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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불 한인미술가 약사

김영호


I. 프롤로그

파리는 미술의 메카로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그 여명은 아직도 도시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들과 미술관의 명작들 속에 스며있다. 프랑스가 이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로 무장된 뉴욕화파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중심적인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비단 정부차원의 문화예술 지원정책이나 미술문화에 자긍심을 가진 자국의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꿈을 키우며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와 같은 외국인 예술가 집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교차로로서 소통의 기운이 마주치는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일찍이 세계미술의 흐름을 흡수하고 국내 화단에 기여를 했던 수많은 한인작가들의 성과를 되돌아보는 것은 의의가 있다. 근대미술의 태동과 전개가 서구사조의 유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한국화단의 특수성에 미루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계속의 한국작가들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 과제이기도 하다. 과연 프랑스 거주의 한인작가들이 남긴 발자취는 현지화단이나 국내화단과 연계시켜 볼 때 괄목할 만한 것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오랜 역사를 가진 재불 한인미술가의 활동사항을 시대별로 구분해 살펴보고 그의 성과와 전망에 대해 진단해 보기로 한다.

다양한 특성을 지닌 재불 한인작가들의 발자취를 정리할 때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특정한 기준을 정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우선 대상은 유학생이나 기성작가로서 프랑스에 체류했거나 현재까지 체류하고 있는 미술가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1980년대 이후 유학생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유학 자체가 곧 예술가의 보증서가 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재불 한인작가의 범위를 프랑스에서 삼년이상 체류했고 현지의 비중 있는 살롱전이나 화랑의 초대개인전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로 제한하고자 한다. 또한 연대의 상한선도 1925년에서 필자가 파리에 체류하던 1995년까지로 정할 것이다. 물론 이들이 재불 한인작가들의 역사를 대표하는 전부라 주장할 수는 없으며 10년간의 파리 유학생활 중 접하게 되었던 필자의 개인적 경험과 자료를 근거로 서술해 나가겠다.


II. 최초의 한인 미술가들 : 1925년에서 1950년대

한국미술사상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는 1925년 파리에 도착한 이종우를 들고 있다. 이와 함께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1922년 독일로 건너간 후 베를린 예술학교에서 유학하고 1937년 파리에 도착한 배운성도 재불 한인작가들의 기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일제 강점기라는 당시의 국내 상황과 전쟁 등을 이유로 그 활동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도불의 역사는 해방과 전쟁을 모두 치룬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작가들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고 이는 이종우가 파리에 첫발을 디딘지 30여년만의 일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화가들에 의한 한불간의 정당한 문화교류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손동진, 남관, 김흥수, 김환기, 이성자, 등이 도불한 1954-56년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서 한인 미술가들의 정착은 재불 한인 교민사의 시작과 시기적으로 일치되고 있다. 이곳의 한인사회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건너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전쟁 직전인 1950년에 입국, 파리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서품을 받은 이영식 신부에 의해 “파리한인공동체”가 1954년 교구청의 승인아래 발족되면서 최초의 한인단체가 구성된 것이다. 파리한인공동체의 활동은 주로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지만 사업의 구체적 내용은 당시의 어려운 국내사정에 비추어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에 그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후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리 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될 이영식 신부의 노력으로 1955년 6월 “한국문화원조 프랑스위원회(Comité français daide culturelle à la Corée)”가 설립되었고, 교수였던 올리비에 라꽁브(Olivier Lacomb)를 위원장으로 해서 파리를 비롯한 리용, 렌느 등의 대주교, 주교들뿐만 아니라 학자와 각계 실업가들이 참여하였다. 위원회의 설립목적은 한국인 가톨릭 인재양성과 한국 전통문화의 전파에 두고 있고 추진사업으로는 장학금 지급과 학문활동 보조 그리고 도서출판 지원 등이었다.




