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강요배 / 화산섬에 인문과 예술의 옷을 입히다

김영호

거문오름과 용암동굴 일대가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이후 제주의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때 보다도 뜨겁다.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이 성산(城山)에 넘쳐나면서 제주도는 연간 관광객 수 800만명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제주를 제주이게 하는 것은 이제 ‘세계 7대 자연경관’의 자리를 넘보는 화산섬 제주의 자연적 지질학적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제주의 자연은 태고적부터 거기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제주의 자연이 국제기구와 단체의 차원에서 유난히 거론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구촌 구성원들의 관심사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연으로부터 파생된 환경, 생태, 생명으로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지구촌의 곳곳을 통째로 위협하는 재해가 전쟁과 테러 같은 인재(人災)의 차원을 넘어 자연재(自然災)로 모아지면서 생겨난 현상이기도 하다. 대재앙의 시대로 불리우는 오늘날 지진, 해일, 홍수, 화산, 전염병 그리고 허리케인과 같은 태풍의 위력 앞에서 인간들은 자연이 지닌 막대하고도 불가사이한 에너지를 감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자연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나아가 자연의 본성과 우주의 질서를 연구하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소망하게 된 것이다. 제주의 오름과 용암동굴을 찾는 관광객들의 심리 저변에는 이와 같이 자연에 대한 경외와 동질감을 가지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그런데 자연은 지구촌 어디에도 존재한다. 화산과 용암동굴 역시 제주만의 자연은 아니며, 제주의 자연을 구성하는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다와 그 위를 흐르는 바람 역시 제주가 독점하고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달은 신라의 불국사 석탑 너머에도 있었고, 미당 서정주도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라 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는 유독 제주의 바람과 제주의 돌을 힘주어 말하는 것일까?

최근 제주돌문화공원의 오백장군갤러리에서 열린 강요배의 개인전은 이 질문에 대한 명증한 답을 제시해 주었다. 결론부터 끌어와 말하자면 강요배의 풍천(風天)과 월해(月海)를 그린 그림은 제주자연을 인문과 정신의 문맥으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작가가 전시의 제명으로 택한 ‘풍화(風化)’는 작품 제작에 바쳐온 작가의 시간이자 동시에 그가 소재로 천착해 온 제주 자연의 세월을 나타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은 제주의 풍광에서 우리네 인간이 구하고 얻어야할 존재에 대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전해준다.

강요배의 이번 개인전은 귀덕리에 정주해 자연과 마주한 10년을 결산하는 전시다. 80호에서 1000호에 이르는 대작 24점과 50점의 드로잉을 선보였는데 출품작들은 작가의 창작의욕과 예술세계가 정점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강요배는 정치사회적 격변기인 1980년대에 서울에서 화가와 삽화가 그리고 교사로 활동했으며, 방황의 시간을 접고 제주로 귀향한 이후 비로소 화가로서 소명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거친 자연에 인고(忍苦)하는 사물을 통해 스스로 사는 방식을 터득해 왔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섬의 자연을 소재로 삼아 우주로 통하는 삶의 노정을 그림으로 표상하고 있다.

강요배가 그림에 채택한 소재는 작가의 뜰에서 스치는 초목(草木)이거나 그 하늘을 운행하는 월성(月星)들이며 바람과 빛에 의해 다양한 자태를 드러내는 산해(山海)의 주변풍경으로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화폭에 표상된 풍천월해의 자연은 어느덧 작가 특유의 신비스럽고 주술적이며 상징적인 어법들로 번안되어 새로운 차원의 감흥을 보는이들에게 선사한다.

강요배의 근작에는 그림자가 없다. 작가가 그려낸 팽나무나 눈밭위의 까마귀 그리고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에 이르는 대개의 작품에는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자의 부재는 볼륨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나의 광원이 연출해 내는 음영 효과를 없앰으로서 대상의 입체감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은 동양의 수묵화 전통과 형식논리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결코 낯선 방식이 아니다. 결국 강요배의 그림은 실경(實景)으로서 자연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사의(寫意)로 그것을 번안해 내려는 동양적 회화기법의 일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강요배의 그림은 동양적 조형형식에 서양철학의 인식론적 사유를 융합시키고 있다.

강요배의 작품의 의미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또 하나의 요인은 제목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대여 김춘수의 싯귀처럼 강요배의 제명은 의미부여의 형식으로서 작품의 내용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의 제명은 작가가 방문했거나 공부한 문헌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 많다. 가령 돈황의 초승달 모양의 모래톱인 ‘월아천(月牙泉)’이나 소동파의 시 ‘적벽부(赤壁賦)’ 그리고 주역의 63궤에 나오는 ‘풍천소축(風天小畜)’이나 ‘수화기제(水火旣濟)’ 등이 그것이다. 중국고전과 동양철학에 대한 탐구는 작가가 자연에 대한 관찰과 그 예술적 번안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절묘한 상징과 신비의 형식논리를 배태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독일의 미학자 헤겔은 일찍이 예술미가 자연미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예술을 통해 정신의 아우라를 획득하는 순간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강요배의 작품에 표상된 별빛의 천궁을 바라보며 장대한 감동을 받는 것은 그것이 나의 영혼을 진동시키고 정신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다랑쉬 오름 너머로 펼쳐진 유려한 자연의 선율과 그 속에서 수직으로 외치는 미물들의 움직임에서 생명을 읽어낼 수 있음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자연이 인문과 예술의 옷을 입을 때 의미가 증폭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강요배의 이번 전시가 제주미술사에 ‘하나의 사건’이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2011.11) - 출처: 제주문화예술재단 <삶과 문화> 2011년 겨울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