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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광기 - 중광 예술론을 위한 시론

김영호

I. 프롤로그

광기(狂氣)는 예술사의 오래된 화두의 하나다. 예술 창조행위에 관여하는 정신현상으로서 영감이나 천재, 상상, 충동, 욕망, 그리고 무질서를 뜻하는 아나키(anarchy) 따위가 플라톤의 광기(Mania)로 부터 분화되어 나온 친족어라는 전제하에 그렇다. 장구한 족보에도 불구하고 광기에 대한 관심이 예술사에서 한동안 지속되지 못했던 이유는 이른바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아카데미즘의 물결 아래 비이성적인 영역이 권력으로부터 홀대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17세기 계몽주의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광기는 소외와 격리의 대상, 심지어는 미셸 푸코(1928-1984)가 말하는 ‘감금’의 대상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무의식의 불가사이에 대한 관심과 해부가 심화되면서 광기는 예술의 표현과 해석에 있어 중요한 비평적 원리로 다루어지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주요 논객들로서 앞서 언급한 푸코 외에도 들뢰즈와 라캉 그리고 가타리의 이론들은 여기에 속하는 경우다. 심리학 전통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토대로 진화된 이 이론들은 이제 광기를 생물학적 요인 보다는 문화적 요인으로 인식하고 그를 통해 동시대의 인간행동을 파악하려 한다.

오늘날 광기는 주체의 해체와 이중자아 그리고 욕망 따위의 이름으로 인문학의 이론적 틀을 형성하면서 그 비밀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예술의 영역에서도 광기의 행동과 그 표상 문제는 더 이상 소외시킬 수 없는 연구 대상의 하나가 되었다. 이성과 합리의 울타리가 와해되고 비이성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는 또 다른 배경에는 사상적 관점 외에도 환경의 변화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재앙의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자연 환경은 이성의 한계와 자연의 불가사이한 힘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전쟁과 폭동 따위의 인재(人災)를 넘어서 인류를 위협하는 지진과 해일 그리고 홍수와 질병 따위의 자연재(自然災)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자연으로서 인간과 그 내면에 담긴 거침없고 불확정적인 에너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고 있는 요인이다.

이 글은 광기가 특정 미술가의 행동과 그 예술적 표상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논제를 위해 우선 광기의 개념과 그 변천사를 거칠게나마 살피고 그 특성을 규정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미술사에 등장하는 몇몇 작가들의 예를 들어 작품 창작의 정신적 배경과 그 조형적 구현의 과정을 분석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과 정리 작업은 결코 명쾌한 논리로 언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욕망이론 속에는 ‘그 어떤 문장이나 도표 그리고 공식으로 언명하려 해도 이론으로 담아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자크 라캉(1901-1981)의 고백처럼 광기는 비규정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언명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명될 수 없는 것이 된다”고 라캉은 말한다. 그의 말은 광기에 대한 연구 역시 분리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분야라는 인식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광기에 대한 성찰에 대해서 침묵하면 안되는 이유는 욕망이 그러한 것처럼 광기가 현대미술의 창작과 해석을 위한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광(重光, 1935-2003)을 연구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걸래’라 불렀고, 타자에 의해 ‘미친 중(mad monk)’이라 명명되었으며 거침없는 언변과 기행으로 무애의 삶을 살았던 중광의 작가적 태도와 그 작품세계에 하나의 이론적 지표를 세우려는데 있다. 광기는 중광의 예술에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의 중심 원리가 되었다는 것이 이 글이 설정하고 있는 명제다. 연구의 방법으로서 인간의 정신현상이란 생물학적 혹은 자연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생물학적 혹은 문화적 요인에 의해 규정되는 그 무엇이라는 점을 강조한 푸코의 견해를 근거로 삼을 것이다. 중광에게 나타나는 광기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환경(가령 4·3항쟁, 6·25전쟁으로 대변되는 학살과 광란의 시대)과 문화적 조건(가령 불교 종단과 화단의 타락과 위선)과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따져 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광기가 예술에 표상되는 과정에서 중광이 거침없는 삶이 파생한 성과는 무엇이고 또 그의 반형식주의 작품이 동시대 문화형성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도 이 글에서의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II. 광기의 개념과 역사

