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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시지 / 빛과 바람, 실존적 삶의 메타포

김영호

I. 변시지는 바람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폭풍의 화가’는 화백의 그림이 거친 바람을 표현해 온데서 붙여진 수식어다. 작가의 인생 노정에 비유해 보면 바람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살아온 화백 자신의 유목적 삶에 대한 은유로도 다가온다. 최근 화백의 일대기를 다룬 어느 방송 제작팀은 그를 두고 ‘빛과 바람의 순례자’라는 명칭을 붙였다. 바람에다 빛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는데 그의 여정이 종교적 노정과 비견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실재로 그가 그린 거적을 두른 자화상은 절대를 찾아 광야를 떠도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화백의 예술은 특정 집단이 지켜내야 할 종교적 진리나 윤리적 규범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빛과 바람의 근원을 찾아 자신의 삶을 바쳐온 실존주의자였다. 예술의 대지를 유목인처럼 살아온 작가의 자유로운 삶 뒤에는 존재의 원초적 고독과 방랑의 세월이 머물고 있음은 그의 작품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도1) 그 고독과 방랑은 화백의 오늘을 있게 한 창조적 에너지였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관객 저마다에게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선사한다.
돌이켜 보면 빛과 바람은 화가 변시지에게 운명적인 단어였다. 유년시절 어린 몸을 성장시켰던 서귀포의 태양과 해풍뿐만 아니라 동경의 청년시절 그가 맺었던 광풍회(光風會)와의 인연도 그렇다. 자연의 빛을 추구하는 집단이라 하여 외광파로도 불렸던 이 단체는 유럽의 인상주의 미술을 수용한 일본 근대화단의 주류적 집단이었다. 대기와 빛에 대한 탐구는 변시지의 다가올 예술 노정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고 비원(秘苑)의 빛에 이어 제주의 풍광으로 정착되었다. 그가 다룬 주제는 장소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그의 예술에 일관되게 흐르는 조형의 원리는 빛과 바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화백의 예술은 외적 자연의 시각적 감흥 묘사에 머무르는 인상주의의 화법을 넘어서고 있다. 그는 빛과 바람의 표상을 통해 인간 존재를 지시하는 본질적 요소로서 기다림, 열중, 항해, 은둔, 고독, 방랑, 무소유 등의 의미들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그의 작품세계에는 낭만주의적 요소가 짙게 깔려 있으며(도2) 빛과 바람에서 찾은 실존적 삶의 메타포는 독자적인 변시지 양식을 실현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II. 변시지는 제주에서 태어나 오사카-도쿄-서울을 거쳐 다시 제주로 귀환하는 부메랑 같은 삶의 노정을 걸어왔다. 커다란 순환의 서클을 그리는 동안 체류 공간의 변화는 그대로 화풍의 변화과정과 정확히 일치된다. 그의 인생 노정은 일본의 ‘청년시기’, 서울의 ‘비원시기’ 그리고 제주의 ‘제주화 시기’로 삼등분되고 있다. 각각의 시기에 나타나는 화풍도 절충적 인상주의 경향의 인물화와 풍경, 세밀화기법의 비원풍경, 그리고 독자적으로 일구어낸 황토빛 선묘화로 명쾌하게 구분된다. 이러한 공간과 화풍의 일치는 작가의 예술이 자신이 속해있는 환경과 대응하며 전개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이때 환경이란 지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시대적 환경을 포함한 개념일 것이다. 환경 결정론은 우리 근현대미술사 서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법론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변시지의 경우 상황인식은 집단적 객관성을 따르며 주류적 화풍으로 이어지는 아카데미즘 미술과는 달리 주체적 체험과 개인적 취향에서 탄생된 표현주의적 속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특성은 문화적 유목주의를 체험한 한국의 근현대 화가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1926년 제주 남단의 미항 서귀포에서 태어난 변시지는 일찍이 부모를 따라 일본의 오사카로 건너간다.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도 자식들이 개화된 세상에서 배우고 활동하기를 바란 부친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가산을 정리하고 형제들과 여객선에 오른 때 그의 나이 6세였다. 변시지는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해 유화를 전공했으며 해방이 되던 1945년에 졸업했다. 그 해에 도쿄로 올라가 데라우치 만치로(寺內萬治郞)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화가수업을 시작하였다. 데라우치 만치로는 당시 예술원 회원이자 일본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로서 유럽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화풍에 인상파적 요소를 가미한 이른바 ‘절충적 인상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변시지는 일본화단의 주류였던 이 경향에 매료되었고 당대 일본 화단에 유행하던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재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동경의 미술단체 광풍회가 주최하는 1948년 공모전에서 나이 23세의 최연소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였다. 당시 변시지는 <베레모의 여인>과 <만도린을 가진 여자>등의 인물과 풍경 2점을 포함한 4점을 내놓았다. 수상의 영예는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정착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벌인지 3년만의 일이었다.
광풍회는 1912년에 창립해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단체로서 ‘근대 일본 양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단체에 소속된 회원들은 스승의 영향으로 외광파 풍의 밝은 화면을 이루는 경향을 집단화 하면서 일본 근대미술의 주류로 부상했다. 이 단체는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 청년작가들이 다수 참여했던 대표적 그룹의 하나였다. 자료를 보면 김환기, 김형근, 김종하, 김인승, 김원 등이 각각 입선했고 이인성 역시 출품해 특선을 수상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제국주의 시대의 광풍회가 당시 관학계 주류 단체로서 위상을 말해주며, 한국인으로서 최연소 최고상 수상은 큰 영예이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일본과의 교류가 전면적으로 중단된 상황인데다 제주의 4ㆍ3사건과 같은 불안한 국내정세에 파묻혀 그의 수상소식은 현해탄을 건너오지 못했다.
1957년 변시지의 삶에 또 한번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31세의 나이에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귀국하게된 것이다. 그를 초청한 서울대학교에서 교수생활 일년을 마치고 서라벌예술대학에 재직하게 되었고 동양화가인 이학숙을 만나 결혼도 하여 안정을 찾게 된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귀국한 그에게 전후의 서울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국전을 중심으로 짜여진 관학적 화풍과 인맥 중시의 화단구조는 제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한 그가 극복해야할 벽이었다. 한편으로 그에게는 식민국 예술가로서 떠안고 있었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회화적 표현의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귀국 후 주체적 미의식의 표현은 1960년대 초 개방된 비원에 반영되면서 전통적 정원풍경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몇 년 동안 그는 매일 같이 드나들던 비원시절 그는 외광파의 영향을 유지하면서도 세필을 사용한 섬세한 화법을 개발해 내었다. 대상에 대한 미시적 접근을 통해 대상을 포착하고 세필화로 옮겨내는 작업은 이전의 인상주의 화풍과는 다른 기법을 요구했으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세밀 풍경화였다.

