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동훈 / 무애의 삶과 예술

김영호

I. 무애의 삶

이동훈의 호가 무애(無涯)다. 아호란 대개 그 주체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염두에 두면서 붙여진 이름이고 보면, 작가의 경우 그가 지향하는 예술관을 함축하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무애는 불가에서 쓰는 무애(無碍)와는 달리 ‘넓고 멀어서 끝이 없음’을 나타낸다. 이것이 좌우명으로 쓰일 때 인생이란 끝없는 과정의 연속이며 무한한 순간의 집합일 뿐이라는 철학적 의미가 된다. 관점을 달리하여 보면 무애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정진하는 구도자와도 같이 ‘중단 없는 모색의 삶’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이동훈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와 후배 그리고 몇몇 비평가들이 남긴 글들을 보면 무애는 이동훈의 삶과 예술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동훈은 1903년 평안북도 태천에서 태어나 의주에서 농업학교와 사범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34년 일본에서 짧은 체류기간을 거쳐 서울(1935)과 대전(1945) 그리고 다시 서울(1969)로 거처를 옮기며 화가와 교육자로서 일생을 살다 1984년 생을 마감했다. 그가 몸소 체험한 20세기의 80여 성상(星霜)은 일제 식민과 해방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과 국토 재건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리고 한반도에 밀려드는 다국적 집단의 외래 문화에 대응하여 민족 스스로의 존재의식을 추스려 나가야 하는 한국 근대문화의 형성기이기도 했다. 개인사적으로는 강점기 일제하에서 시작해 일평생을 교육자로 지낸 지식인이었고, 그가 선택한 예술의 노정도 일천한 역사를 지닌 서양화 군에 속해 있었다. 더구나 북한 출신의 지식인 화가로서 그의 삶은 적잖은 방황과 혼란의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동훈이 몸담았던 해방 이후의 남한 화단 풍토도 국전을 둘러싼 아카데미즘과 개혁을 꿈꾸는 모던아트 진영으로 나뉘어 이원화 되고 있었으며, 화단의 헤게모니를 잡기위해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이 서로에 대한 적의마저 품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화가 이동훈이 현실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세욕을 버리고 소박하고 관조적인 자세로 무애의 삶을 사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평생 동안 몸담았던 교직에서도 교장직과 장학사직을 사양했다는 에피소드는 그가 추구했던 무욕과 무애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 글의 의도는 이동훈의 삶과 그 예술의 가치를 동시대 환경에 비추어 살펴보려는데 있다. 작가는 일제와 해방 그리고 전쟁과 재건기를 살았던 서양화 1세대의 여느 작가들처럼 선전(鮮展)과 국전(國展)으로 이어지는 관학파들과 행보를 같이했다. 일제하에서는 선전에서의 입선을 통해 25세의 나이로 화단에 입문한 이래 계속해 선전에 출품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듬해에 선전의 뒤를 이어 탄생한 국전에도 첫회에서 1981년 30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특선,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된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 그리고 1976년 초대작가상을 받았던 그는 누가 뭐래도 국전의 후광을 받은 인물의 한사람이었다. 비록 일본의 정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해외 유학파나 국전에 최고상을 받은 기라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동훈에게 국전에서의 수상 경력은 그의 삶과 예술적 노정에 중요한 지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주지하듯이 해방 후에 탄생한 국전은 첫 출발에서부터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범했다. 평론가 이구열의 지적처럼 ‘무자각한 시행착오’는 선전의 규약과 운영방법을 무비판적으로 물려받으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전에 대한 병폐는 미술의 개념이나 형식의 차원을 넘어 조직과 운영방식의 구태의연에서 운명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으며, 구태의연의 조직과 운영방식은 곧바로 보수적 미술의 보루와 동일화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비평활동이 직업적인 비평가 중심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초에 이르러 관학파로 명명된 국전파의 미술경향을 터부시 하는 경향이 심화 되었으니 그 앞날이 결코 평탄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제5공화국의 시퍼런 정치적 서슬아래 1980년 국전은 짧은 호흡을 멈추고 역사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국전의 파국은 이동훈에게 영향을 끼쳤다. 국전에 대한 평가절하와 더불어 이동훈의 예술에 대한 가치평가도 아카데미즘의 범주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동훈 예술에 스민 가치를 전위와 추상으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비평의 잣대로 측정함으로서 그의 예술세계는 한동안 구태의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아카데미즘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전후 구상미술의 성과와 미술사적 자리매김에 관심을 갖는 신세대 비평가들이 나타나면서 한국 근대미술의 가치평가에 대한 견해들이 전과 다르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관점은 형식주의 미술비평에서 벗어나 형식의 주체로서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에 대한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 인물미술사 연구를 둘러싼 새롭고 다양한 관점은 개화기 한국화단의 제1세대 작가들에 대한 가치를 폭넓게 측정하는데 점차 기여했으며 이들이 채택한 평가의 기준들은 이동훈의 삶과 예술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화가 이동훈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교육자로서의 활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동훈의 제자로 알려진 조각가 최종태는 자신의 스승에 대한 회고의 글을 통해 이 땅에 미술의 개화기를 맞게 된 것은 마땅히 제1세대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른바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박수근, 김종영 등에 의해 도달한 한국미술의 개화기는 이동훈을 비롯해 이종우, 도상봉, 김주경, 오지호, 이마동, 이인성, 박영선 등의 서양화계 제1세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화기만 보고 있고 그 시대를 있게 한 전시대에 대해서 연구가 아직도 부족하다’는 최종태의 주장은 따라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 제1세대들의 일구어 놓은 화업들은 동시대의 시대적 환경과 그 환경에 대한 치열한 대응의 산물로 다루어질 때 한국미술에서 새롭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미술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과 화단 형성에 기여한 업적도 크게는 한국 미술문화의 활성화라는 범주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 예술은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인격과 사상을 몸소 실천하거나 교육하는 일을 누가 중요치 않다 할 것인가.