광기(madness)란 미친 기운이다. 미쳤다 함은 행동에 있어 사리분별 없고 사소한 일에 화내고, 충동적으로 말하는 일과 같은 기질로서, 크게 보면 비이성적 영역에 속한 정신현상으로 설명된다. 사람이 가진 비이성적 기질은 감정의 동물인 인간이면 누구나 지닌 보편적 속성이다. 그래서 광기는 오래전부터 무의식적 충동이나 욕망과 더불어 인간이 지닌 보편적 능력으로 이해되어 왔다. 때로는 신이 내린 선물로서 때로는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본능으로서 인식되어 온 것이다.

광기가 예술 창조 활동과 연계되면서 특수한 의미를 부여받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의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오른다. 철학자 플라톤(BC 427-347)은 예술을 비이성적인 광기의 소산이라 규정했다. 즉 시인은 신으로부터 받은 영감에 따라 창작하는 자들이며 ‘시는 신적 영감에 사로잡혀 비정상적인 마음의 상태로서의 광기(mania)에 의거하는 활동’으로 분류되었다. 플라톤은 비록 예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가들이 지닌 창조적 영감을 비정상적인 마음의 상태인 광기로 해명함으로서 예술이 인간의 불가사이한 감정을 표현하는 활동이라는 후대의 주장들에 이론적 초석이 되었다.

예술적 영감에 대한 불명확한 플라톤의 견해는 르네상스 이후에도 부정적인 색채를 띠면서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사용되었다. 도덕과 윤리를 기반으로 삼은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 광기에 의거하는 영감은 좋지 않은 기운으로 평가되었다. 비이성적 부분을 일깨우고 강화시킴으로서 이성적 부분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플라톤이 예술가들을 ‘추방되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계몽주의 시대인 17세기에 이르러서 급기야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고 집단이 정한 정상인의 경계를 넘으면 비정상인이 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광인은 부랑아, 걸인, 범죄자들과 더불어 비정상인의 하나로 분류되고 국가의 요양시설에 격리 수용되었다. 이 시기에 광인을 규정하는 사람은 병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상인과 비정상인 사이에 구분점을 의도적으로 설정했는데 이성과 합리를 그 잣대로 삼았다. 18세기 말 부터 광기는 온전치 못한 정신병으로 치부되고 광인은 일종의 사회적 낙오자로 분류되었다. 광인에 대한 격리와 수용의 결정권은 여전히 병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주어졌다.

19세기 이후 예술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되면서 광기에 대한 논의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예술심리학은 심리학, 사회학 등 이전의 철학적 탐구들에 대한 연구를 세분화시키고 발전시킨 사회과학적 방법의 성립과 함께 나타난 산물이었다. 이에 따라 예술가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실증적 이론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를 시조로한 정신분석학적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의 창조적 능력은 예술가의 ‘타고난 능력’으로 설명한다. 예술가들이란 예술창조의 ‘본유적인 충동’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가령 예술가는 무의식속에 담긴 본유적 충동과 현실적 제약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로 인해 억압적 충동이 생겨나고 이 정신병리학적 현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승화하기 위해 작품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예술생산의 원천으로서 플라톤이 주장한 신적 영감으로서 ‘광기’는 프로이트에 와서 인간의 정신에 내재된 ‘억압적 충동’으로 대체되었다.