전쟁의 여파로 당시 유학생들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극도의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었고 이같은 환경 속에 파리한인공동체의 주임신부는 유학생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이영식 신부는 파리 6구 생-쟝 밥티스트(St-Jean Baptiste)가의 한 성당 종탑아래에 위치한 세칸방의 사제관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1955년 도불했던 남관이 집을 구하지 못해 사제관에서 6개월간 거처하기도 했고 같은 해에 유학 온 김흥수도 이 사제관에서 한동안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초기의 한인화가들은 이렇듯 개인적 삶의 어려움과 전후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술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현대미술의 태동기를 1950년대 후반으로 잡고 있는 우리로서 전후시기의 파리에서 전개되던 앵포르멜 미술의 경향과 어떤 연계성을 갖고 있는지 이들 재불 한인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의 한인작가들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보면 1956년 파리에 정착한 김환기가 파리의 베네지(Benegi)화랑(1956)과 파리 랭스떼뛰뜨(Linstitut de Paris)화랑(1958)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김흥수가 라라 벵시(Leonard de Vinci)화랑(1957)에서 그리고 이성자가 기요메화랑(1956)에 이어 라라 벵시화랑(1958)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III. 전위의 열기속의 파리 화단 : 1960년대

1960년대 프랑스에서 전개되던 미술의 새로운 경향은 한마디로 추상미술에 대한 극복 의지의 결과로 대두된 새로운 형상주의 미술과 매체를 둘러싼 실험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파리의 경우 이른바 1950년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던 서정적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사이에 벌어진 개념적 논쟁은 일련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또 다른 예술을 모색케 하였던 것이다.




새로운 물결의 하나는 이브 클랭(Yves Klein), 아르망(Arman), 세자르(César), 장 팅겔리(Jean Tinguely) 그리고 레이몽 앵즈(Raymond Hains)등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서 주도된다. 누보레알리스트(Nouveau Réalistes)로 알려진 그들은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의 이론적 지원에 힘입어 오브제를 표현매제로 수용함으로서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이를 근거로 대량생산과 소비의 전후 산업사화의 현실을 둘러싼 제 문제에 심취해 있었으며 현실에서 멀어진 미술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리기를 원했다. 한편, 새로운 시각탐구를 내세우면서 발족한 그룹 그라브(G.R.A.V)는 예술작품의 개념을 확대시킨 또 하나의 전위 단체였다. 르 파크(Julio Le Parc), 스테인(Joel Stein), 모를레(François Morellet) 그리고 바자렐리의 아들인 이바랄(Jean-Pierre Yvaral)등을 중심으로 결속된 이 그룹은 유리, 합성수지, 철판, 네온, 모터등의 새로운 재료들과 스크린에 투사된 레이저 광선의 이미지등을 작품에 사용하여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였다. 그라브의 작가들은 그후 움직임을 예술적 근거로 내세우는 키네틱 아트(Art cinétique)와 연계성을 가지며 옵 아트(Op Art)의 생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오브제와 새로운 형상을 기조로한 이들 전위 세력의 중심지는 전쟁 중 또는 전쟁직후에 생겨난 살롱들인 “살롱 드 메(Salon de Mai, 1943)”, “살롱 드 라 죤 뼁트르(Salon de la Jeune Peintre, 1949)”와 “살롱 꽁빠레죵(Salon Comparaison, 1959)” 그리고 당시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에 의해 출범된 “파리비엔날레(Biennale de Paris, 1959)” 였다. 이들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대담한 전위적 작품들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며 끝없는 스캔달을 불러 일으켰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이듯 아직도 보수적 성향이 강한 대부분의 파리 화상들과 수집가들은 이같은 전위운동에 무관심 하였고 미래의 주역들에 대한 시선은 냉담하기만 했지만 당시 개혁의 분위기는 이미 특정 예술가들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파리의 화단분위기 속에서 1960년대 파리에 거주하던 한인 미술가들이 선택한 길은 당시 화단의 실험적 조형방식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히려 한국의 미술가들과 프랑스 화단의 본격적인 만남이 1950년대 중후반에 펼쳐졌던 추상미술의 열기속에서 이루어졌다. 1960년대의 파리화단의 탈 추상형식을 둘러싼 전위성을 수용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파리를 처음으로 찾은 이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에콜 드 파리로 부터 숨가쁘게 변전되었던 추상미술은 그자체로도 하나의 전위적 미술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리의 실험적 화단풍토가 이곳에 찾아든 이방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지라도 자신의 예술을 위한 새로운 모색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 한국화단의 실험적 미술은 국제적 미술운동으로서 프랑스의 앵포르멜(Informel) 추상의 영향아래 놓여 있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현대미술의 태동은 파리화단과 밀착되어 있고 그 선각자들의 대부분은 파리의 미술경향에 민감했던 국내외의 젊은 미술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을 우리의 현대미술의 태동기로 보고 앵포르멜 미술을 그 중심 원리로 받아드리고 있는데 반해, 구미의 경우 1950년대 후반이 현대미술의 태동기라는 점은 일치되고 있지만 그 형식과 논리는 앵포르멜 미술에 대한 극복과 다양한 실험 의지와 함께 시작된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를 시점으로 해외전에 참가했던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당시의 파리 화단에 대한 한국 미술가들의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상기 국제전에는 1982년 제12회까지 11번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품을 보내게 되는데, 최초의 선발작가들이었던 김창렬, 정창섭, 조용익, 박서보, 윤명로, 김봉태, 최기원등은 그후 이어지는 정상화, 정영렬, 하종현, 최명영, 박석원, 최만린, 서승원등과 함께 1960년대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로서 소개되었다. 이들의 작품이 당시 전위적 성향의 예술을 지향하는 파리비엔날레에 어떠한 반응을 일으켰는지는 알수 없으나 당시의 비엔날레 분위기와 출품된 작품의 형식에 미루어 앵포르멜 회화와 미니멀리즘(Minimalisme)에 근거한 모노크롬(Monochrome) 추상미술은 이미 파리의 대중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던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70년대에 한국작가들의 해외진출은 프랑스가 아닌 일본을 중심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점이 이채롭다.

