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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 미술의 모험 - 모순과 역설의 유희-2

김영호

V.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현상에 나타나는 오브제에 대한 관심은 추상미술과 누보레알리즘 사이의 조형적 연관성 속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새로운 모험을 전개하던 작가들의 태도는 대부분이 당대의 회화적 전통을 승계했던 추상표현주의 미술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브제를 둘러싼 제 경향들은 다다운동의 역사적 사례들, 예를 들면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접근하려고 하는 이 현상에 대한 정의는 이전 세대에 비해 보다 복잡한 해석이 요구되고 있다. 데콜라쥬 작가들이나 오브제를 둘러싼 1950년대의 또 다른 작가들의 예술적 수단들은 과거 선각자들과 비교했을 때 혼동되지 않는 그들만의 특수성들을 확보하고 있다. 포스터를 생경하게 작품으로 제시하는 일련의 작가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거기에는 무의식이라든가 무관심성 등의 개념이나 좋고 나쁨의 인식에서 떠난 상태에서 선택했다는 식의 주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그러한 난해성을 이해해 주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카드린느 다비드(Cathrine David)가 지적한 것처럼 레이몽 앵즈(Raymond Hains)는 뒤샹의 그늘에 의해 자신의 오브제 작업이 축소되거나 왜곡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희생자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덫은 이브 클랭(Yves Klein)의 모노크롬 작품 위에도 놓여 있었다. 20) 
사실 1950년대의 오브제 미술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색다른 유형 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예로 우리는 레이몽 앵즈(도5)와 이브 클랭(도6)을 들 수 있는데 전자는 사회학적 근거 위에 오브제를 대입 시켜 후에 태어날 누보레알리즘과 함께 강력한 힘을 과시하였으며, 후자는 시적(詩的) 상상력과 그를 통한 상징의 세계로 오브제를 이끌면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운동의 태동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브 클랭은 불, 물, 공기, 흙 등 자연의 기본 요인들에서 영감을 받고 그것들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했으며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그의 심리학 저서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한 이론적 근거들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브 클랭은 평면작업 뿐만 아니라 설치나 퍼포먼스를 통해 이러한 신비주의적 집중을 실천하였다. 21)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오브제의 두 유형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들은 1950년대의 정신적 탐구는 예술의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브제에 대한 해석이 객관적이든 아니면 주관적이든 또는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간에 그것을 둘러싼 인식의 가능성은 실증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면 모두에 걸쳐 가능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50년대의 10년 동안에 진행되었던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은 1960년대로 이어지면서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러한 미학적 관찰은 '현실의 단편들을 자료화한다'는 논지 속에 작품을 실행하였던 일련의 포스터 화가(affichistes)들의 작품에 적용시킬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레이몽 앵즈와 쟈크 드 라 빌르글레(Jacques de la Villegle)는 1949년부터 찢긴 포스터들을 수집하였다.(도7) 또 다른 포스터 화가인 미모 로텔라(Mimo Rotella)는 프랑스의 동료들의 작업과는 무관하게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는 특히 영화포스터의 수집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도8) 한편, 프랑스와 뒤프렌(Francois Dufrene)은 1957년 앵즈와 빌르글레를 알게 되면서 이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작가이며 그는 겹쳐진 포스터의 표면을 긁어냄으로서 종이의 순수한 질료감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도9) 우리는 상기한 네 명의 포스터 작가들의 작업에서 하나의 조형적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돌발적인 포스터 뜯어내기로 결과된 작품이 당시의 화단을 압도하던 서정적 경향의 추상미술과 동일한 논리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포스터 작가들의 오브제는 이전의 콜라쥬 작업과 연계성을 보이기도 했다는 점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들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포스터 작가들에 있어 작품의 리얼리티는 이미 도시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익명의 손길에 의해 찢겨진 포스터들을 벽면 위에서부터 들어내는 일을 담당할 뿐이었다. 우리는 이 행위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선 광고이미지나 익명의 손길에 의해 찢겨진 형태에서 드러나는 객관적 의미가 그것이고, 두 번째는 오브제의 본래적 기능을 변질시키는 태도와 관련된 주관적 의미를 들 수 있다. 만일 작가가 제시한 포스터가 본래의 의미들을 변질시키고 다른 것으로 전치되고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띁어내기’와 ‘다시 붙이기’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데콜라쥬를 둘러싼 기본적인 문제들과의 대면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의미의 변화를 야기하는 작가의 행위는 오브제의 ‘선택’과 ‘장소의 전치’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포스터 화가들의 목적은 우리가 평상시에는 인식할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작업은 하나의 오브제를 예술적 오브제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관객들로 하여금 일상적 삶의 리얼리티를 제시하는 행위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르셀 뒤샹적 개념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며 그것은 또한 이후에 이어지는 오브제미술의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논리가 되고 있기도 하다. 
