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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철 / ‘별빛’

박영택

이원철은 경주의 능을 찍었다. 무덤을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은 무척 외롭다. 밤의 능은 인공의 조명 속에서 고즈넉하니 신비스럽고 아련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화면에 상대적으로 가득찬 하늘, 부드러운 곡선으로 융기한 무덤, 그 앞에 위치한 나무 한 그루 그리고 하늘의 별빛과 달빛, 무덤의 이곳 저곳에서 정처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어 적시는 인공 조명 등이 어우러져 있다. 간혹 빛은 무덤과 나무에 집중적으로 떨어져 그것 자체가 흡사 발광하듯, 타오르듯 보인다. 조명이 상징적인 의미언어로 작동한다. 그는 빛을 매력적으로 구사하고 그것을 심미적으로 동시에 의미지향적인 것으로 다룬다. 때론 죽음을, 때로는 삶을 비추는 식이다. 하늘은 그 사이에서 생과 사 너머의 세계, 혹은 이승과 저승의 접점 같은 풍경을 망연히 펼쳐보인다. 나무와 능을 가까이 혹은 멀리 밀어 넣으면서 거리를 조절해 단순한 소재를 반복해서 다루며 의미있는 풍성한 서사를 만든다. 거기에 빛, 그러니까 애매하면서 신비스러운 색상과 분위기가 개입된다. 사실 그의 사진은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낮과 밤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시간,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빛으로 충만하다. 분명 밤의 시간대에 찍은 사진이지만 그의 사진은 그 밤을 기이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가 끌어들인 분위기, 느낌과 질감을 거느린 매력적인 색, 빛에 의해서다. 사실 오늘날 밤은 연장된 낮의 시간대다. 밤, 어둠을 삶에서 지워내려는 인간의 간절한 노력은 오늘날 밤을 낮처럼 만들어놓았다. 온갖 조명과 인공광에 의해 밤은 점차 사라진다. 심지어 경주의 능과 같은 곳에도 인공의 조명, ‘야리꾸리’한 색조의 조명이 밤새 발광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적 풍경이면서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기존의 풍경에 대한 관습적 시선을 위반한다.

간결하고 적조하며 섬세한 구성에 힘입은 사진은 무척 아름답다. 형식적으로 단순함과 간결함, 섬세함으로 직조되어 있는 사진에는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나무가 자리한다. 고분은 죽음, 나무는 삶을 상징 할 것이다. 그 역도 가능하다. 죽은 이들은 저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확신 속에 무덤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영생과 불사, 불멸의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죽었을 것이고 그 믿음을 남은 이들이 무덤을 차려 공고히 했을 것이다. 무덤이란 산자와 죽은 이의 공간이 구분되는 일이자 죽음, 죽은 이를 영원히 기억하고 그 존재를 잊지않겠다는 서약 같은 것이다. 사인sign의 어원이 세마sema(묘석)임을 기억해보라. 천년의 고도 경주는 역사의 현장이자 설화가 쌓인 곳으로 무덤과 소나무의 영토이기도 하다. 아니 온갖 석불과 탑의 영토이기도 하다. 경주 자체가 불국토다. 그리곤 죽은 자들의 꿈이 묻혀있는 도시다. 경주 도심에 밀집되어 있는 수 백기의 고분들은 1,500년의 세월동안 자연 그 자체가 되었다. 그 무덤들은 경주를 비로소 경주이게 한다. 드넓은, 더러 아담한 능역에 굽어진 노송들이 세월의 아름다움, 능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옛사람들은 나무를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우주적인 가교로 여겨졌다. 죽은 이의 무덤 주변에 소나무를 심는 이유는 하늘사다리(무덤)와 연관된다. 특히 소나무는 하늘나무다.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솔가지들이 저 세계를 염원한다. 나무는 하늘로 내려오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신화와 삶이 만나는 사다리며 영원한 재생을 실현하는 나무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능선은 탐스럽다. 신기한 설화를 하나씩 간직한 각종 무덤의 도시가 경주다. 신라왕조는 56명의 왕이 법통을 이어받았다. 소담하게 솟은 봉분은 그들을 기억하고 환생하며 각인하는 징표들이다. 알다시피 왕의 무덤은 왕릉이고 주인을 알 수 없지만 큰 무덤은 총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같은 유적지가 관광지가 되면서 상호와 네온이 무분별하게 들어섰고 무덤 주변에도 환하게 조명이 비추고 있다. 잠들지 못하는 무덤들이다. 작가는 순수한 자연과 인공적인 장치가 개입되어 있는 오늘날의 풍경/무덤을 촬영했다. 인공광과 별빛, 즉 자연광이 공존하는 이 무덤풍경은 현실적인 풍경이면서도 어딘지 비현실감이 감돈다. 사실 도시의 밤풍경은 대부분 그런 장면이다. 작가는 오랜 시간 노출을 주어 약간의 흔들림, 이동과 떨림을 보여준다. 자연광과 주변의 다른 인공광들이 뒤섞이면서 빚어내는 기이한 조명, 빛에 매료된다. 그것은 밤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낮과 밤이 다른 세계는 아니지만 그것은 빛의 유무에 따라 무척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밤시간대에 경주의 능을 찾아 그 앞에 카메라를 갖다놓고 일정한 시간동안 대상을 찍은 사진이다. 