III. 1975년 변시지는 15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다시 접고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일본에서의 체류시기를 포함하면 고향을 떠난 지 44년 만의 귀향이었다. 50세의 나이가 된 그는 제주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낯설 것도 없는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서 깊은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결실을 맺었다. 제주생활 2년 동안의 방황과 모색 끝에 황갈색 톤의 빛을 화면에 올린 것이다. 제주를 둘러싼 황토빛 대지와 바다 그리고 하늘은 그에게 새로울 것도 없는 자연이었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빛을 다시 발견했고 그에게 또 다른 예술 형식과 논리를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한옥의 장판지와 같은 황갈색 바탕이나 검정의 선묘 역시 어릴 적 서당에서 형들의 어깨너머 엿보았던 서체나 수묵화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초가집이며 돌담, 정주석, 소나무, 조랑말 그리고 까마귀와 같은 제주의 풍물들은 화면에 초대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작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하는 인자들로 거듭 태어났다.(도3)
변시지의 화면에 펼쳐진 선들은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바람을 안은 대지나 파도가 이는 바다를 표상하는 터치는 대체로 짧고 거칠며 때로는 태양이나 배와 같은 형상은 몇 개의 곡선으로 약화해 낸다. 어느 순간에는 하늘과 바다와 섬을 구분하던 수평선이나 지평선마저 사라지고 온 화면의 경계가 해체되어 단색의 평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자연의 빛과 바람이 화면의 색과 선으로 변주되어 자리 잡으면서 변시지의 제주화가 탄생된 것이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풍물들은 황갈색 빛과 검정색 선묘로 단순화된 이미지를 통해 은유와 환유의 언어로 전치되면서 대중의 의식 속으로 크게 전파되었다. 그의 작업은 점차 제주의 자연과 삶을 담아내는 차원으로 발전되었고 궁극적으로 지역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 세계를 드러내는 시각적 장치로 자리 잡게 된다.
빛과 바람의 자취를 통해 변시지가 파생해 내는 예술세계는 대략 고독, 은둔, 대화, 기다림, 방랑, 무소유 등의 주제어로 정리될 수 있다. 그의 화폭에서 이러한 개념들은 소년의 모습 또는 지팡이를 든 노인과 같은 인물상으로 표현된다. 자화상으로 보이는 인물은 황토 빛 바다와 흰 파도로 감싸인 검은 바위가 있는 장엄한 풍경 속에 고립되어있다. 홀로 낚시에 몰두해 있거나 초가의 마루바닥에 웅크려 앉아 있으며, 아니면 나무에 기대어 칩거중인 고독한 은둔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혼자가 아니다. 조랑말은 그의 분신처럼 언제나 곁에 있고 때로는 갈매기나 까마귀가 아니면 강아지나 바닷게와 대화를 나눈다. 인물이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은 이렇듯 미물과의 대화 장면으로 표현된다.(도4) 뿐만 아니라 펼쳐놓은 캔버스에 몰두해 있는 자신의 모습은 자신과 나누는 독백으로 여겨진다.
인물은 고정된 화면에 칩거하지만은 않는다. 때로 그는 집을 나서 바닷가로 산책도 하고 여행길에 오르기도 한다. 바다 멀리 떠있는 배는 은둔자의 고독감과 미지를 향한 기다림의 열정을 동시에 암시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딛고 선 그의 발걸음은 방랑자가 지닌 근원적 고독감의 기운으로 어깨가 무겁게 늘어져 있다. 이러한 고독감은 폭풍의 바다나 별들로 채워진 무한공간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일종의 숭고의 감정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거대한 대자연을 마주 대할 때 생기는 두려움을 동반한 쾌의 감정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와 하늘로 거칠게 비상하는 파도 그리고 화면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역동감을 만들어내는 까마귀의 무리는 예술의 이름으로 축성되면서 장대하고 장엄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주체할 수 없는 불안과 쾌감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한편 변시지의 화면은 무소유의 철학을 내비추어 준다. ‘가진 것이 없기에 숨길 것도 없는 제주인의 삶’을 드러내고 있음은 밭이나 언덕 그리고 초가집 내부 등 그의 간략하고 비어있는 삶의 공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도5)

