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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없는 미술, 어디로 가나

김영호

우리나라 미술비평이 실종되었다는 말이 나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대중들은 더 이상 비평에 기대지 않고, 신문은 평론가의 글을 싣는데 인색하며 ‘문화예술위원회’와 같은 공공기관의 미술지원 사업에서조차 평론부문을 소외시키고 있다.

특이한 것은 미술비평의 실종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미술현상은 꾸준한 양적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사동이 중심축이 된 전시회는 끝없이 확산되고 이를 수용하는 미술관, 화랑, 대안공간 등의 전시공간은 늘고 있으며 블록버스터형 전시회와 비엔날레 같은 대형 미술제의 수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결국 오늘의 화단은 외적 풍요로움 속에서 동시대의 미학적 기준과 가치를 진단하는 비평 기능이 실종된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이상 징후는 비단 미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학이나 영화, 그리고 음악 등 문화현상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비평의 실종은 1990년대 중반 이후에 본격화된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거세되는 인문학적 기준·가치-

우선 디지털 미디어가 생활의 중심에 똬리를 튼 사회에서 미술 애호가들이 원하는 것은 인문학적 기준이나 가치가 아니라 기호를 자극하는 ‘정보’ 자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네이버’나 ‘구글’과 같은 정보 검색엔진을 신봉하며 컴퓨터 앞에서 중독 증세를 보인다.

비평실종 원인의 두번째는 과거 비평가의 역할이 전시기획자, 신문기자, 웹사이트 마니아들로 대체되는 현상에서 발견된다. 재편되는 미술환경의 주역으로서 부상한 이들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에 이르기 까지 정보생산의 주체이자 전파자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 문화의 세기라는 화두가 국가정책의 차원으로 쏠리면서 정부기관이 미술사와 비평가들을 제도의 울타리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판도 주목할 만하다. 90년대 이전의 미술이론가들이 독립적 비평안을 지닌 주체로 활동했던 것과는 달리 최근 잘 나가는 이론가들은 관료나 연구원 신분으로 기관의 정책보고서나 연구용역을 담당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궁극적으로 미술비평의 실종은 21세기에 들어 심화되는 인문학의 위기와 맥을 같이 한다. 이른바 중심의 상실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구촌을 덮는 보편적 정신현상으로 대두되면서 예술 역시 해체적 기류에 감염되어 무비판적 수용현상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평론가들에게 주어졌던 비평과 분석의 지면이 사라지면서 대두되는 문제란 무엇인가. 이른바 작품 해석과 비판을 위한 기준과 가치의 상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작품이 품고 있는 문화사회학적 의미를 분별해내는 방법론과 그 개발 의지의 퇴화가 그것이다.

미술해석에 있어 비판적 시각이 결여된 눈은 이미 죽은자의 눈이다. 이미지 망에 숨겨있는 의미의 체계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혼성, 다양, 잡종이라는 용어가 피상적 구호를 넘어 정보(fact)로 구체화되고 안방을 장악하고 있는 미디어 시대의 현실은 상대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미술비평의 분석적 스펙트럼을 요구하고 있다.

-작품의 의미 분별의지 퇴화-

비평의 눈이 실종된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의 사회와 다르지 않다. 비평에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한국사회의 성격에 대한 문화적 대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텍스트화된 정보만으로 창조적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더욱이 그 텍스트가 미디어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이끄는 권력으로 대두되는 현실은 우리에게 비평적 시각의 부활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예술에 거는 희망은 그것이 비평적 예술로 남아 있을 때 유지된다. 대중과 언론, 그리고 ‘문화예술위원회’와 같은 공공기관이 모두 비평의 활성화에 애정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06. 3. 2 경향신문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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