프로이트를 잇는 정신분석가 푸코는 광기의 문제를 심리학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총체적 문제로 확대시켰다. 푸코는 1961년 파리 소르본느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 <광기의 역사 (Histoire de la folie à lage classique)>를 통해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가 정치 경제의 구조와 관계를 맺으며 규정된 산물이었음을 밝혔다. 즉 서구의 이성중심의 사고체계가 형성해 낸 분리와 차별의 역사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푸코는 ‘감금’이라는 일반화된 사회적 현상에서 출발하여 광기와 관련된 제 담론을 분석했다. 광기의 주변적 존재와 소외된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망과 권력의 전략적 실체들을 총체적으로 밝혀내었다. 이 논문을 통해 푸코는 ‘정신병이란 인간을 측정하는 영원불변의 척도가 아니며 광인이 생겨나는 진실로부터 근대사회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푸코에 따르면 ‘이성의 도시가 광인을 환영한 것은 이방인으로서의 광인이었으며 익명성을 수용한 광인이었다. 검열과 감시의 세계에서 판단의 세계로 옮겨온 것이다. 즉 고전주의시대에 비이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빈곤, 게으름, 사악한 행위와 더불어 죄로 취급되었고 나아가 감금의 대상이었던 광기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해방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진리에로의 해방이었다’. 푸코는 이 해방이 프로이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수용소의 존재로부터 환자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본질적인 요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다. ‘프로이드는 수용소의 권력을 재조직했고, 그 권력을 의사에게 넘겨줌으로써 극대화 시켰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발표된 이후 후학들에게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91년 광기의 역사 출간 30주년을 맞아 ‘정신의학 및 정신분석학 역사학회’는 <광기의 역사 30년 후(Histoire de la folie trente après)>라는 제목으로 제9차 심포지엄이 열었고 푸코를 비판하는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자크 데리다(1930-2004)는 푸코의 한계를 지적하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제시했다. 데리다는 ‘묘사된 대상으로서 광기’보다는 광기를 ‘묘사하는 주체로서 시대’를 문제시 삼았다. 그는 푸코가 꾸준히 대상화 시킨 광기의 역사 자체가 아니라 이 책이 뿌리를 내리고 책이 출범하는 역사적 조건과 시대, 즉 정신분석학 시대의 책으로서의 광기의 역사에 흥미가 있다고 했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의 고조로 라캉과 프로이트의 이론이 다시 각광받고 있는 시점에서 나타난 문제의식이었다. 푸코의 가설은 르네상스가 해방시킨 광기를 고전주의 시대는 이상한 폭력적 수단에 의해 침묵하게 만들었다는데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이상한 폭력적 수단이란 다름 아닌 이성이고 그 이성을 정립한 것이 데카르트였다는 것이 푸코의 결론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광기는 사유의 한 사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광기는 관념과 인식의 한 가운데에 위협적인 존재로 위치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어떤 특정의 인식도 이론상 광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데리다의 추론이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광기의 개념과 역사는 신의 영감으로부터 출발하여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사회적 편견에 의해서 비이성의 영역으로 대상화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심리학의 등장에 힘입어 인간의 이성의 세계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는 광기를 본유적 충동으로 규정했으며 욕망의 주체로서 인간을 규정한 라캉에 이르러 이성의 세계로 편입된 것이다. 그 후 정신분석자들은 광기에 대한 이론의 출발점을 상상(환상)으로 설명한다. 그들은 광기의 근거를 상상을 유형화하면서 오랫동안 이성의 그늘에 감추어져 있던 광기의 진리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은 광기가 이성의 세계로 편입되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이성의 세계로의 광기의 편입이 허용되었다는 것은 결국 이성의 비이성에 대한 개가를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비이성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캉은 이성의 세계로 편입된 광기를 묘사하는 주체로서 사회에 대한 연구를 요청하고 있다.


III. 광기와 예술

인류사에서 광기는 상반된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정신질환의 얼굴과 창조적 영감의 얼굴이다. 17세기 이후의 계몽주의 사회에서는 광기가 격리와 치료의 대상인 병리현상으로 취급되었지만 일찍이 플라톤 학파들은 광기를 질병이 아닌 예술적 영감의 한 형태로 보았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광기의 고전적 해석과 근대적 해석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등장하는 작가를 들라면 스페인의 대표적 화가의 한사람인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 속에는 ‘광기로서의 미술’ 혹은 ‘미술로 승화된 광기’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비밀처럼 숨겨있다. 고야를 비롯한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현실의 근원적인 불합리성과 인간 욕망의 불가해한 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예술과 광기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고야, <광인의 집(Madhouse)>, 1812-14,