결국 파리에서의 국제전을 통한 한인작가들의 본격적인 진출은 국내거주의 현역작가들에 의해 첫발을 내 디뎠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프랑스 국내에 거주하면서 현지에서 개인적으로 활동을 했던 작가들은 그 숫자나 성과로 보아 극히 미미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를 살았던 유학생들의 경우 아직도 전위와 보수에 모두 무관한 제3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 이었다. 국내에서 열광했던 외래문화에 대한 환상도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집착도 체험을 통해 극복한 이들에게는 예술과 삶 사이에 설정된 개체적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기를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1960년대의 활동상황을 보면 이성자가 전기했듯이 기요메화랑(1956)과 라라 벵시화랑(1958)을 위시로 하여 1960년대에 파리와 칸느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67년에 도불한 정상화가 파리의 쟝 가미옹(Jean Gamion)화랑(1968)에서 그리고 남관이 프랑스포지숑(1964)과 우스똥 브라운(1965)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한편, 1961년에 도불해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벽화수업을 하고 프랑스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방혜자는 앵포르멜의 미학에 근사한 작업을 하게 되는데 파리의 우스똥 브라운화랑(1967)과 자크 마쏠(Jacques Massol)화랑(1980)을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였다.


Ⅳ. 고유성을 위한 실험과 모색의 시대 : 1970년대

1970년대의 한인작가들은 제경향의 추상미술에 여전히 그들의 관심을 쏟고 있었다. 1968년에 도불해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대학(파리1대학)에서 수학했고 1978년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정병관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이휘세, 양승권, 오천룡, 김순기, 김희경, 김인중, 이봉렬, 강정완, 오경환, 권영우, 하인두등이 개인전 또는 그룹전등을 통해 대부분 추상경향의 작품을 제작하며 전시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성완경도 파리 국립 장식미술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기도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파리한인공동체가 발간한 역사서에 따르면 1970년 초에 파리의 한인 숫자는 약 350명이었고, 종교단체로서 가톨릭은 여전히 신학생들과 더불어 재불 한인사회의 구심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리카톨릭대(Institut Catholique de Paris)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서품을 받은 김인중(1940-)신부의 화단 활동은 예향 파리가 지닌 멋을 더해주고 있다. 국내 미술대학에서 이미 그림을 시작했던 그는 1970년 스위스 포름(Forum)화랑에서의 전시회를 서두로 파리 마쏠(Massol)화랑(1973, 1977)과 쟝 푸르니에(Jean Fournier)화랑(1983)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추상표현적 경향의 작품세계를 개척해 나간다.