예술창조의 영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는 달리 상기한 네 명의 포스터 작가들은 초기의 작업시기에서부터 표면의 회화적 요인들과 작품의 질료사용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포스터를 다루는 그들의 방식은 시각적 모험을 확산시키는 방향에서 엄격한 체계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레이몽 앵즈가 자크 드 라 빌르글레와 합께 최초의 포스터 찟기 작업을 시도했을 때, 그는 사진 22) , 영화23) 그리고 언어 등의 다양한 영역 안에서 복합적인 실험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브 클랭의 경우 그의 오브제 사용은 그의 화력 전체에 필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역시 개인주의(individualisme)에 관계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말 그대로 그의 모노크롬 연작이나 유명한 개인전 ‘공(空)(Le Vide)’에서 어떠한 오브제 개념도 찾아 볼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오브제를 규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의 경험에 적용된 시각적 태도를 감각적인 상태에서 재고해 본다면 그의 작업들은 ‘타블로-오브제’나 ‘모든 오브제들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존재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오브제들의 비물질화라는 절대적 경험 속에서 바라보기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는 셈이다. 결국 이브 클랭은 캔버스의 표면을 지워 내거나 전시장 공간을 비워냄으로써 또 다른 차원의 실재(le reel)를 취하려 하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브 클랭은 그의 첫 번째 모노크롬 작품들을 1949년 11월에 런던에서 제작하였다. 이는 앵즈가 파리에서 그의 첫 번째 찢긴 포스터 떼어내기 작업을 실행한 때와 시기가 거의 일치된다. 클랭은 1955년에서 1956년 사이에는 각각 다른 색채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으나 1957년 부터는 오직 푸른색만을 사용하고 있다. 지지체로서는 캔버스와 자연 오브제로써 해면(海綿)을 주로 한 그의 작품은 후에 International Klein Blue 또는 IKB라는 특별한 칭호가 붙게된다.(도10) 이브 클랭의 타블로-오브제나 조각-오브제는 다소간의 가시적인 요소들이 순수한 정신적 리얼리티로 변주를 시도하고 있다. “뜯겨진 포스터들이 또 다른 세계를 떠오르게 하는 것처럼 모노크롬도 무한한 감성의 세계를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24) 그의 타블로-오브제는 깊은 이상주의를 반영하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제시한다.
이브 클랭은 1960년에 사샤 소노브스키(Sacha Sosnowsky)가 주도한 논쟁에서 자신의 작품들은 누보레알리즘이 명시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적 접근들”(nouvelles approches perceptives du reel)에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견해는 이미 사회적 리얼리티를 벗어나 전개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형이상학적인 필연성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의식이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회합에서 또한 “우리는 도시자연에서뿐만이 아니라 대자연 앞에서 복합적인 극기를 찾으려 한다.”라고 발언함으로써 25) 어쩌면 누보레알리즘의 강령을 벗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한편, 그가 유도를 배우기 위해 체류했던 일본에서의 경험은 그의 정신을 탐색하려는 그의 모험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를 통해 그는 예술의 새로운 축을 발견하게 되었다. 26) 
우리는 이브 클랭의 타블로-오브제를 르네 마그리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다. 만일 마그리트의 파이프가 타블로의 물질성을 드러낸다면 클랭의 모노크롬 회화에 대한 시각적 반응은 타블로의 비물질성을 야기 시킨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브 클랭의 경우 회화의 가치는 하나의 오브제로서 타블로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이 오브제를 결정하는 현상들의 끝없는 확장속에 있다.
1958년, 이리스 클레르(Iris Clert) 화랑에서 가진 전시회 공(空, Le Vide)은 모든 물질적 오브제의 부재를 표현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화랑의 전시장에서 오브제들은 허공속에 자취를 감춘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이미 ‘비물질의 회화적 감성’ 또는 ‘오브제의 비물질화’에 대한 영역 속에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예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 작업은 오브제가 확정된 대상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거나 제조과정의 흔적들을 담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27) 
이브 클랭은 로울러를 이용하여 안료채색을 하며, 생경한 물질들(상자, 나무가지, 철사) 혹은 오브제들(병풍, 해면, 지구본 등등)(도11)을 사용하였고 한편 그는 그의 작업을 위해 비(雨나 바람(風) 그리고 불(火)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클랭의 개성은 도전적이며 유혹하는 힘(la seduction)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회화의 관례적 전통과 그것의 물질성에 대한 물음을 제시했던 일련의 작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예를 들면,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at) 같은 이는 자신의 캔버스를 햇빛에 노출시키거나 비속에 놓아두거나 혹은 땅속에 묻어두는 행위를 통해서 그것의 흔적을 화면에 남기는 작업을 했다. 클랭의 모험은 이렇듯 후배작가들에게 예술의 해방 위에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의식들을 직면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모든 종류의 오브제들과 잡다한 물질들을 자연적 요소들과 접속시키고 있는 것이라 해석된다. 그의 연구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의 원리들에 대한 관심이며 이러한 노력은 1960년대 후반의 다양한 전위적 운동인 아르테 포베라를 위시하여 개념미술, 대지미술, 신체예술 등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미술의 환영주의를 부정하며 전개되던 모더니즘 회화는 1950년대에 전개된 오브제 미술과 함께 완결되었으며 거기에서 이룩된 성과가 ‘실제의 점유’였다. 도미니크 보죠(Dominique Bozo)가 지적한 것처럼 이브 클랭은 전후 유럽의 예술에 상징적인 출구였으며 무(Neant)의 개념을 정립하였고 그를 통해 모든 것에 대한 재발견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제기한 인물이었다. 28) 