고야, <사투르누스>, 1820-24


고야의 작품에 나타나는 광기와 잔혹함의 표현은 그의 불운한 생애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야의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의 <광인의 집>는 또 다른 의미를 전해준다. 그는 60세가 넘는 말년에 사회풍자 혹은 사회비판적 그림을 그렸다. 궁정화가로서 그는 수많은 초상을 그렸지만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한 이후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상황을 목격하며 <1808년 5월 3일>과 같은 참혹한 사건을 다룬 그림들을 다수 그렸고 이어서 연작 판화 시리즈를 통해 전쟁에서의 살육과 인간의 잔학성 등을 거칠게 표현해 냈다. 그것은 비단 스페인이라는 국가의 내부적 문제를 벗어나 보편적 인간들이 가진 그칠 줄 모르는 권력욕과 우매함에 대한 냉소적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고야는 현실의 근원적인 불합리성, 인간 욕망의 불가사이에 관심을 죽음과 에로스와 광기 그리고 잔혹과 기괴한 형태를 통해 구현되었고 이를 통해 고전주의적 가치인 명확하고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가치들에서 벗어났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도 예술가와 광기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가령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작품에 나타나는 광기는 작가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열정이 예술적 창조의 에너지로 해석되는 논지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경우다. 주지하듯이 반 고흐는 기이한 성품, 즉 비이성적 속성을 남다르게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사망하기 한 해 전인 1889년 반 고흐는 자신의 귀를 면도날로 자르고 그것을 사창가의 여인에게 전달하는 기행을 저지른다. 이듬해인 1890년 2월 반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르에 정착하지만 이 지역 주민의 신고로 요양시설에 감금되어 책과 화구는 물론 그가 사용하던 파이프조차 소지가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 이르게 되면서 스스로 생 레미에 자리잡은 정신병원을 찾게 되었다. 반 고흐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으며 창작의 기회는 그를 괴롭히던 편집증과 우울증을 정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주옥같은 대표작 대부분은 절망감이 극도에 달했던 말년의 3년 동안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나 1890년 그는 자신의 배에 권총을 발사하고 몇일 후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반 고흐가 죽고 난 후 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소개되기 시작했고 그의 광기에 대한 견해들이 다양하게 주장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반 고흐가 당시 그린 <귀가 잘린 자화상>(1889)은 정신병자의 그림으로 보기에 힘들다는 것이다. 적과 녹의 보색대비 효과나 타오르듯 불꽃과 같은 작은 터치도 앞서 살펴보았던 고야의 폭력성을 띤 그림 앞에서 안정된 서정의 산물로 보일 뿐이다.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나타나는 화면한 색채와 구성과 균형 잡힌 구도 역시 그의 정신상태의 안정성을 대변해 준다. 그렇다면 그에게 부과된 광인의 혐의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반 고흐의 경우는 미술의 치유효과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좋은 사례가 되었다. 여성 조각가 루이즈 부르즈아의 경우처럼 작가의 내면에 자리잡은 폭력적이고 잔혹한 속성은 작품을 통해 배설 혹은 승화됨으로서 작가의 삶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반 고흐나 실존주의 화가이자 역시 자살로 생을 마친 볼스(Wols) 같은 작가의 정신성을 명확히 분석하는 도구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노르웨이가 배출한 현대미술의 거장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불행한 성장기를 거치며 겪었던 스트레스를 예술적 표현으로 배설하며 자신을 보전했던 작가로 주목할 수 있다. 그는 고야나 반 고흐와 더불어 광기를 예술로 승화해 다스린 대표적인 작가의 대열에 자리잡고 있다. 뭉크는 자신이 다섯 살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모친을 잃고 10년 후에는 누이까지 사망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불운한 소년시절의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20대에는 아버지도 사망하고 만다. 이러한 기억은 그를 삶의 공포속에 시달리게 했으며 생애동안 정신분열증으로 괴로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의 미술사가 마티아스 아르놀트는 그의 저서 <뭉크>에서 작가가 지녔던 불안과 공포는 오히려 그로 하여금 걸작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뭉크의 예술이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삶과의 불화를 설명하려는 성찰에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뭉크의 대표작 <절규>는 자신의 심리를 표현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뭉크의 그림에는 죽음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 많다. 1895년과 1900년 사이에 그린 <병실에서의 죽음>나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삶의 춤> 등은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불안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뭉크는 죽음과 관련된 내적 불안을 그림을 통해 해소했다. 그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그림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게 해 준 유일한 도구였다. 그리고 그는 80세까지 장수했다.