김기린도 1970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대표적인 한인작가이다. 그는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디종과 파리에서 미술사와 그림을 배우고 1970년대부터 이미 파리의 의욕적인 화랑인 뒤랑 데세르(Durand Dessert)에서 지속적으로 개인전을 개최(1976, 1978, 1984)하여 한인화가들의 파리진출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기린이 60년대 초 파리 화단에 혁신을 일으켰던 이브 클라인의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형식과 내용에 있어 양자간의 일치는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70년대에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모노크롬 회화를 주도했던 이브 클라인은 과거의 조형적 딜레마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찾아 나섰던 작가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누보레알리즘의 창립에 주역이기도 했었던 그는 선과 윤곽, 형태, 구도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단색의 색채로 모든것을 환원시켜 구상과 추상을 동시에 넘어선 비물질의 세계로 나아가려 했다. 결국 그가 도달했던 세계는 물질과 비물질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한 새로운 현실의 세계였으며 회화작품을 일종의 정신적인 유동체로 올려 놓았다.

상기한 작가들 외에도 1969년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도불, 뚤루즈와 파리에서 벽화와 회화를 전공한 이자경은 70년대의 모색기를 거쳐 80년대부터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고, 1971년 역시 프랑스 국립 장학생으로 니스에서 수학하고 남불에서 작품활동을 벌여온 김순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정립한 경우다. 니스(Nice) 국립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이래 마르세이유(Marseille) 미술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녀는 작품제작에 기호학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독특한 예술세계를 일구어 나간다.

김창열은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1969년 이후 파리에 정착, 1970년대의 한인 작가군을 형성하고 독자적인 실험과 모색의 기운을 대외적으로 인식시키는데 공헌을 한 작가이다.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최초의 한국작가로 참가하였고 유럽과 아메리카를 무대로 폭넒게 활동해 왔으나 이 시기에 정작 자신이 체류하고 있는 파리에서는 화랑을 통한 개인전은 없고 주로 살롱 드 메(Salon de Mai; 1972-1976), 레알리떼 누벨(Réalités Nouvelles; 1972-1973) 그리고 그랑 에 죤 도주르드위(Grands et Jeunes daujourdhui; 1978-1980)등의 프랑스 살롱전과 피악으로 불리우는 국제현대미술견본시(FIAC; 1977, 1979, 1981, 1985)를 통해 소개되었다.

1978년에 도불한 권영우는 파리정착 이후 작업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미 한국에서부터 그는 화선지라는 매체에 대한 연구로 일관된 작업을 하던 특이한 화가였다. 프랑스에 건너가기 이전에 이미 쟈크 마솔화랑(1976)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나 1978년 파리 국제근대미술의 만남(Rencontre des Arts Modernes de Paris)전에 김환기, 박서보, 심문섭등과 출품한 이후 그의 활동은 주로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개최되는 레알리떼 누벨(1980), 살롱 드 메(1980, 1981), 그랑 에 죤 도주르드위(1981)등의 살롱전을 통해 벌였다.

1970년대 한국미술에 대해 비평할 때 예외 없이 거론되는 부분이 독자성에 관한 진단이다. 특히 외래사조의 수용과정에서 야기되는 창조와 모방에 대한 시비로 그 촛점이 모아지고 있다. 이른바 전후 한국예술가들에 나타난 서구의 미학과 형식의 수용 그리고 ‘전위라는 미명아래’ 이루어졌던 모방이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디자인등 미술전반에 나타난 문제점들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글의 성격상 본고에서는 유보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국현대미술의 발현기라 하는 1950년대 후반이나 1960년대의 앙포르멜 또는 1970년대의 미니멀리즘 미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1990년대를 사는 오늘날의 문화구조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때 이에 대한 밀도있는 연구가 절실한 것이다.


V. 급증한 한국의 유학생 : 1980년대

1980년대는 한국의 유학생과 미술가들이 급격한 증가를 보였던 시기였다. 이는 정부의 해외 여행 자유화 정책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소극적으로 진행되오던 문화정책을 강화시켜 국제 경쟁시대에 부합하고자 하는 국내분위기에 따른 자연스럽고 당연한 추세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유학생들과 관련하여 파리에 자리잡은 미술학교는 일명 ‘보자르’라 불리우는 “에콜 나쇼날 쉬페리에 데 보자르(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 de Paris;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와 “에콜 나쇼날 쉬페리에 데 자르 데코라티브(E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 de Paris;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를 들 수 있다. 민영으로는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와 “아틀리에 17(Atelier 17)”등이 있으나 이들은 정규과정이 아닌 출입에 시기 제한이 없는 작업실들이었다.