미묘한 색채들이 가득한 스산한 적막이 감도는 묘한 풍경이 펼쳐지고 부드러운 능의 곡선과 그 앞에 직립한 나무가 대비를 이룬다. 작가는 고분이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나무가 순환하듯 후대로 이어져 영생을, 삶을 얘기하고 있으며 나무 역시 죽음의 순환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한 그루의 나무속에는 매년 죽음과 새 생명의 탄생이 반복한다. 사람의 죽음 또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를 가진 새 생명의 탄생으로 그 세대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이원철이 찍은 경주의 능과 그 밖의 무덤들은 부드러운 능선을 지닌 여성적인 존재다. 고분은 잔디로 덮여있고 헐벗은/잎사귀를 단 나무 몇 그루 서있지만 그 속에 천년의 꿈이 서려있어 풍요롭다. 무덤은 산자와 죽은 자가 교감하는 공간이다. 성과 속이 뒤섞인 공간이다. 고운 잔디와 소나무, 자연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신성함을 강조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무덤은 죽은 이의 유택 幽宅이다.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이 토장(土葬)은 죽음 뒤에도 삶을 연장시키려는 미련과 모든 것을 무화시키려는 자연과의 싸움 속에서 탄생한다. 동양인들은 죽은 이를 삶의 연장으로서 보았다. 죽음과 삶이 하나의 시공영속체로서 융합되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지녔다. 죽음은 단절이 아닌 또 다른 삶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또한 동양인들은 자연을 외경하면서 자연의 기운이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자연과의 조화가 인간의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조선시대 풍수설에 의하면 시체가 지기를 받아 그 남은 음덕이 자손에게 전해진다고 믿었으며 이를 마치 나무뿌리를 잘 간직하면 가지와 꽃과 열매가 무성해진다는 것과 동일시했다. 동아시아에서 자연인식은 자연의 성장과정이 규칙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목이 생장할 때 그 꽃과 잎은 싱싱하고 무성하며 화려한 서체(書體)를 방불케 할 정도로 모두 곡선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로, 때로는 전혀 다른 이종(異種)으로 변신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상이라는 신앙도 그래서 파생되었다. 1) 유학에서의 자연은 농경적인 생명 현상의 시각으로 파악된 자연이다. 농경의 성공은 곧 증산과 번식에 의한 번영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식, 번식, 지배를 통한 생산, 산출과 증산, 번영은 사멸의 공포를 잊게 하고 현세를 살만한 것으로 긍정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생명현상이란 식물과 동물의 자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남과 자람, 종(種)의 번식과 개체의 죽음이라는 과정 모두를 일컫는다. 개체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런 생명현상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종이란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순환과정에 다름아니다. 도덕경과 주역에 ’세상은 늘 변한다. 고정 불변한 것은 없다‘고 한 것은 그들이 늘 보고 살았던 이 땅의 이치를 삶의 이치와 연관시켜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학에서 본 자연의 변화는 단순한 물리. 화학적 변화가 아닌 생성인 것이다. 그래서 리(理)와 의(義)라는 것은 천지를 본뜨고 사시(四時)를 본받으며 음양을 준칙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동양인들은 자연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이를 인생의 지혜를 습득할 교본으로 삼았다. 특히나 변화가 생명을 만드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성들은 변화의 원리를 체득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비결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2) 그들은 이렇듯 생명의 본성, 자연의 이치 및 삶의 이치를 식물성의 세계를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이원철이 사진에는 그만이 빛/색이 들어잇다. 그는 사진이 빛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상식을 좀더 유연하게 넓히는 한편 낯설게 보여준다. 태초에 빛이 있어 사물이 분별되고 본다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빛에 따른 것이다. 빛이 없다면 사물, 세계는 없다. 어두운 밤은 그걸 증명한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태어난 이래, 인간이 빛을 파악한 정도는 인간이 자연세계를 파악하고 육지와 해상에서 활동한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인간의 빛에 대한 공포심과 경외심은 고대이 미신과 종교, 제사, 나아가 예술적인 표현으로 나타났으며, 결국에는 고학적인 호기심으로 발전했다. 사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태동했다.