뭉크, <불안(Anxiety)>, 1894

뭉크, <절규>, 1893



이상의 몇몇 작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성과 합리를 숭배해 온 서양사의 줄기 속에서도 비이성과 감성은 지속적으로 함께 존재해 왔고 예술에서도 광기를 형상화 하여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이 꾸준히 제작되어 왔다. 푸코의 지적처럼 이는 광기를 규정하는 지식은 계속해 달라져 왔지만 광기는 언제나 인간과 더불어 존재해 왔음을 나타낸다.

광기가 예술가의 창작행위를 고무시키는 원동력이라면 그 당위성을 찾는 일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정신적 외상으로서 트라우마를 끌어내고 파괴하기 위한 방식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 중 하나는 정상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사물의 형태를 해체시키고 파편화 시키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해체와 파괴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트라우마의 고통을 잊게 되고 반복과 표현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는 것이다. 형태를 해체시키는 행위와 성형의 과정에서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카타르시스는 비단 창조자의 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관객과 독자의 입장에서도 작가의 광기어린 작품의 제작행위에 대해 공조함으로서 카타르시스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현대미술에 나타난 잔혹성이나 광기의 이미지는 이렇듯 한 작가의 삶을 투영하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소통시키는 창조적 근원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VI. 광기와 예술의 반대항 : ‘작품의 부재로서의 광기’

푸코는 광기의 역사 1972년도판 후기에서 작품과 광기에 대한 관계를 언급했다. 작가의 글이나 그림에는 그들의 광기, 우울증, 망상 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광기가 작품으로 일단 형상화되면 광기는 더 이상 광기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가령 사드의 글이나 앞서 제시한 고야의 그림 <광인의 집>에 녹아있는 광기는 ‘작가의 이성에 의해 반성되고 대상화되어 이성적인 언어의 안에 편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기와 작품은 서로 반대항이라 결론을 내린다. 푸코는 이를 작품의 부재로서의 광기 (la folie, labsence doeuvre) 또는 ‘작품으로부터의 절대적 단절로서의 광기 (folie, absolue rupture deouvre)라 명명했다. 우리는 반 고흐의 경우에서 광기 자체가 표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정신병동에서 내정을 바라보며 그린 작품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작가의 광기가 녹아들어가 있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림을 통해 전달되는 작가의 안정된 시각행위와 표현 형식 그리고 균형잡힌 색채의 조화는 정신병동에 입원치료를 받고 있던 환자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심케 한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나타나는 괴상하고 특이한 형태들은 환영일 뿐이다. 그 이미지들은 허구적이고 가짜인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그려진 자의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사이렌(Siren)이나 사티로스(Saturos)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나 물고기 그리고 짐승의 신체 부분을 섞어서 종합한 것임이 분명하다. 완전히 새롭고 색다른 것이 아니며 거기에는 보편적이고 참되고 현존하는 어떤 것들이 전제되어 있다. 결국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작가들의 작품은 현실에 근거해 그것을 넘어선 세계를 보여준다. 현실이한 이성그 이성의 권력으로 채워진 세계를 말한다.

작품의 나태나 작품의 소멸을 위해 작업하는 광기는 잭슨 폴록에 의해 시도되었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절규가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의 소멸이며, 거기서부터 작품은 불가능해지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구절은 폴록의 작품을 설명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폴록의 액션페인팅은 광기의 언어적 표현이었으나 이 언어는 작품이 아니라 말이 접혀져 주름이 잡힌 모호한 ‘말의 주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언어는 말하는 주체나 말을 듣는 대상이 없이 완전히 혼자서 말하는 언어의 표상이었다.

광기의 역사를 쓰는 푸코의 의도가 바로 이러한 언어를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날것 그대로의 광기, 고전주의적 이성의 그물 망 속에 사로잡혀 마비되기 이전에 광기가 숨쉬고 있던 모습 그대로의 광기를 써야만 한다는 것이 푸코의 기획이었다” 그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인 정신분석의 언어를 쓰고 싶지 않고, 차라리 그 침묵의 고고학을 쓰고 싶다’고 토로했다. 이른바 그가 채택한 ‘고고학’이라는 개념은 광기의 침묵이 로고스 안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파토스 안에서 은유적으로 간접적으로 현재화될 뿐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방법적 장치였다. 침묵의 고고학에서 언급되는 고고학은 벌써 논리학이라는 점을 들추면서 데리다에 의해 비판 받았고 그리하여 두 사람의 유명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V. 중광의 행적과 광기

