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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환 / 정신의 여정, 정보의 시뮬레이션

박영택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화실 한 켠에 놓인 제도책상 같은 곳에 앉아있다. 구두수선공이나 활판인쇄공, 목도장 파는 이처럼 아주 작은 공간에 앉아 등이 굽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린다. 책들의 행간과 행간, 말과 문자 사이에서 소리와 공간과 형상을 떠올리고 이내 그것을 마치 양피지에 신의 음성을 공들여 필사하던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종이 위에 빼곡히, 집요하고 탐닉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는 하루 동안 자신이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한 것들을 긴 두루마리 용지의 일부를 조금씩 밀어나가면서 ‘새까맣게’ 만든다. 0.3mm의 가는 펜으로 하루 동안 그가 채우는 면적은 약10cm×40cm의 공간이다. 그러니까 그 공간에 그려진 흔적은 그가 보낸 하루치의 삶의 기록인 셈이고 그의 영감이 육화되어 내려앉은 곳이다. 가는 펜과 작은 손이 함께 한 시간의 누적이기도 하다. 주어진 화면을 몇 개의 층으로 분할해 음과 양,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너무 큰 것과 너무 작은 것, 밝음과 어두움, 질서와 카오스 등을 상징했는데 흡사 그것은 어둡고 깊은 숲처럼 다가온다. 숲/어둠에서 선들이 빠져나와 이런저런 이미지를 안개처럼 피워낸다. 그 이미지의 근원은 그가 읽어나간 모든 책들이며 또한 작업실 환경에서 영감을 받는 한편 ‘전파, 인공영상, 진동, 레이저, 시뮬레이션, 고대문화, 언어, 미생물, 상대성, 소리, 수학과 기하학, 이동수단, 조직’ 등에서도 작업의 모티브를 제공받는다고 한다.

책에서 눈을 떼고 그리던 손이 잠시 멈추면 문득 창 밖으로 하늘이 보이고 바닥에는 여러 종류의 식물을 키우는 ‘잡초정원’ 이 있어 그 안에 살고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생태를 관찰하게 된다. 음악소리,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작은 정원안의 바글거리는 생명의 수런거림을 듣는다. 그는 자연을 그런 식으로 자기 신체에 연결시켜놓았다. 그것들은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 시간 안에 있다. 책과 자연, 자신의 몸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놓았다. 스스로 자신을 위리안치 하고 그 같은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에게 작업실은 세상의 변방이자 스스로 유폐시킨 감옥이다. 그는 매일 작업실로 유배된다. 동시에 작업실은 세상의 지식을 탐닉하는 곳이자 정신과 마음을 수양하는 선방이며 하루치의 삶을 수행하고 기록하는 곳인 동시에 자신의 관심과 사유를 배출해내는 곳이다. 받아들이고 배출하고 들이키고 쏟아내는 곳이다.

그는 매일 일용할 양식처럼 책을 읽고 주변의 자연, 생태계를 본다. 그로인해 부풀어 오르는 온갖 생각과 상상을, 환시와 환청과 환상을 종이 위에 기록한다. ‘전 우주가 돌아가는 참 이치’(책, 말씀)를 깨닫고 이를 내재화해서 그것들이 머리와 가슴에 흘러넘쳐 온갖 자극으로 파득거리고 뒤척이면서 연쇄적인 반응을 할 때, 그것들을 가지고 일종의 ‘시뮬레이션’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그림이다. 따라서 그의 기이하고 혼돈스러워 보이고 중심도 주변도 없이,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저 흐르고 겹치면서 온갖 상상을 자극하게 해주는 그림은 그가 접한 지식, 받아들인 세상의 온갖 데이터, “머리 머릿속에 잔뜩 껴있는 그 데이터를 빼내는” 일이자 이를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거의 무위에 가까운 상태에서 그려낸, 써나간 자취는 보는 이의 추억, 상상에 따라 자유롭게 읽혀진다. 그림은 무엇을 지시하거나 강변하지 않고 따라서 목적적이지 않다. 검은 색 얇은 펜이 섬세하고 집요하게 종이의 표면을 잠식하고 있는 형국이다. 까만 흔적이 감각적으로 유영한다. 단일한 펜, 색에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그것은 이미지 이전에 색상과 감촉과 질감으로 전이된다. 화면은 캄캄하고 혼돈스러운 공간, 면에서 조심스레 실타래 같은 선들이 빠져나오고 그것들이 ‘그 무엇’ 같은 형상을 암시하다 사라지고 지시하는 것 같다가 이내 다른 존재로 돌변하고 기생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파편적이고 분열되어 보이는 낱낱의 장면은 어느덧 또 다른 존재로 연결되고 이내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다시 다른 몸으로 이전된다. 지상의 모든 문양과 도상이 다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생명체를 연상하는 유기적 선들의 지속이 있고 나아가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이미지의 여러 변주가 죄다 감행된다는 느낌이다. 비교적 구체적이고 인지 가능한 형상에 기생하는 환각적인 장면의 연출과 연계는 기이한 상황으로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끌고 간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초현실적인 장면들은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고 이원적인 공간이 아니라 통합적 공간이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공존하고 구체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가 마구 뒤섞여있기도 하다. 상이한 것들끼리 만나서 또 다른 장면을 만들고 다시 어디론가 이동하는 이 장면은 흡사 정처없는 생을 보내는 인간의 운명, 화가의 생을 은유하는 듯도 하다.

이 드로잉은 문학적 감성과 상상력, 작가의 환시와 환청에 기인한다. 그는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세계, 귀를 닫아도 들리는 세계’를 그린다고 한다. 그래서 화면에는 침묵으로 절여진 어두운 공간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다. 그로부터 다시 무엇인가가 출현한다. 그것은 목적없는 충족적인 선의 유희 같다가도 모종의 이미지를 만들다가 지우고 다시 어떤 것을 연상시키다가 이내 스러진다. 그것은 완결되어 있거나 독립적이라기보다는 미완의 상황성이고 비결정성이자 여전히 생성중인 순간을 안긴다. 손이 가는대로 그려놓은 하나의 흔적으로부터 발생하는 예기치 않는 사건들이 연속되고 증식된다. 흡사 생명체의 번식과 새로운 변종들이 파생되어 나가는 형국과도 유사하다. 한 눈에 명료하게 다가오기 보다는 가까이 혹은 멀리, 부분적으로 뜯어먹는 시선에 의해 다가오는 이상한 생명체, 미지의 존재, 우리 눈이 판독하기 어려운 미시적인 또는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가득 그려져 있다. 그것은 또한 거대한 ‘이야기’그림을 연상시킨다. 문자가 없는 시대에 그림으로, 선으로만 채워진, 정확한 판독이 불가능한 그런 상형문자로 채워진 이야기그림이다. 그 안에는 무궁무진한 서사가 그려/쓰여있다. 이 서사는 두루마리에 펼쳐진 끝날 수 없고 끝을 알 수 없는, 다만 작가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만 지속될 그런 그림이다. 그것은 오팔카의 ‘숫자쓰기’처럼 다분히 실존적인 뉘앙스도 지닌다. 그래서 그림이기 이전에 작가의 몸과 정신, 의식/무의식의 흐름이자 이동, 시간, 노동의 흔적들로 다가온다. 무모한 노동을 탐미하듯, 그리기와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기꺼이 그것과 함께 소진되어 나가는 여정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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