IV. 변시지의 제주화는 인터넷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850점이 넘는 작품들을 25개의 소재별로 분류한 방대한 디지털 갤러리는 그의 예술혼의 실체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소년, 기다림, 검은 바다, 황소, 해녀, 기쁨, 대화, 열광, 소나무, 낚시질, 귀가, 산, 정오, 언덕, 항해, 노인과 조랑말, 까마귀, 바다, 은둔, 자화상, 고독, 산책, 유럽여행, 방랑자, 그리고 바람에 이르는 주제들은 장대한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운율과 역동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고졸함과 단순한 선묘의 사이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우수의 색채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수백점의 작품들은 변시지의 정신세계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그가 집중했던 예술창작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최근 변시지의 대작 2점이 워싱턴 소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한국관이 개관되면서 외국에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외국의 관객들에게 소개되면서 확인된 것은 그의 작품이 제주섬을 그린 풍경화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운명에 대한 길고도 근원적인 이야기를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을 얻게 된 것이다. 빛과 바람이 만들어낸 그의 화법은 세계에 존재하는 어느 유파나 개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개성적인 것이었지만 황토빛 제주화는 작가의 차원을 넘어 세계인 모두에게 공감을 주는 조형언어가 되었다.


도1 변시지, 파도, 1996, 캔버스에 유채, 60호
도2 변시지, 폭풍의 바다, 1990, 캔버스에 유채, 50호
도3 변시지, 생존, 1991, 캔버스에 유채, 6호
도4 변시지, 대화, 1996, 캔버스에 유채, 4호
도5 변시지, 난무, 1997, 캔버스에 유채, 100호


변시지는 1926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나 6세 때 가족과 함께 도일, 오사카미술학원에서 양화를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동경에서 체류하면서 광풍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최연소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에 주목받게 된다. 1957년에 서울로 귀국해 서울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비원을 소재로한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였다. 1975년 다시 제주로 귀향해 드디어 작가 고유의 색과 빛을 지닌 ‘제주화’를 탄생시켰다. 현재 서귀포에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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