미국 버클리대학 동양학과 교수이자 비평가 랭카스터(Lewis R. Lancaster)가 1979년 그를 가리켜 미친 중(mad monk)이라 부르기 시작한 이래 중광의 행적에는 언제나 ‘광인’이라는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게 되었다. 중광은 스스로를 걸래라 불렀고 예술가로서 기행을 서슴치 않는 삶을 살다 갔다. 그가 작고한 지 10년을 앞두고, 생전에 남긴 작품을 모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우리는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 되새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시장을 채운 방대한 양의 작품들은 유화에서 묵화 그리고 판화와 도자를 비롯한 행위미술에 이르기 까지 장르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는 영화와 텔레비전 광고에도 출연하였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그의 기행을 담은 연극과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을 기록한 영상이나 서적들을 대할 때 중광에 대한 연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중광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연구에 빠트릴 수 없는 하나의 미학적 주제가 바로 이성의 곁에 숨쉬는 광기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주지하듯 중광은 미술을 전공한 화가가 아니었고 정규수업을 받지 않은 탓에 미술계의 아웃사이더로 취급을 받았다. 중광이 한국현대미술사에 입적 되지 못한 또다른 이유는 그의 작업이 일정한 틀로 체계화된 자신만의 고유한 조형 방식이 없다는 미술계의 평가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묵화, 유화, 드로잉, 판화, 벽화, 모래그림, 개념미술, 퍼포먼스 따위의 경계를 무작위로 넘나들며 무수한 작품을 배설하듯 남겼다. 조형 방식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이나 화법도 없었다. 무학에다 무명의 화법은 결손의 행적으로 치부되어 미술계는 그를 애써 외면했고 그가 사망한지 10여년을 망각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그를 배척한 것은 모더니즘 미술의 권력이었다. 형식과 이념 그리고 학벌과 파벌로 견고한 성벽을 구축했던 모더니즘 미술의 권력이 광기를 어둠 속으로 밀어넣었던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게 되었다.

2011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주최한 회고전 <걸래스님 중광- 만행>은 망각의 껍질을 깨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중광의 삶과 예술에 대한 가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시회 부대행사로 열린 학술세미나는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뜻밖에 많았음을 알려주었다. 오상순, 구상, 장욱진, 이외수 같은 동시대 예술가들이 그와 교류했으며, 김수용, 이두용 같은 영화감독이 그의 행적을 영화로 만들었고, 그의 역량은 국외로 퍼져 언론을 통해 칭송었다는 내용들이 소개되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그들 평소에 사모하던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생전에 중광과 친교를 나누었던 김형국 교수에 따르면 중광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수녀도 있고 출판사 회장도 있고 광대나 추기경도 있다’고 적고 있다. 후원자와 수집가와 화상들도 있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중광이 남긴 작품들은 수집이 되어왔으며 흩어져 있던 작품의 일부가 위의 전시회에 소개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의 행적이 한국 문학사 미술사 그리고 연극과 영화사의 얼개들과 긴밀하게 얽혀 있음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었다.

중광은 1935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고창률(高昌律). 그가 태어나 성장한 한반도의 시공간은 식민과 해방 그리고 항쟁과 전쟁으로 점철되던 이른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광란의 시대였다.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10세, 1948년 4·3 사건이 터졌을 때 그의 나이는 13세, 1950년 전쟁이 터지고 육지에서 피난민들이 제주로 밀려올 때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이 시기에 청소년으로 살았던 중광의 행적은 중학교 중퇴라는 학력과 해병대로 입대해 복무해 23세에 제대했고 1960년 여름 25세에 출가했다는 사실 외에 제대로 조사된 바 없다.(추가연구) 다만 그가 자신의 고향인 제주를 떠난 것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광은 출향의 사연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큰 배 마냥 떠있는 제주도가 하나의 큰 감옥처럼 생각되었고 이곳을 탈출하지 못하면 내 체내에 쳐박혀 있는 바람기가 나를 미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 나를 지금 떠돌게 하는 것은 바람의 생리 때문이거든. 또 하나 유년의 고행속에 잊을 수 없는 일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현장을 많이 목격한 것이야.”