II. 전기적 비평

화가 이동훈에 대한 화단의 평가는 ‘과묵’과 ‘성실’ 그리고 ‘소박’으로 대변되고 있다. 평론가 이경성은 그를 화단의 표면보다 저류에서 과묵히 제작생활을 계속해 온 작가라는 점을 전제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눈에 띄는 재기가 없기에 남의 눈에 띄는 신기한 일보다도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작업을 주위의 관심에 아랑곳없이 꾸준히 지속해 왔다. 칭찬도 비난도 초월하면서 오직 자기의 길을 걸어온 과묵한 작가가 바로 화가 이동훈이다.” 1960년대 이후 평단을 지켜온 평론가 이구열 역시 이동훈의 작품에 나타나는 총체적 특성을 일관된 소박성에 두고 작가로서 그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개성적 특질이나 독특한 창조성 실현보다는 그의 세계로서의 성실한 화면 추구로 일관한 소박한 자연주의 화가였다”

한국 미술평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부들의 이동훈에 대한 논평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작품의 창의성보다 작가의 내적 진실성에 큰 점수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동훈의 예술세계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가 작품의 형식이나 방법상의 문제보다 작품을 실현시킨 작가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통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안을 두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작품분석의 근거를 작품 자체에서 찾으려는 기존의 시각에서 보면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인물의 전기에 초점을 맞춘 이들의 비평근거는 다원적 접근방식이 요구되는 오늘의 문화적 상황에서 되새겨 볼 만 한 논점들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되돌아보면 한국 근대미술에 대한 가치평가는 서구 모더니즘 미술비평의 영향으로 작품의 형식실험과 그 방법론에 근거해 전개되어온 측면이 크다. 이른바 예술지상주의의 기치에 힘입어 작품의 형식개발과 매체실험이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미술의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분위기의 영향으로 국내 화단은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고 상대적으로 구상미술에 대한 홀대가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구상과 추상의 논쟁은 형식주의 미술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려 했던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며 이러한 추상미술에 대한 옹호의 상황은 국전의 운영에도 점차 영향력을 행사해 출품작의 심사 분야를 구상과 추상으로 나누거나 아예 전시회 자체를 봄과 가을로 이분화 해서 구상과 추상을 별도로 치루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전이 구상과 추상의 경향을 양립될 수 없는 상극의 표현방식으로 대립시켜 제도화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평론가 이일이 ‘추상과 구상의 변증법’이라는 평문을 통해 추상과 구상의 이원적 구분은 시효를 잃은 편협한 견해의 소치라 비판했다. 이일은 국전의 추상과 구상 논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전이 과연 전통적 자연주의 혹은 아카데미즘을 옹호하는 진정한 보수적 단체였는지도 제대로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동훈의 작품은 한국의 모더니스트들이 추구해 온 전위미술의 잣대로 비평하는 일은 타당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전이 옹호해 온 구상미술의 문맥에서 다루는 것도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닐듯 싶다. 이일의 주장대로 당시의 그림들을 구상 또는 추상의 문제로 따지는 것은 논의의 가치가 없으며 ‘형상’의 문제로 관심을 돌려 작품에 표상된 대현실의 문제, 양식 또는 기술 그리고 의미의 문제 등 보다 근본적인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미술은, 그것이 추상이든 구상이든, 외적형상의 의미를 나름의 형식과 논리로 창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는 화가들이 그 세계를 어떻게 형상화하는가를 추적하는데 가치평가의 의미가 주어질 것이다. 이동훈의 작품에 대한 연구로 초점을 두었을 때 그의 작품이 지시하는 형상 이미지에 담긴 가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양한 전기적 비평과 그에 따른 역사적 문맥이나 화단 형성과정에서 기여한 공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역할 등의 척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동훈의 작품은 국전을 통해 공증되었으나 국전을 둘러싼 보수적 아카데미즘 경향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평가한다면 그 가치는 한계를 보이게 될 것이다. 이동훈의 풍경화를 둘러싼 형식과 논리의 근간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동훈이 그린 풍경은 작품에 형상화된 일루전 자체가 아니라 풍경 너머의 것, 풍경과는 다른 것, 풍경 속의 것을 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는 화가들이 도달해야 하는 저마다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며 가스통 바슐라르의 다음 구절은 이동훈의 작품에 담긴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화가들이 도달해야 하는 것, 그것은 사물의) 또 다른 것을 본다는 것, 그 너머를 본다는 것, 그 속을 본다는 것이며 비전의 수동성으로부터 빠져 나온다는 일이다”