인공적인 조명이 없던 시절, 빛의 결정은 태양이고 달이자 별들이었다. 어둠에 대항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태양과 달과 별은 비로서 빛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 결정적인 존재다. 태양은 모든 원시종교와 신화의 중심에 자리한다. 고대인들은 태양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면서 종교적 대상으로 삼았다. 태양숭배사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믿음이었다. 태양을 상징하던 동심원의 도상은 곳곳에서 출현하며 그것은 불꽃으로, 화염문양으로 고구려 고분벽화 안을 가득채우고도 있다. 자연광인 태양과 함께 달빛과 별빛도 빛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다. 까만 어둠 저편에 발광하는 하나의 돌(달과 별)은 보는 이의 시선과 심장에 그대로 와 박히면서 가장 장엄한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수시로 변하는 형상과 어둠을 배경으로 환하게 번지는 빛으로 인해 달은 강력한 볼거리가 되어 무한한 상상을 가능하게 했는데 그런 면에서 밤하늘은 최초의 화폭이며 달과 별은 모든 이미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달 표면에 나타난 음영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동시에 온갖 전설과 신화를 창조해냈다. 회화와 문학 또한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어둠을 구원하고 중력에 저당 잡힌 이 현실계 너머를 꿈꾸게 해준 것은 달이었기에 달은 늘 그리움과 몽상, 희망을 비추는 거울처럼 자리했다.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탈중력과 비상에의 욕망을 꿈꾸었다. 별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인들에 의하면 그림의 기원은 땅바닥에 떨어진 사람의 그림자, 그 윤곽을 선으로 둘러친 것이 비로소 그림이 되었다고 한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그림자다. 빛에 의해 비로서 사물이 보이고 그림자가 생기며 이미지도 가능해졌다. 그 빛을 추구하고 빛을 그리는 것이 이후 서양미술의 핵심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빛중심주의, 태양중심주의가 서양미술의 근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진 역시 그 빛의 추구 아래 발명되었다. 반면 동양은 태양에 대한 주술적 외경심은 여전하지만 그림에 있어서는 서양처럼 빛에 대한 강박을 추구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 한 예로 인물산수화나 초상화 등은 그림자가 부재하다. 특정한 시간, 빛에 의해 드러난 순간적인 대상의 모습은 진정한 실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과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색 역시 빛의 소산이다. 색이란 것도 사실 인간의 눈이 수용하는 외부의 자극을 가리키는데 그 실체 역시 당연히 빛이다. 빛은 태양의 광선, 곧 빛의 파장이며 우리들의 눈은 제한된 범위내의 빛(파장)만을 보고 있는데 이것이 서로 다른 색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 미세한 차이에 의해 서로 다르게 지각되는 이 어마어마한 색채의 세계를 지시할 언어, 문자를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은 그저 막연한 감으로만 대충 느낄 뿐이다. 그 색의 현란한 파노라마 앞에 문자는 절망한다. 그래서 색/빛은 더없이 심리적이고 정신적이다. 빛이 신성과 동일시되고 신의 현시를 상징하는 매개로 이해되는가 하면 늘상 그 빛을 우상과 동일시하는 관습은 뿌리깊다. 빛은 사물의 존재와 형태에 대해서 가르쳐준다. 빛은 친절한 손놀림으로 사물의 윤곽과 색채와 피부의 질감, 속성들을 은밀히 지시한다. 미술작품에서 빛은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통일감과 질서를 부여하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명암대비를 낳는다. 결국 빛이 미치는 범위가 사물이 보이는 범위가 된다. 그리고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런가하면 빛은 사물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회화적 표현에서 빛은 상징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상징성은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르다. 빛과 색채는 그래서 문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정신적이다. 빛은 어쨌든 모든 이에게 축복같은 것이고 해서 그 빛을 동경하고 추구하기도 하고 일상생활의 측면에서 보아도 빛이 없으면 삶이 불가능하겠지만 특히나 미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각별히 빛/색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되어져,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부서지는 색채의 가루로 소멸하기도 하고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자연의 실체다. 수시로 자연은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자연은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역사가 자연에 내장되어 있다.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 사이를 오가며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 것으로서 뒤척이는 자연의 몸, 빛에 의해 수시로 몸을 돌변하는 자연, 대상을 포착하려는 것이 모든 시각이미지를 다루는 이들의 부질없는 욕망이었다.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빛을 잡아 놓는다. 그것이 그림이고 사진이며 영상작업과 다양한 재료를 동반해 빛을 다루는 작업들이다. 이원철 역시 자신만의 빛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 빛은 자연과 인공이 뒤섞인, 그것들끼리 자아내는 기이한 혼합과 겹침 아래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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