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연히 작가는 재활용으로 내놓은 종이박스를 보았다. 안에 담긴 것이 다 써버리면 박스는 버려지고 해체된다. 우리네 삶도 소모되고 탕진되는 순간 소멸되어야 한다. 그 박스는 작가에게 인생과 삶의 상징으로 다가온 것이다. 작가는 버려진 박스를 다른 차원에서 재활용한다. 그렇다고 박스를 오브제 삼아 다룬다기 보다는 자신의 미술의 본령인 모더니즘 미술관에 입각해 사각형의 꼴, 그리드의 다양한 변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추상적 형식 속에 삶의 서사를 담아놓는다. 마치 종이 박스를 펼쳐놓은 전개도처럼 그려놓았다. 어린 시절 공작시간에 골판지나 마분지를 갖고 상자를 만들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혹은 스테인레스를 이용해 입체로 만들었다. 직립하고 율동하는 포즈를 취한 조각은 마치 사피로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온갖 박스를 해체해서 평면으로 펼쳐놓은 다양한 형국이 평면 위에 색면과 선으로 감각적으로 장식적으로 나앉았다.
버려지고 이내 폐지로 혹은 물에 젖어 불어 터지거나 사라질 그런 운명의 박스를 발랄하게 환생시켰다. 박스들은 춤을 춘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색종이 작업처럼 경쾌하고 율동적이다. 여전히 색채의 감각적 조율과 배치가 돋보인다. 또한 엇비슷한 것들 안에 깃든 미묘한 차이를 즐기게 한다. 반투명한 플랙시글라스 위에 앞뒤로 칠해진 색 면, 이후 아크릴박스로 마감된 화면은 각기 다른 양의 빛을 흡수하고 머금게 됨으로서 착시적인 형상의 여러 겹, 레이어를 보여준다. 몇 겹으로 드러나는 색채/색 면(빛)은 기이한 공간감을 준다. 짙은 색상과 흐릿하고 엷은 색상의 차이가 환영을 야기하고 깊이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창호 문으로 내다보는 세계, 그 종이를 투과해 번져 나오는 미묘한 빛들의 산란을 경험시킨다. 안과 밖이 구분없이 하나로 다가오고 물러나고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반투명으로 인한 촉각성이나 또 다른 감각의 지각화를 유도한다. 그 위에 날카롭고 예민한 선이 지나간다. 이 라인테이프가 만든 선은 기하학적인, 기계적인 드로잉이자 요철로 올라온 저부조의 입체감을 은연중 부여한다. 그것은 납작한 색 면에 경계를 만들고 시계를 형성하면서 보는 이들에게 어떤 균형적인 형상을 감각하게 해준다. 최근 이 플라스틱재료가 캔버스 천을 대신하고 있음도 흔히 목도된다. 평면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여러 겹의 표면을 환영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인공적인 화면이 그것이다. 동시에 모더니즘의 그리드를 유지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차원으로 확장, 변주하는 것도 최근 자주 접하는 작업들이다. 김봉태의 근작은 이전 작업과의 연관성을 지니며 심화, 확장되는 것이자 그것이 무난하고 장식적인 그리드와 사각형의 변주로 연출되면서 익숙한 해결책으로 기운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