이동훈이 풍경과 정물을 통해 도달하려 했던 세계란 무엇일까. 우리가 앞서 인용한 두 비평가의 글을 다시 참고한다면 이동훈의 풍경화에 담긴 그 너머의 가치란 ‘과묵하고 성실한 자세로 바라본 목가적 농촌과 자연주의적 삶이 투영된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결실로 얻어낸 것이 ‘소박한 화풍의 자연주의 세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교육자이면서 동시에 화가의 길을 걸었던 이동훈에 있어 풍경이란 어떤 결론을 끄집어내기 위한 노력도 아니었고, 그 속에서 어떤 새로운 흐름을 추출해 내려는데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굳이 그의 예술적 성과를 말한다면 이동훈에 있어 예술은 그의 아호처럼 ‘무애적 삶의 표상’이었다. 이동훈의 예술을 말할 때 무애의 삶이 예술의 형식이나 방법론에 앞서 그 저변부에 흐르고 있는 사상으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동훈의 무애적 삶과 예술에 굳이 논리적 틀을 갖추어야 한다면 조선 문인화의 전통적 사상에서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인화의 가치가 작품의 형식과 그 작품의 격 그리고 작품을 제작하는 인물의 사상이 함께 융합된 상태에서 최적화 된다면 이동훈이 추구했던 무애 사상은 동양 회화의 전통적 가치에 연계되는 고리를 지니고 있다. 예술이란 삶이 그러하듯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끝이 없는 일임을 알고 무위의 태도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세워나가는 과정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의 무애사상은 칸트가 제시한 ‘미적 무관심’의 세계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무관심이란 관심의 결여가 아니라 주의를 끌 만한 자극적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 함으로서 소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구가하는 태도를 말한다. 한국의 미를 언급할 때 ‘스스로 그러한 듯 존재하는 사물’ 이라는 어귀가 자주 인용되듯 이동훈의 무애적 삶에는 직관에 의해 대상을 수용하려는 태도가 있음을 보게된다.


III. 교육자로서의 삶

이동훈의 삶과 예술에 대해 언급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 교육자로서의 역할이다. 특히 서울에서 대전지역으로 이주해 교단생활을 계속하는 1945년부터 1968년 정년까지 22년의 세월은 당시의 국내 화단 상황을 고려할 때 큰 의미를 갖는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전후 의 국토재건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이동훈의 교직생활은 척박한 환경에서 미술인재들을 발굴 육성하는데 공헌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전지역의 미술문화와 화단의 활성화를 위한 초석을 놓는데 기여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시원을 1950년대 후반으로 삼고 있는 국내상황을 고려한다면 교육자와 화가의 삶을 살면서 지역화단에 현대미술의 씨앗을 뿌린 이동훈의 역할은 광야를 개척하는 선구자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연보에 따르면 이동훈의 교직 생활은 그의 고향인 평안북도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1923년 그의 나이 24세에 <평북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한 직후 평북 <용암포보통학교>에 훈도로 잠시 근무하였으며 <신의주보통학교>로 옮겨 1935년까지 8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로 이주해 1941년까지 6년간 <죽첨국민학교>에 훈도로 근무했고, 이후 1945년까지 4년간을 <미동국민학교>에서 훈도로 근무했다. 이렇게 해방 전까지 그의 교직 기간을 합산해 본다면 이북과 서울의 시기를 모두 합해 22년동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이동훈의 교단 활동상황은 제대로 알려져 있는 바가 없고 선전 출품을 기반으로 한 그의 꾸준한 미술활동이 전해지고 있다. 다만 이 시기는 일제라는 시대적 상황이라는 점, 그리고 식민지 정책에 핵심적 요소로서 교육에 주력했던 당시의 정황을 고려할 때 지식인으로서 그가 겪었을 갈등과 방황을 무책임하게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가 교육자로서 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화가로서의 길에 천착해 왔다는 사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대변해 준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무애의 길이었다.

