연출한다. 김춘환은 잡지와 신문, 각종 광고홍보물과 전단지, 매뉴얼과 전화기록부 등 종이로 된 모든 유형의 인쇄물을 재료로 다룬다. 그것들을 모아서 쌓거나 배열하고 채운다. 그러니까 그는 인쇄된 종이를 사용해 이를 집적시켜 덩어리를 만든 후 그 표면을 커팅해서 보여준다. 우선 기존의 인쇄물들을 낱낱이 해체하고 조각을 낸 후 이것들을 가지고 다시 물리적인 크기, 평면으로 만든다. 그것은 깊이를 지닌 종이부조, 일종의 콜라주다. 특히 종이의 단면이 절단되는 순간 기묘한 쾌감과 공격성을 접하고 또한 종이의 속살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 표면 절단 행위에서 기존의 인습과 지식, 이데올로기, 상식과 가치를 가차없이 제거해버리는 듯한 단호함 역시 만난다. 인쇄된 책자나 정보가 담긴 종이를 찢는 다는 것, 종이덩어리를 만든 후 그 표면을 커팅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지닌 실용적인 차원을 무화시킨다는, 파괴시킨다는 제스처다. 읽을 수 없고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정보 자체를 지워내고 삭제시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을 통해서 소통하고 학습하며 길들여지게 하는 상황에 대한 무척 비판적인 의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나의 일상생활은 소비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너무나 다양한 생산물들과 정보 매체들, 특히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사용의 일반화에 의한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 서서히 잠식되어가고 있다. 내 작업은 현대 소비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사회가 새로움이라는 이름 하에 시시각각으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보 그리고 이미지들의 생산 소비와 축적이라는 새로운 메카니즘이 초래한 일상에서의 문화적 혼돈에 대한 반응이다...광고 인쇄물과 잡지는 지금 현재 우리 일상의 단면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오브제다. 그 안에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우리들이 생생한 모습이 담겨져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다. 내 콜라주들은 단순한 개념의 예시나 감정의 투사가 아닌 일상의 다른 시간들 속에서 현실을 인지해 나가는 한 방법이며 사회 속에서 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작가노트)
그가 만든 것은 부조적 화면이자 기이한 회화다. 그는 종이를 물감처럼 다룬다. 그림이라는 것이 캔버스라는 용기에 물감을 독특하게, 다채롭게 담아내는 것일 수 있다면 그는 물감 대신 종이를 주어진 박스, 나무 패널에 담는다. 여기서 그림의 내용은 그 형태, 물리적인 크기와 규격이 규정한다. 주어진 틀 안에서 종이는 자신의 피부를 보여준다. 사각형의 용기나 둥그런 깡통 혹은 다양한 오브제 안에 종이를 채워 넣는다. 그것은 종이를 체적화 시키고 얇은 단면의 종이장을 물질덩어리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종이는 전혀 색다른 존재로 탈바꿈된다. 집적과 절삭 등을 거쳐 원래의 종이는 변신을 거듭한다. 그렇다면 파괴나 해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또 다시 새로운 존재로 환생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 종이는 알록달록한 색상과 문자, 사진 등으로 인쇄된 것이기에 그것이 짓이겨지고 뭉개지고 깍여나간 부위가 그림처럼, 하나의 추상회화처럼 다가온다. 우리가 보는 것은 비로 그 면/ 단면이다. 종이는 수직의 깊이로 박혀있는데 우리의 눈은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현란한 표면을 맴돈다. 그것은 시각을 현란하게, 정처 없이 만든다. 그의 작업은 분명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 못지않게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연출효과가 흥미롭다. 물감과 붓질로 이루어진 회화가 아닌 오로지 종이가 집적, 배열되거나 그 단면을 예리하게 절삭한 자취, 상처들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화려한 색상과 미묘한 질감으로 촘촘히 물결치고 파동치는 그 모습에서 무척 회화적인 표면을 만나고 있다. 종이들은 마치 유기적인 생명체나 살아 약동하는 존재들로 파득이는가 하면 순간적으로 소비되고 소멸될 운명에 처한 덧없는 인쇄물들이 더없이 매혹적인 존재로 살아나면서 환각적 장면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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