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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철론 - 전자정원의 이중적 판타지아 : 성(性)과 성(聖)

김영호

전통적 조소예술의 영역에서 출발하여 뉴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활동해온 심영철의 예술영역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빗(Comb)의 형상을 석재와 목재로 다양하게 변주했던 <빗의 단계적 표상> 시리즈를 필두로 시작된 20여 년간의 발자취를 보면 그의 예술은 네온과 홀로그램을 포함한 설치작업과 비디오 영상이미지에서 퍼포먼스에 이르는 매체와 기법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로 실내공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던 <전자정원> 시리즈에서 도심과 자연공간으로 확대된 <모뉴멘탈 가든> 시리즈, 그리고 지하철 공간에 이르기까지 설치장소도 정해진 한계가 없어 보인다.
심영철의 작업에 나타나는 매체나 표현기법 그리고 설치장소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점은 그의 예술세계에 접속하기 위한 키워드는 종교적 의미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의미란 성령, 순례자, 존재, 섭리, 아담과 이브 등의 제명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심영철의 작품세계를 진단하기 위한 하나의 잣대가 된다. 이 글은 작가의 작품 시리즈 중에 <전자정원>과 <모뉴멘탈 가든>에 나타나는 종교적 의미의 다중적 속성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이다.


우선 1993년부터 시작된 <전자정원> 시리즈는 종교적 메시지를 테크놀로지와 연계시킴으로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작업이다. 현대미술의 문맥에서 볼 때 그것은 동시대의 다양한 조형기법과 매체들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주제가 지니는 서술적 구조에 함몰되지 않고 도상적인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을 세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1990년의 제3회 개인전에 즈음하여 평론가 이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심영철의 작업에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종교적 메시지와 그것을 자신의 조형체계에 따라 형상화하는 방법론 사이의 갈등’이었다면 전자정원에서는 ‘단순한 성경풀이’에서 벗어나 메시지의 형상화를 통한 모든 방법과 형식 그리고 재료를 동원하여 자신의 조형어법을 현대미술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스스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전자정원은 “수십 개의 나무기둥을 공간에 설치하고 여기에 터치 스크린에 의해 꽃이 피는 모니터, 움직이는 원통형 홀로그램, 꽃 모양으로 번득이는 네온, 현란한 빛이 파동치는 광섬유 등을 결합시킴으로서 자연과 기술이 통합된 작업”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모뉴멘탈 가든>은 전자정원에 뒤이어 2002년부터 등장한 시리즈로 가변적인 설치미술의 한계와 공공 조형물의 제작에 대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형성된 경향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전자기기와 설치미술이 지닌 시공간 경영의 한계는 조각가에게 환경조형물이 지닌 기념비적 속성에 시선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이 시리즈 초기의 작업에서는 전자정원 연작처럼 다양한 매체와 기법들이 망라되고 주제 역시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점차 자신의 삶과 주변적 욕망의 세계를 드러내는 형식의 작업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은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석조기둥과 그것의 변주로 나타나기 시작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버섯이다. 특히 심영철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게 될 버섯 이미지는 특수한 지형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몰아가는 원리가 된다. 이제 그의 작업은 종교적 교리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거리를 확보하게 되며 욕망의 예술적 전이(轉移)를 통해 오히려 종교적 메시지를 삶과 연계한 보다 적극적인 신앙관을 갖게 된다.


필자는 심영철의 작품세계가 종교적 개념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비평에 대해서 좀더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느낀다. 우선 그의 작품이 기독교의 ‘말씀’을 표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교회가 규정하는 신학적 가치나 본질적 윤리관 또는 불변하는 아우라가 좀처럼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대면하는 세계는 보편적인 개념으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롯하여 사랑과 갈등 그리고 갈망과 역경, 나아가 에로티시즘과 욕망 등의 가변적 가치들이며 작가는 이러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을 표상하는 것을 예술의 소명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점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작품에 흐르는 사랑, 방황, 고난, 배신, 순종, 열정, 타락 등으로 엮어진 다양한 담론들이 종교적 규범과 절대성의 차원 아래 숨겨진 현세적 삶의 현상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자는 심영철의 예술세계에서 기독교의 ‘말씀’과 현실적인 욕망 사이를 오가는 ‘분열된 주체’ 혹은 ‘이중자아’의 속성을 지닌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차라리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대상으로서 신에 대한 부정의 욕망이며 진선미(眞善美) 위에 구축된 진리가 위악추(僞惡醜)와 교차되는 접점에서 찾아오는 고독과 갈등의 모습이다. 이러한 감정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부정이나 상실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종교라는 현실 속에 던져진 자기존재를 규정하기 위한 저항이자 그것은 작가의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반역처럼 작가는 신의 영역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이중적 자아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갈등적 심리는 그의 경우 예술작품의 창조행위를 통해 견제되고 이러한 이유로 그의 삶은 건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체의 해체를 통해 중심주의에 반발하고 본능과 에로티시즘을 부활시키려 했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 비추어 보면 그의 예술에서 발견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타자화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전제가 가능하다면 자유의지를 확보하고 생의 영역을 넓히려는 현대미술의 가능성에 동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 생산자와 대중간의 소통의 코드는 마련되는 셈이다.