오브제를 둘러싼 새로운 감성의 선언적 창시는 파리와 뉴욕에서 동시에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1959년 청년작가들을 대상으로 개최된 국제 규모의 비엔날레의 창설은 당대의 전위적 성향을 발굴하는 주요 창구가 되었다. 예술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데 공헌한 이 파리비엔날레는 40개국에서 35세 이하의 작가들이 초대되었는데 참여작가들 중에는 레이몽 앵즈는 앞서 말한 ‘예약된 장소들의 울타리’(La Palissade des emplacememts reserves)‘을 출품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미국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도 선보였다. 스위스 출신인 쟝 팅겔리는 그의 그림그리는 기계인 ‘메타-마틱 17(Meta-Matic 17)’(도12)을 설치해 추상표현주의에 젖어 있던 당시의 미학에 도전하였다. 그들 모두는 표현형식의 커다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에 오브제 도입을 역사적 문맥에서 재론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전시회의 대표위원이었던 비평가 레이몽 코네(Raymond Cognait)는 전시도록을 통해 자신들이 본 전시회에 실험적 작품들을 한데 모은 것은 하나의 또 다른 미학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세계의 얼굴을 준비하거나 가능하다면 그것을 간파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 니스출신의 아르망(Arman)은 그의 <스템프(Cachets)>(도13) 연작 시기를 지나 <오브제의 거동(Allures dobjet)> 연작을 제작하고 있었다. 밀짚모자를 물감에 적신 뒤 캔버스 위에 바르거나 긋는 작업이었다. 1958년에는 구겨진 스펀지나 피스톤, 용수철, 체인, 상자 등의 개별적 오브제들을 사용하여 그것들의 흔적을 화면 위에 남긴다. 화폭의 표면에 골고루 오브제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그는 캔버스 천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 주위를 돌면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잭슨 폴록에서 시작된 이러한 방식은 아르망에게 회화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공하였다. 오브제의 윤곽이나 덩어리를 찍어내는 방식은 작가에게 실재 오브제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인식방법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결국 1960년에 이르러서 이러한 제각기의 경향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누보레알리즘이 1950년대의 새로운 예술적 접근방식들을 집결하며 하나의 집단적인 운동으로서 탄생된 것이다. 또한 1961년에 뉴욕근대미술관에서는 ‘아쌍블라지 미술(The art of Assemblage)’전이 개최되고 이듬해에는 뉴욕의 대표적인 화랑이었던 시드니 제니스(Sideny Janis)에서는 ‘뉴 리얼리스트(The New Realists’전이 열려 1960년대 초기의 새로운 감각을 검증하기에 이른다. 특히 아쌍블라지전에는 입체주의에서 당대까지 20세기 전체에 걸쳐 나타났던 오브제 미술의 다양한 경향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하였다.