이동훈은 1845년 해방과 함께 대전으로 이사하여 1947년 47세까지 2년간 <대전공업학교>에서 근무했고, 이어서 1963년 그의 나이 60세까지 16년간 <대전사범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학제 개편에 따라 대전사범학교가 <충남고등학교>로 개칭된 이래 다시 6년간을 근무하고 드디어 1969년 2월에 정년을 맞게 되었다. 해방 후 교단에서의 이동훈의 의욕적 활동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동훈이 교사를 천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정년 퇴임 후에도 그는 교단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의 교사 생활을 청산한 후에도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1981년까지 12년간을 거르지 않고 출강했다. 과연 교직은 이동훈의 천직이었으며 그 기간은 도합 58년의 성상을 기록하고 있다.

충남고등학교 시절의 제자이자 충남대 교수로 재직하는 최영근의 증언에 따르면 대전의 목동 캠퍼스(충남고등학교와 그 전신인 대전사범학교의 부지)에서 재직했던 22년의 세월 동안 교육현장과 작가의 길에만 정진하기 위해 전기한 바와 같이 교감이나 교장 등 관리자의 길을 마다하고 정년퇴임때 까지 평교사로 보냈다. 앞서 해방 직후 대전고등학교에 재직했던 2년간을 합해 모두 24년을 교사로서 근무한 대전은 이동훈의 교사 생활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의 노정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도시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49년 제1회 국전에서의 특선과 뒤이은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화가로서 자신의 화력을 세운 때가 바로 이 대전 시기였기 때문이다.

대전사범학교 시절의 제자이자 서울대 교수를 지낸 최종태는 <이동훈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계기로 스승에게 바치는 장문의 글을 썼다. 그에 따르면 이동훈은 별명이 호랑이로서 엄한 교사였으나 제자들의 뒤를 돌보는 자상함을 동시에 가진 분이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미술실을 지키며 작품제작에 몰두함으로서 제자들에게 작가로서의 열정과 본을 보였던 스승이었다. 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학생미술전람회 창립을 주관하고 충청남도 미술협회를 만들어 매년 전시회를 꾸림으로서 지역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최종태는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이동훈 선생은 큰 나무이고 큰 예술가이며 큰 사람이고 그리하여 큰 도인(道人)입니다. 우리들의 이 활얄한 시대에 드문 귀감으로 오래 자리잡고 서 계셔야 할 분입니다. 이동훈 선생은 성실근면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절대로 동조하는 일이 없고 자신의 예술활동 뿐만 아니라 후진들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당시 충남 대전 일대에서 미술인들이라면 그분의 배려를 받지 않은 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동훈이 고등학교 교편생활을 마감하면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은 정년퇴임 기념전이었다. 대전예총화랑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는 김인승, 도상봉, 박득순, 이마동, 이종우, 김원, 이종무, 장리석 등 40여명이 찬조 출품했다. 당대 한국화단을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축하와 참여 속에서 진행되었던 정년퇴임 기념전은 그를 둘러싼 화우들과 선후배간의 인간적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를 가히 짐작케 한다.

대전은 걸출한 화가와 조각가를 다수 배출했다. 이종상, 유희영, 하동철, 최종태 등이 대전 출신이고 유근영, 김홍주, 정명희, 정광호 같은 작가들이 대전에 거주하고 있다. 최종태를 제외하고 이들이 이동훈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바는 없다 하더라도 대전이 이처럼 작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지역의 척박한 화단풍토를 일구는데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견인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이 에콜 드 파리와 같이 독립된 집단으로서 ‘대전 화파’의 결실을 맺거나 ‘대전 미술’로 특화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거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이른바 대전 미술이 지역에서 내적 동질성을 형성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서울에서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당시의 문화현상은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전은 많은 작가를 배출했으나 그들의 활동 영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해방 후 국내의 교육과 문화의 지형도가 중앙집권적 구조로 심화되었던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해방 후 국내 문화환경의 변화는 미술교육 분야에서도 예외없이 진행되었다. 초중등학교 미술교육의 쇄신과 더불어 수도권을 중심으로 미술대학이 생겨나면서 국내파 미술가 양성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서울대에서 미술학부가 1946년 생겨나고 홍익대에서 미술과가 1949년 창설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53년 5월에 문을 연 서라벌예술학교가 1956년에 미술과를 설치하면서 5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교육받은 젊은 미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했다. 후에 이들은 학교와 언론 그리고 미술단체 등 다양한 체널을 통해 서구 현대미술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주역들로 성장하게 된다. 위에 적은 대전 출신의 미술인들은 대부분 서울대학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수학하였고 졸업후에도 대전 지역을 넘어 한국미술의 주역으로 활동해 오는 인물들이다.