화가수업을 받는 학생의 수가 많아지면서 얻게 된 이 시기의 성과는 최초의 미술인 그룹으로서 1984년 파리청년작가회가 결성이 된 것을 들 수 있다. 주로 파리의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매년 정기전을 통해 그들의 예술세계를 고취시키는데 기여했다. 창립 이래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을 보면 권영호, 안종대, 조택호, 백진, 변창건, 홍승혜, 차명혜, 조용신, 장경염, 정충일, 김중식, 김남용, 김선태, 이용순, 박승순, 윤봉환 등이 있다. 1980년대 이들의 작품 경향은 일관된 하나의 형식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캔버스회화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또한 이들의 전시활동은 재불 한인문화원 전시실을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대외적 영향력은 아직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집단적인 작품 발표를 통해 젊은 작가들의 결속된 힘을 보이려 했고 이를 통해 각개의 실험성을 비교 진단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물론 파리 청년작가회가 결성되기 이전에도 한인미술가들의 집단적 전시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묵, 김창열, 정상화, 남관, 김종하, 이항성 등이 참여했던 한국 재불작가전에 대한 구설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비정기적인 전시활동과 집단적 결속력의 미비로 인해 그 존재의의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었고 1982년의 전시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에 반해 파리청년작가회는 조직적인 집단으로 매년 정기전을 개최하고 있고 그룹을 거쳐간 회원들이 화단에서 점차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들에 대한 국내 화랑에서의 초대전도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1980년대의 재불작가중에 진유영은 그룹이나 집단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작품제작을 하고 있는데 1981년 마르세이유의 아타노르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가진 이래 파리와 뉴욕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현지의 평론가들의 관심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류화가이다. 또한 백수남도 1989년 몬테카를로 국제현대미술대상전에서 수상을 계기로 현지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화가라 할 수 있다.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살펴볼 때 재불 한인작가들의 특수성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회화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조각이나 판화를 정식으로 연구하는 작가들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는 우선 작품제작 공간과 시설 그리고 경제적 뒷바침이 따라야 되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조각은 대부분이 이태리로 그리고 판화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오랫동안의 국내 분위기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판화공방이나 파리 국립미술학교와 파리장식미술학교에 조각과와 판화과가 설치되 있기는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파리내의 대학에서 이들 분야를 전공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작가가 거의 없는 것은 다양한 예술의 전개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된다. 파리는 로댕(Auguste Rodin)과 부르델(Antoine Bourdelle)의 고장이며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와 브랑쿠지(Constantin Brancusi)등 각국에서 모여든 젊은 조각가들의 작품들이 아직도 거리에 살아 숨쉬는 도시가 아닌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틀어 1973년에 도불해서 장식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정보원과 1983년에 도불해서 5년간 파리에 체류하면서 동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한 곽남신이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VI. 국제화단속의 한국미술가 : 1990년대