오브제 미술의 모험에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 비평가의 역할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 피에르 레스타니는 오브제의 모험에 참가한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작업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누보레알리즘은 “오브제가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었다. 29) 자신의 이론을 확립하기 위해 피에르 레스타니는 우선 다섯 작가들의 이벤트를 참고했는데 팅겔리, 앵즈, 아르망, 세자르(도14) 그리고 이브 클랭이 그들이었다. 30) 그는 이들의 작업을 통해 위에 언급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적 접근” 또는 “세계를 바라보는 사회학적 시각”이라는 공통분모를 도출하게 된다. 1960년 4월에 밀라노에서 첫 번째 그룹전을 개최하면서 레스타니는 처음으로 누보레알리즘이라는 용어를 서문에서 사용하였으며 공식적인 그룹의 탄생은 동년 10월 27일에 이브 클랭의 자택에서 선언문에 작가들이 서명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961년 5월에는 파리의 J 화랑에서 ‘다다를 넘어선 40도(40 degres au-dessus de dada)’를 개최하였고 그 다음달에는 리브 드롸트(Rive Droite) 화랑에서 ‘허구를 넘어선 현실’라는 제목과 ‘파리와 뉴욕의 누보레알리즘’이라는 부제로 그룹전을 가져 프랑스의 누보레알리스트 들과 미국이 네오다다이스트들의 작품을 대질시키게 된다. 31) 전시 도록을 통해 피에르 레스타니는 “작금에 유럽과 미국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의미이며, 우리들의 자연이란 현대적, 산업적, 기계적, 광고적 자연이다.” 누보레알리스트들은 도심이나 고철 적재소 또는 포스터 등 우리에게 친숙해져 버린 환경 속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각자가 지닌 독자적인 예술관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지니고 있었다. 미쉘 지루(Michel Giroud)가 지적한 것처럼 이미 누보레알리즘이 지나치게 하나의 미학으로 오브제 작업들을 제한하고 있었으며 32) 팝아트와의 연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클랭의 이상주의나 또는 앵즈, 팅겔리 그리고 그밖의 누보레알리스트들의 작업을 둘러싼 자유로운 의미들을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해 선언된 원리들 속에 가두어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해서 다루어진 모든 오브제들은 제2차 산업혁명 이후 전개되는 소비산업사회의 문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집단적 운동을 전개했던 그룹으로서의 누보레알리즘은 3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1963년 모든 회원들이 참가한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그룹은 자신의 독창성을 찾아 나섰다. 누보레알리즘은 이렇듯 자신이 거느리던 반항아들의 개성주의에 의해서 해체되었다.
우리는 자주 프랑스의 누보레알리즘이 동시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팝아트와 어떤 미학적 차이점이 있는지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1962년 뉴욕의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개최되었던 “뉴 리얼리스트”전을 계기로 피에르 레스타니는 미국작가들과 유럽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 전시회는 누보레알리즘이 미국의 팝아트 운동 안으로 흡수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60년과 1965년 사이에 많은 작가들이 미국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들은 미국의 대중문화에 빠른 속도로 동화되었고 몇몇 작가들은 이 새로운 예술적 환경으로 영원히 활동무대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만일 누보레알리스트들의 공통적 언어가 미국의 팝아트 작가들의 그것과 다른 점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대중문화와 폐품, 테크놀로지, 대중전달매체 그리고 광고 등의 현실에 동화되는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오브제를 대하는 인식태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3) 
196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대상을 받는 일종의 ‘충격적 사건’ 이후에 오브제를 둘러싼 예술적 전개는 파라독살한 양태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위적 미술을 국제무대에서 공인한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실험적 미술에 대한 무능력과 공공기구가 실행하는 문화정책의 실패 그리고 비활성적인 미술시장 등을 지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재 1960년대의 파리화단은 현대미술에 대한 화상들과 비평가, 미술관 그리고 컬렉션의 차원에서 미천했다. 34)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과 미국을 왕래하며 작품활동을 벌이던 누보레알리스트들은 점차 전위미술에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새로운 환경을 찾아 안착하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누보레알리즘의 단명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유일한 미학적 근거로 작가들의 다양성을 축소시켜 비평했던 것이 그것이고, 소비와 폐품 그리고 광고 등에 기초한 도시의 사회학적 리얼리티에 대한 지나친 찬사가 그것이었다(제라 가시오 탈라보). 또한 다양한 해석의 부재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를 보장하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가치들을 제거하였다(다니엘 아바디, 파트릭 델름(Patric dElme)는 것도 누보레알리즘이 가진 문제점이었다. 35) 