이러한 중광의 고백은 그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람의 땅에서 나고 자라 바람처럼 사는 것을 소명처럼 여겼던 중광은 고향을 떠나 외지를 누비고 다녔다. 바람처럼 떠도는 삶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현장을 많이 목격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있었다. 살육의 기억이란 다름 아닌 1만 4천명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제주 4·3사건이었다. 중광은 이데올로기와 병기로 무장된 집권 권력의 광포와 그 추종세력들의 잔혹한 학살의 현장에 있었다. 유년기의 기억은 그의 내면에 숨겨진 본능으로서 욕망과 광기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근대적 국가건설을 위해 이성과 합리로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동시대의 기운이 하늘을 찌를 수록 그 광기와 광란의 기운은 섬의 전체에 스며들에 지배하고 있었다. 중광은 이러한 환경에서 세상과 만나게 되었다.

중광은 1960년 25세의 나이로 출가했으며 해인사에서 퇴짜를 맞은 후 1963년 6월 경남 양산 통도사에 구하스님 제자로 입문한 것으로 되어있다. 세월이 흐르고 출가한지 17년만인 1977년 대한불교 조계종단의 인정을 받아 중앙종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수도승으로서 선 수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화를 접하게 되었고 유명 화백들에게 사사했으며 같은 해 선서화 작품을 세간에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중광은 장욱진 화백과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어 종단으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하고 환속의 길을 걷게 된다. 김형국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80년 여름 전무후무한 전제정부가 사회정화를 빌미로 불교계에도 칼날을 들이댄다. 이른바 ‘땡중’들을 척결하는 와중에서 중광스님도 승적을 박탈 당한다”

파계로 불교 종단에서 자유의 몸이 된 중광은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981년 서울의 미화랑에서 <선화선시 작가 중광전>이라는 제하에 개인전을 열면서 미술계에 전격 데뷔하게 된다. 1980년대 초반에서 1990년대 초반의 시기 10여년 동안 중광은 수묵에서 유화 그리고 콜라주와 오브제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들을 사용하는 한편 도자에도 열성을 보여 항아리에서 동자상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생산했다. 그리고 화승으로서 <나는 걸래>등 선화선시 발표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성찰했다. “반은 미친듯 반은 성한듯 사는게다. 삼천대천세계는 산산히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거야! 나는 걸래.”

중광은 세상을 등지기 몇 해 전부터 백담사로 은거하기 시작했다. 정신건강의 기복이 보이자 시중에서 떠나 스스로 깊은 산중에 잠행한 것이다. 당시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5,6년의 세월이 지난 2000년 10월 백담사에서 그린 달마 주제의 선화들을 모아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전시회의 제명은 <괜히 왔다갔다>였고 다시 2년이 지난 후 그는 타계했다.


VI. 중광의 예술과 광기

중광은 1991년 미국의 CNN TV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화단에서 당한 설움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중광 그림은 첫째로 전통화를 공부한 전통화가가 아니라고 온갖 모략으로 매도하고, 정규 미술대학을 못 나왔다고 하여 인맥 학맥을 찾아다니는 무리들에게 지금까지도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중광 자신도 불평할 정도로 나누어 진 ‘비천한 면을 지닌 범속한 인간’이라는 평가와 ‘득도한 승려’라는 평가 사이에서 그의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시점은 극단을 달리고 있다. 이성과 광기 사이의 경계를 크게 나눌 수록 커지는 이러한 극단은 그에 대한 일화와 평문들 그리고 광기에 대해 연구한 출간물 및 영상자료들을 통해 실체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동시대의 한국 미술평단을 주도했던 평론가 이일은 1990년 가을에 개최한 <아펠-중광>전의 전시서문에서 그를 가리켜 한국화단의 ‘무법자’요 ‘망나니’ 혹은 ‘이단아’ 같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나아가 그를 ‘미술이라는 것을 짐짓 깔아뭉갤 줄 아는 화가’로 철저한 ‘반형식주의자’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반형식주의란 초심적 상태로 중광이 회화를 원초적 상태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반형식주의,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심정적으로 영원한 ‘초심자’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떠한 인습이나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발생적인 삶을 한껏 고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광스님이 지난번 개인전 때의 작품을 두고 ‘가갸거겨’라고 했을 때, 그것은 스스로 그림의 초심자로 자처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그러함으로써 그는 회화를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려 보내려고 한 것이다.”