심영철의 종교적 화두를 담은 예술은 종합적으로 이중적 판타지아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교조주의적 종교원리와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이며 현세적 삶과 예술 사이를 넘나들며 형성된 어떤 세계라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성(性)과 성(聖)의 이중환상이라는 개념이 심영철의 예술을 진단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키워드로 제시될 수 있다. 사실 이중환상의 개념은 다원주의 혹은 포스트모던의 비평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1980년대 이후 국내의 의욕적 예술가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루며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으며 웬만한 삶의 형태와 특수한 캐릭터의 소유자가 아니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예술은 치열한 삶의 반영’이듯이 작가가 내세우는 화두와 그것들 사이에 충돌하는 개념들 그리고 그 충돌현상을 가시적 형상물로 표상하는 일은 방황과 도전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삶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의지와 능력이 뒤따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영철의 예술적 화두로서 제시되는 종교적 성(聖)의 세계는 과학적 기술의 산물인 네온, 광섬유, 홀로그램, 비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되어 있다. <전자정원> 시리즈에서 보듯 이성과 합리의 세계가 낳은 뉴미디어에 의존하여 드러나는 종교성은 그래서 전래적 신앙의 범주를 넘어선 과학적 분위기로 축성되어 있다. 테크놀로지를 조형적 원리로 삼은 동영상 설치작업은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세계와 합리적인 영역을 결합하는 차원으로 연결되면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의 종교는 역설적으로 현대사회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공해 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 안에서 과학과 종교의 만남은 어떠한 의미를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일까? 예술과 과학과 종교라는 세 요소의 결합은 심영철의 예술에 개성을 담보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일까? 심영철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찾는 메시아는 결국 전자시대의 이상 혹은 미학적 가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심영철의 작품에 나타나는 생리학적 개념으로서 성(性)이 발생되는 지점은 바로 종교적 성스러움과 과학기술이 현실적 욕망과 마주치는 접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심리학자 자크 라캉의 주장처럼 욕망하는 인간의 본능이 증폭되고 있는 현세의 언덕에서 에덴을 꿈꾸는 인간들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전자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성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영광인 가시 면류관이나 십자가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성적 도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령 <아름다운 그님>에서 엿보이는 버섯의 형상은 암시적인 에로티시즘을 나타내고 있으며 <노아의 방주>로 표현된 집단적 군상으로서 표현된 남근의 이미지는 과히 충격적이다. 미술평론가 최태만은 개인전 서문에서 버섯의 비틀린 자태가 상징하는 것은 ‘생의 환희와 열락과 욕망’이자 나아가 ‘생명과 창조 그리고 풍요의 신비’를 상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심영철이 작품에 나타나는 성적 도상과 관련한 개인적 관심과 열망은 단순한 성교의 차원을 넘어 인류학적, 신화적, 심리적, 정신분석학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실 화려하고 다양한 유기적 형상을 지녔으며 관능과 욕망의 상징물로서 제시되는 버섯이 홀로그램과 네온이 발하는 화려한 빛과 어우러질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세계는 성과 성이 결합된 상징의 영역이다. 이러한 에로스적 성의 담론은 작가가 즐겨 다루는 <아담과 하와>의 영상작업에서도 종종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성과 에로스적 성의 이중적 표현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통합되며 그 시각적 표현의 구조 속에서 피어나는 의미들은 신화와 종교에서 시작되어 전자시대의 현란한 빛과 어우러지는 가운데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조형언어로 결정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심영철의 <전자정원> 시리즈나, 최근 새로 선보인 <모뉴멘탈 가든> 작업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느낌을 ‘숭고’의 감정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터치스크린에 의해 꽃이 피는 모니터, 움직이는 원통형 홀로그램, 꽃 모양의 번득이는 네온, 현란한 빛이 파동치는 광섬유”로 제작된 그의 작업은 두려움을 동반한 쾌의 차원이 아니라 유희적이고 장식적인 즐거움을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표상해 내는 자연과 기술의 통합적 시도가 점차 종교적 개념에 의해 축성될 때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미학적 의미는 우리를 숭고의 영역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모뉴멘탈 가든>은 자신의 삶을 가꾸는 하나의 정원이다. 그 정원에 머무는 메시아는 전자시대를 사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주체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갈구가 증폭될수록 현세적 욕망은 고개를 들고, 욕망이 증폭될수록 메시아에 대한 갈구는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분열적 경향의 작품들의 생산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탱할 수 있었던 루이즈 브르주아(Louis Bourgoi) 같은 현대미술사의 주역들처럼 심영철의 예술은 첨예한 두개의 상극을 조율하는 메시아의 정원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전자시대의 에덴 동산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곳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환희와 고통 그리고 숭고와 욕망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하고 있다.

- 월간미술 20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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