VI. 맺는 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브제 미술은 20세기의 예술창조 영역에서 가장 주목할 현상 중의 하나로 대두되었다. 이 경향은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하나의 위기의식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브제 미술은 전통적 미학가치와 단절의 개념을 취하고 있지만 그 가치 자체는 역사적 문맥으로부터 분리되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분명한 것은 가치는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단절의 사상은 예술과 삶의 관계성을 둘러싼 의식세계를 연구하는 심리학이나 또는 현대사회학이 내세우는 문제의식과 관련된 인위적인 놀이와 같다고 여길 수 있다. 우리는 결국 단절과 가치라는 두 개의 비평적 잣대를 가지고 오브제 미술의 미학적 담론에 접근할 수 밖에 없다. 
1960년대 오브제 미술의 실험은 이와 같이 예술적 가치 규정의 변화 속에서 전개되었다. 대량생산과 소비 그리고 테크놀러지로 이름지어진 사회구조의 변화 앞에서 예술가치의 체계는 하나의 순수 조형적 분석에 의해 다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몇몇의 비평가와 예술가들은 당대의 문화적 상황을 대변할 초 회화적 표준의 부재와, 그에 따른 역설적 결과로서 모든 가능한 담론이 가능한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예술적 가치는 한편으로 문화적 변동에 의해 결정되었고 오브제의 출현은 그 가치를 사방에 퍼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대의 다양한 학문으로서 철학, 문학, 심리학, 사회학은 예술창조 활동에 자극을 주었다. 이제 전통적인 가치는 변화되기 시작했다. 단절의 원리는 창조의 척도가 되었고 그것은 가치의 영역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1960년대의 몇몇 실험적 작가들은 이 미학적 단절의 원리를 자신들의 작품제작을 위한 최상의 원리로 채택했다. 그들은 허상적 공간을 파괴하고 화면에 오브제를 끌어들임으로써 가장 평범한 일상의 리얼리티를 인식할 수 있었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후계자가 되기를 스스로 원했다. 또한 그들은 오브제의 미학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 사이의 혼란을 야기했던 마르셀 뒤샹의 도발적 의식을 추종했다. 20세기 초반의 전위 미술가들의 영향은 예술과 반예술 사이의 딜레마로 귀착되었으나 1960년대의 예술가들은 이 단절의 원리에 새로운 가치를 매김으로써 그 의미를 긍정적으로 회복시켰다. 