중광은 제도화된 미술에 과감히 도전하고 우리나라 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의 이단아임을 스스로 자처했다. 이일이 지적했듯이 반형식주의 태도를 앞세워 비회화적 수법을 도입하면서 회화가 회화이기를 그치는 한계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밀고나갔다. 방법적으로 중광의 회화는 형상적인 세계에 머무르며 과격한 형태외곡과 강렬한 원색의 대비로 가장 원초적인 삶을 표출하는 마당으로 삼았다. 그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강한 개성의 소유자 였다. 이일은 비형식과 비회화를 통해 찾은 원초적인 중광 예술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로 남아있다고 마무리 하고 있다. 중광 예술의 뿌리는 광기에서 발견된다. 형식과 규범을 떠나 예술의 제로지점으로 복귀된 상태에서 만나는 광기다. 그의 광기는 이성이라는 냉혹한 언어를 무기로 삼아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서 자신의 건전성을 확인하려 했던 감금의 역사를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중광의 그림은 인습과 제도화된 규범을 넘어선 세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가갸거겨>의 세계이자 <1234>의 세계로 대변된다. 중광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무제>라는 제명도 주제와 격식이 없는 세계를 표상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말해 주는 요소다. <동심>이라는 제목 역시 원초적 세계를 뜻한다. 앞서 언급한 1991년 5월에 가진 CNN TV와의 인터뷰에서 중광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무아에서 행해지는 심상의 작업’이라 말한 바 있다.

중광연구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선 인간의 다양한 습성 즉 복잡계를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에 연구의 가치가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다양한 본성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전문적 연구가 요구된다. 푸코의 광기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연구에 좋은 근거를 제공한다. 한편 중광의 삶과 예술에서 발견되는 광기는 종교, 잔혹성, 재앙과 더불어 현대미술이 다루고 있는 주요한 담론의 주제이기 때문에 연구의 가치가 있다. 현대미술은 신비주의에 대해 문을 열어놓고 있다. 과거에 이성중심의 미술에서 벗어나 감성과 감각 그리고 병리적 현상으로서 조울과 우울증, 히스테리와 히포콘드리아 등의 세계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최근의 상황은 과거에 아웃사이더로 분류되었던 예술가들과 그 예술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중광은 기존의 상투적 규범과 관념을 깨트렸던 예술가였다. 그에 대한 연구는 현대미술에서 탈 장르와 탈 예술 등의 개념이 어떻게 환생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이 중광 연구가 필요한 또다른 이유다. (추가연구)


VII. 에필로그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파스칼)

푸코는 “본질적인 것은 광기를 구분하는 행위이다.”라고 지적하고 이성과 비이성의 거리를 확립시키는 단절의 지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것이 경고인 이유는 이 지점은 이성이 비이성으로부터 광기, 질병, 범죄라는 비이성의 진리를 박탈함으로써 비이성을 명백하게 정복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어느 한편의 승리를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거리, 양자간에 제정된 공간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만이 이성의 인간과 비이성의 인간이 서로 떨어져 작용해도 여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는 영역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광기와 비광기, 이성과 비이성이 서로를 위해 서로에 대해 존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18세기말 광기를 정신병으로 규정함으로서 양자사이의 대화는 명백히 단절되고 말았으나 21세기에 이르러 광기는 이성과 대비되는 능력이자 불가분적 관계를 유지하는 힘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의 구조와 본성을 지닌 것으로서 예술의 창작과 해석을 위한 핵심적 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20세기 후반을 살았던 중광의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이성의 눈과 비이성의 눈으로 대별된다. 그러나 광기의 개념이 전에 없이 예찬되고 있는 현실에서 중광의 노정에 대한 비평의 가능성은 거대한 산으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다. (2011.11) 출처: 2011년 인물미술사학회 추계학술대회 발제문, 예술의전당 아카데미홀, 2011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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