IV. 이동훈 미술과 가치

이동훈의 삶과 예술에 나타나는 가치는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다. 최종태의 회고를 참고하면 이동훈은 한국미술사에서 서양화 토착 제1세대의 일원으로 활동했지만 일본화풍이 없다는 점을 특이한 점으로 짚고 있다. 그는 ‘해방후에서 전쟁후에 선생댁을 드나들 때 일본미술잡지가 서가에 많이 있었으나 그의 그림에서 일본그림 냄새가 안보인다’고 적고 있다.

일제시대의 선전과 그 뒤를 이은 국전을 통해 성장한 한국 화가들이 일본의 영향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해방 후의 사회적 상황을 보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일본의 잔재를 그림이나 사상으로 표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지식인 화가로 교직에 몸담아 생활을 해 오면서 이동훈이 추구했던 예술관이나 조형적 표상방식이 어떤 미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었는지는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기한 최종태의 회고가 의미하는 바는 스승 이동훈의 작가적 사상이 무애적 태도로 일관되어 어느 특정한 주의나 형식에 종속되는 바가 없었음을 전하려는 언술로 이해된다.

이동훈의 삶과 예술에 대한 조명작업과 더불어 제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국전과 연관된 물음이다. 국전의 종식은 한국미술의 위상과 구조를 제로지점으로 설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미술양식들을 탄생시키는데 기여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은 국전을 둘러싼 비리와 주도세력의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표현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전의 폐쇄는 한국미술을 구상과 추상의 이분적 대결구도에서 추상의 편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국전을 둘러싼 구상과 추상의 이분적 논쟁은 화단에서 묵묵히 자신의 작업에 전념했던 다양한 경향의 작가들을 한국미술사에서 소외시키는데 기여했다는데 있다. 이동훈의 예술은 국전에 적용된 형식적인 이분법에 의해 피해를 본 수많은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예술은 모더니즘과 아카데미즘의 대립적 맥락과 형식주의 비평의 방법론에 의해 재단됨으로서 고유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다원주의 시대의 맥락에서 이러한 상황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이동훈의 작품은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개체적 삶의 가치라 할 수 있다. 형식주의 미술사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작품에 담긴 가치는 그림의 ‘내적 요소’인 형식과 내용에 따라 주어지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가치는 그림의 ‘외적 요소’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시대상의 반영이나 작품을 통해 표상되는 작가의 삶과 철학 등은 작품이 품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가치를 담보하는 조건이 된다.

한국의 대표적 미술비평가의 글들을 통해 이동훈의 삶과 예술에 나타나는 특성은 앞서 언급했듯이 ‘과묵’과 ‘성실’ 그리고 ‘소박’으로 대변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가 작품으로 표상되면서 드러나는 미학적 개념은 단순, 소박, 질박, 토속적 정취, 목가적 서정 등으로 정리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중견 평론가 정준모의 글에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이동훈의 작품세계는 화려하거나 기교가 뛰어난 그런 일반적인 회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풍은 언제나 그윽하고 조용하며 관조적인 자세로 성실하게 화면을 운영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꾸밈이 없는 소박한 화풍의 작가로 솔직한 자세로 담담하게 자신의 주변과 일상을 그려나간다.”

주지하듯이 이동훈의 회화의 주종은 풍경화이며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젖소, 닭장, 염소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들 소재를 표상한 작품을 통해 드러내려는 것은 ‘목가적인 농촌의 삶이 투영된 일상’이다. 이는 그의 작품의 가치는 형식이나 주제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내재된 ‘토속적인 정취’와 그것을 실현하는 작가의 ‘솔직한 자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카데미즘이나 모더니즘의 분파적 가치를 따지는 일이나 미술의 양식문제에 의존했던 기존의 관례를 넘어 작가들의 태도와 사상에 대한 전기적 연구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동훈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연구의 방향은 ‘멀어서 끝이 없음’으로 ‘중단 없는 모색의 삶’을 지향하는 무애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2011.11)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