오브제의 모험이라는 일련의 현상 속에서 1960년대를 주도했던 다양한 작가들의 예술관에는 공통적인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작업은 저마다 고유한 가치체계의 원리들을 지니고 있다. 1960년대에 생산된 다양한 오브제 작업들을 분석하면서 명확하게 해두어야 할 대목은 이들 경향에 나타나는 시대적 동시성(la simultaneite)과 미학적 이질성(lhetrogeneite)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작품 각각은 시대와 화단에 반응하여 집단적 움직임을 보이지만 저마다의 차별적 의미와 가치들을 드러내며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 미술의 역사 속에서 시대가 만들어내는 특수한 결실로 보여질 것이며 역설적이기도 한 그 결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오브제 미술의 특성 중의 하나는 현대의 조형예술 분야의 궤적과 연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작품의 조형적 요인으로서 형과 색 그리고 구도 등에 대한 연구와 관련이 별로 없다. 그것은 차라리 예술의 궤도 밖의 문제를 읽어내는 일이다. 따라서 오브제 미술의 발자취는 규정하기 힘든 역사적의 진보 원리 속에서 다루어지는 하나의 문화적 주제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둘째, 오브제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것은 미학적 단절의 원리이다. 이는 결국 오브제 미술 비평을 위한 중심적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미술사의 전개양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따지고 보면 이 단절현상은 오브제 뿐만 아니라 예술 자신의 속성이라 보는 것이 옳다. 미술사가인 마크 르 보(Marc Le Bot)가 지적한 것처럼 예술은 언제나 혼돈의 씨앗이며 항상 사회적으로 확정된 가치들을 그때그때 부정하기 때문이다. 36) 그러나 단절의 원리 속에서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던 모더니즘의 개념과는 달리 1960년대의 미술에 대한 비평은 사회적 양식들을 형성하는 요인처럼 단절 그 자체를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만일 모더니즘 미술이 가치들의 충돌과 관련된 상대적 자각이었다면 현대미술은 그와는 반대로 가치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었다. 37) ‘위기 혹은 위기상황에 대한 가치부여’가 결국 우리가 오브제미술의 모험에서 확인하게된 하나의 결론이다. 
세째, 만일 1960년대에 유럽과 미국 화단의 일각을 휩쓸었던 오브제 미술의 발자취를 하나의 기준점 위에 모은다면 그것은 다양한 표현들 안에 담겨 있는 ‘현실에 대한 열광(livresse du reel)’이라는 주제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피에르 레스타니가 내세운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플럭서스, 그리고 아르테 포베라 등의 운동은 도시 또는 자연 이라는 우리의 주변환경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미술운동이라 할 것이다.
네째, 오브제 미술의 의미는 스스로 증식하지 않고 동시대의 다양한 학문적 연구의 성과와 연계하며 다양하게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오브제 미술의 의미는 작품과 작가 그리고 관객 사이에 근본적인 상호작용과 마찬가지로 예술창조의 평가의 기초로 작용한다. 1960년대의 다이나믹한 상호작용은 그 숫자와 복수성에 의해 전래의 유일한 관념체계를 대신한다. 다양한 오브제들과 다양한 예술관념 그리고 예술가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1960년대 문화를 장악했던 인문과학들로 무장된 ‘사물들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사물의 가르침은 역으로 동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잣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세기 후반을 결정짓는 예술창조의 한 흐름은 모더니즘에 대한 부정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우는 총체적 이념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38) 이러한 논의들은 자체가 드러내는 한계나 어떤 불명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전통적인 예술경향과 다양한 테크닉들을 통합한 새로운 예술환경으로 안내하고 있다.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는 이러한 절충주의를 가리켜 일반적 현대문화의 제로단계(degre zero)라 부른다. 우리가 거기에서 다양성을 분별해 내고 잡탕주의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예술적 모험들을 총괄하는 하나의 합일점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오브제 미술의 모험에 대한 연구는 근대의 전통과 모순으로 무장된 개혁 사이를 가르는 첫 번째 마디 위에 서 있는 미술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 논문은 중앙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한 것임