1990년대는 유학을 위해 도불한 후 파리에서 꾸준히 활동해 오던 한인 작가들이 화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시기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재불작가 전체수에 비해서는 아직도 미미한 숫자이지만 예전에 비해 현지의 화랑과 전속 내지는 부분적인 계약과 적극적인 지원속에서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것은 매우 반가운 현상이다. 이는 초기의 파리체류기간의 문화적 갈등의 단계를 벗어나 고유한 삶과 예술의 틀을 지니기 시작한 세대라는 점에서 당연한 추세로 보인다. 생각나는데로 적어본다면 최현수가 발렉스(Elisabeth Valleix), 유선태가 라비니으-바스티유(Lavigne-Bastille), 황호섭이 푸르니에(Jean Founier), 안종대가 도르프만(Patricia Dorfmann), 조택호가 레스코(Pierre Lescot), 고병진이 카지니(Philippe Casini)등 파리의 의욕적인 화랑들과 전속계약을 맺고 전시활동을 벌이게 된다. 비평적 측면에서 살펴볼 때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 파리화단이 동양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주로 이국적 정서를 충족시키면서 유입했던 것과는 달리 현대 인류가 공통적으로 겪고있는 공동의 문제들을 동등한 입장에서 연구하는 노력이 현지 화상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다시 말하면 이국적인 취향에서가 아닌 공동의 관심사를 두고 함께 풀어나가는 동료로서 한국의 작가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파리 거주 한인작가들의 집단적 작업공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유학생을 포함한 파리거주 한인작가들이 어려움은 독립된 작업공간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이러한 상황에서 파리와 근교에 거주하고 있는 일련의 화가들이 집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물색하게 되었고 1992년에 이르러서 이들의 꿈은 실현되었다. 파리의 남서쪽 세느강변에 위치한 길이 150미터에 폭 33미터 그리고 높이가 12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골구조물을 장기임대하게 된 것이었다. 과거에 탱크 등의 대형 병기 수리를 위해 사용되었던 공간을 50개로 분할해 개인 아틀리에로 내부변경을 함으로서 새로운 파리의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집단의 이름은 “아르스날(ARTsenal)”이라 하고 한국어로는 “소나무”라 알려진 단체에서 운영했는데 한국 작가에게 배당된 공간은 전체 인원의 반수인 25명 안팎이다. 앞서 언급한 파리청년작가들 중 몇몇을 포함해 권순철, 정재규, 장승택, 곽수영, 김성태, 최예희등이 회원으로 있고 이들은 비디오, 설치 등의 조형방법과 재료사용에 있어 사진, 밀납, 유리, 합성수지등을 이용한 다양한 실험적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소나무 그룹은 특정의 이념을 내세우기 위해 결속된 단체라기보다 제작공간의 획득을 위한 예술가들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소나무 그룹은 임대기간이 만료되어 타 지역으로 분산된 2002년 까지 과반수에 해당하는 동료 외국인 작가들과 공동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전시도록을 발간하는 등 나름의 밀도 있는 집단적 활동을 통해 한불의 문화교류에도 괄목할만한 기여를 하였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현지 체류작가들의 활동범위가 이전에 비해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한인작가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다국적으로 작업실을 정해 일정기간 동안 주로 뉴욕과 파리 그리고 한국을 왕래하면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중 최현수와 황호섭 그리고 안성금등은 이우환, 백남준, 김창렬등의 선배들 뒤를 이어 국제적으로 그 활동영역을 확산시켰다. 특히 최현수는 파리뿐만 아니라 뉴욕의 팀 엔와이이(Tim NYE) 갤러리에서도 전속으로 후원을 받았으며, 1986년 이래 파리에 주로 정착해 활동하고 있는 안성금은 1988년 베를린의 카를로스 훌쉬(Carlos Hulsch)화랑을 통해 유럽화단에 선보인 뒤 스페인, 이태리와 일본 그리고 한국등에 단기적으로 체제하면서 부지런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재불 한인작가들은 초기 유학생들의 구축한 삶과 예술의 행적을 거울삼아 체류기간동안 겪게 될 문화적 혼란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선배들의 시행착오에서 쌓아올린 또 다른 예술의 필연성에 대한 자각은 그들의 작업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현지의 평론가들과 화상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활동하였고 언론에 보도되는 사례도 점차 늘게 되었다.


VII. 에필로그

재불 한인작가들이 해외생활을 통해 얻은 성과는 작가에 따라 또는 비평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정리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짚어볼 때 1970년대 까지 한인작가들은 발전적이고 지적사유과정을 기조로 전개되었던 서구의 전위적 미술운동들에 근본적으로 동화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집단적 개성을 강조하는 미술경향과도 다른 영역에 머무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동서간의 문화적 교류가 양적으로 활발해지고 정보교환의 급속한 증가 속에서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파리의 무대에서 자신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자신의 예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88서울국제올림픽은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땅이 바뀌면 삶의 형식도 바뀌게 마련이다. 예술이 변화하는 삶을 반영하는 활동이라면 우리는 재불 한인작가들의 작품에서 애환과 고독뿐만이 아니라 지성과 전위를 찾아 방황하는 지성의 향기와 그리고 비상의 충동을 담은 욕망의 꿈틀거림을 낱낱이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체험의 확산이 이국땅에서 활약하는 한인 예술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일차적인 성과이며, 1990년대 이후 양국의 문화교류가 급속한 물결을 타게 된 배경에는 문화사절의 기능을 담당했던 한인예술가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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