1) 1990년을 전후한 당시의 대표적인 미술관 전시회와 학술지의 특집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프랑스국립근대미술관 : “장 팅겔리”(1987), “다니엘 스포에리”(1990), “레이몽 앵즈”(1990), “앤디 워홀”(1990), “예술과 광고”(1990-1991), “베르트랑 라비에”(1991), “장-뤽 빌무스' (1991), ”마니페스트“(1992)
- 파리시립근대미술관 : “백남준”(1989), “개념미술에 대한 하나의 관점”(1989-1990), “피에로 만초니”(1991), “피노 파스칼리”(1991)
- 프랑스국립갤러리 쥬드 폼므 : “마르셀 브로타에스”(1991-1992), “마샬 레이스” (1992-1993), “타키스”(1993)
- 님므 미술관 : “20세기미술 속의 오브제”(1993), 
- 보르도 현대미술관 : “장-피에르 레이노”(1993)
- 미술전문지 에스프리(Esprit) : “현대미술의 위기: 오늘의 미학적 판정의 척도는 무엇인가?, 레디메이드를 시작으로”(1992년 2월 발행 179호와 1992년 10월 발행 185호)

2) Antoine Compagnom, Les cinq paradoxes de la modernite, Paris, Seul, 1990.

3) Jean Baudrillard, La societe de consommation, Paris, Denoel, 1970.

4)‘오브제의 개념과 유형’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할 것 ; 김영호, “오브제의 기호학적 해석-마르셀 브로타에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14집, 2000년 하반기, pp69-89.

5) 대부분의 사전에서 오브제는 1.사물 2.주제(sujet) 3.목적 등의 다중적 의미를 지닌 단어로 설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병이나 찻잔처럼 “눈앞에 제시된 것” 뿐만 아니라 사랑이나 행복처럼 특정한 주제에 관해서 “생각되어진 것”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6) Roland Barthe, 'Le monde-objet', in Essais critiques, Paris, Seuil, 1964, pp.19-28.

7) Roland Barthes, Laventure semiologique, recueil de textes, Paris, Editions du Seuil, 1985.

8) Erwin Panofsky, Loeuvre dart et ses significations, Paris, Edition Gallimard, 1969(1955), p.38.

9) Jean-Pierre Charpy, Lobjet pictural de Matisse a Duchamp, Paris, Edition du CNRS, 1976, dans la page dargument.

10) Umberto Eco, Loeuvre ouverte, Paris, Editions du Seuil, 1965(1962), p.9.

11) Clement Greenberg, Art et Culture, Paris, Editions Macula, 1988(1961), p.81.

12) Guilaume Apolinaire, 'Pablo Picasso' (14 mars 1913), Chroniques dart, 1912-1918, reedition, Paris, Gallimard, 1960, pp.367-370.

13) Margit Rowell, 'Cubisme, Futurisme', Catalogue de lexposition Quest ce que la sculpture moderne, MNAM, 1986, p.26.

14) Dans lExpress, 23 juillet 1964, no 684, cite par Jean Clair, Marcel Duchamp, catalogue raisonne, Paris, MNAM, 1977, p.9.

15) Antoine Compagnon, op. cit., p.131.

16) Ernst Gombrich, Histoire de lart, Paris, Flammarion, 1982(1972), p.4.

17) Pierre Cabanne, op. cit., pp.84-85.

18) Alain Jouffroy, Conversation avec Marcel Duchamp(1954-1961) ; Une revolution du regard, Paris, Gallimard, 1964, pp.118-119.

19) Mark Le Bot, 'Marcel Duchamp et ses celibataires, meme', Esprit, no 179, fevrier 1992, p.13.

20) Catherine David, 'Raymond Hains', Catalogue de lexposition Raymond Hains,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1990.

21) 우리는 제1장에서 이브 클랭의 작업을 상상적 오브제의 한 유형으로 논한바 있다. 여기서 그의 모노크롬 작품은 모든 오브제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그는 해면과 같은 실재 물질을 사용하기도 한다.

22) 1948년 알랭디(Allendy) 화랑은 그의 추상작품들인 “Photographies hypnagogiques' (반수(半睡) 상태의 사진)을 선보였는데 이것은 골이 진 씨줄 대안렌즈를 통해 바라보도록 특수 안경을 관객들에게 제공하였다.

23) 1947년과 1949년 사이에 앵즈는 단편영화들을 다수 제작하였는데 주제는 광고 이미지들로 채워진 도시 위에 설정되어 있었다.


24) 전시도록 Yves Klein,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1983, p.263.


25) 전시도록 Yves Klein,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1983, p.263.

26) Ibid.

27) Ibid.

28) Dominique Bozo, “Orgueil et angelisme', Catalogue de lexposition Yves Klein, op. cit., p.7.

29) Pierre Restany, 'La pris en compt realiste dune situation nouvelle“, Catalogue de lexposition 1960- les nouveaux realistes,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1986, p.21.

30) - 팅겔리: 1959년, 제1회 파리비엔날레에 그의 마지막 그림 그리는 기계인 “메타마틱 17”을 출품. 이 기계는 모터에 의해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팔을 만들어 준비된 종이 위에 연속적으로 드로잉을 실행하며 가위에 의해 완성된 작품을 자동적으로 절단하도록 설계되었다.
- 앵즈: 1959년, 같은 비엔날레에 파리의 거리에서 옮겨온 벽보판 “예약된 장소들의 울타리”를 출품.
- 아르망: 1960, 이리스 클레르 화랑에서 개인전 “채움(Le Plein)”을 개최. 그는 화랑공간 전체를 각종 폐품으로 가득 채웠다.
- 세자르: 1958년 “살롱 드 메”의 조각분과에 정방형으로 압축시킨 1톤의 자동차를 출품.
- 이브 클랭: 1958년, 이리스 클레르 화랑에서 개인전 “텅빔(Le Vide)”을 개최. 그는 화랑공간 전체를 완전히 비웠다.

31) 출품작가들은 파리의 아르망, 세자르, 앵즈, 팅겔리, 이브 클랭, 니키 드 생팔등과 뉴욕의 라우센버그, 자스퍼 존스, 스탕키비츠, 챔벌린, 본테쿠(Bontecou), 스리사(Chryssa)등이었다.


32) Michel Giroud, “Le Nouveau Realisme', Art Press, 1976, p.30.


33) Tilman Osterwold, Pop Art, Cologne, Benedikt Tascen, 1990, p.116.

34) 파리국립장식미술관의 프랑스와 마테(Francois Mathey)는 실험미술을 지지하는 당대의 유일한 미술관장이었다. 지원 행정가였다. 다니엘 코디에 화랑은 1964년 프랑스 미술시장의 빈약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Jean-Paul Ameline, op. cit.,, p.79.)

35) Ibid.

36) Marc Le Bot, 'De lart comme relation amoureuse', Esprit, n°2, 1986.


37) Jean-Olivier Majastre, 'Sociologie de lart, art de la sociologie', Art et Contemporaneite, Bruxelles, Editions La Lettre Volee, 1992, p.10.


38) Antoine Compagnon, op. cit., pp. 143-144



- 현대미술학회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8호>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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