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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석 화백의 삶과 예술

김영호

I. 개관

장리석은 1916년 용띠로서, 부처 탄신기념일인 음력 4월 8일 평양시 신창리에서 치과의사인 부친 슬하의 3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평양의 변두리에 병원을 차리고 의료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4-5세가 되는 해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 두 형과 함께 외가집에서 자랐고, 모친도 그가 10세경의 소학교 때 세상을 떠나 일찍이 세상과 대면하게 된다. 중등학교 산술시간에 격자무늬의 공책을 그림으로 채워 그리며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던 소년 장리석이 미술세계에 본격 입문하게 된 것은 4살 위인 큰형의 뒤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면서였다. 동경에 정착한 그는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를 1939년에 졸업하였으나 당시의 분위기는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맴돌던 상황인지라 서둘러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장리석이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처음으로 입선하면서였다. 당시의 작품은 남아있지 않으나 밥상과 과일 등을 소재로 한 30호 크기의 <정물>이었다고 작가는 회고하고 있다. 그는 연이어 제22회 선전에 여인좌상인 , 그리고 1944년 제23회는 <아궁>과 <벽> 두 점이 동시에 입선하는 성과를 거둠으로서 평양매일신문의 보도에서 특별한 찬사를 받았다. 이들 작품 역시 전쟁과 피난의 와중에서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작가는 당시 그림의 구도와 형상을 대담 중의 필자에게 즉석에서 재현해 보여줄 정도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우선 <아궁>은 두개의 무쇠가마솥이 횡으로 얹혀있는 화덕과 그 아래 석탄 아궁이를 화면 가득 그린 것이다. 전경의 바닥에는 바케츠와 석탄찌꺼기 그리고 불쏘시게로 쓰이는 장작들이 널려있는데 연기와 증기로 얼룩진 화덕 표면의 마티에르가 강조된 것이었다. 또한 <벽>은 화면의 우측으로 대문이 있는 가옥의 벽을 그린 것인데 반쯤 열린 문틈사이로 보이는 뜨락에는 장독대가 자리잡고 강아지가 문 사이로 걸쳐져 있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담벼락에 비친 그림자는 몇몇의 낙서와 더불어 작가가 특별히 신경을 기울인 요소들이었다. 당시 선전에 세 차례 연속 입선을 하였을 때 장리석이 사용한 일본 이름은 다카하시 미츠오(高橋 三男)였다. 한편 이 시절 장리석은 최영림, 황유엽, 박수근과 더불어 ‘주호(珠壺)’라는 이름의 미술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평양에 거주하던 미술감정사이자 판화가였던 일본인 오노 타다치(尾上忠治)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었고 해방이 되어 해체되기 까지 4-5년 동안 ‘주호전’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45년 8월,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북한의 미술인들은 곧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익 세력의 휘장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개전 직후 평양미술동맹에 소속되어 있던 장리석은 가깝게 지내던 선배화가이자 당시 평양미술학교 응용미술과 교수였던 유석준의 지휘아래 금강산 신축호텔의 벽화제작을 하게 되었고 징집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그는 평양에 남아있던 가족(처자)들과 영원히 헤어지게 된다. 당시 벽화제작에는 장리석과 유석준 이외에도 최영림, 한묵, 김민구 등이 각각 독립된 그림을 그리며 참가하고 있었다. 이때 장리석은 최영림과 함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한 한미 연합군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것은 화가로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일종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국군이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생사를 넘나드는 우여곡절 끝에 퇴각하는 국군 트럭에 몸을 실어 원산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장리석은 이중섭의 집을 찾아가 10여일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이중섭은 얼마 전 평양에서 장리석을 만났을 때 벽화제작을 위해 금강산으로 가려면 원산을 거쳐야 하니 그때 자신의 집에 들리기를 권했다.) 이때 장리석은 원산에 상륙했던 한국군 해군부대 정훈실에 최영림과 함께 지원하여 군속화가로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이 두 명은 후퇴하는 해군함에 몸을 실어 부산에 도착하였고 거기에서 피난내려온 이중섭과도 재회하게 된다.

피난지 부산은 남한의 피난민은 물론 북에서 내려온 화가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군속화가였던 장리석은 부산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군함에 몸을 실어 바다건너 떠있는 섬 제주도로 남하하여 정착하게 된다. 작가에 따르면 절해고도의 제주도는 자신의 삶을 새로 탄생시킨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한라산이 자연을 양육하는 모태성징으로 중심에 서있고 산자락으로 360여개의 기생화산을 거느리고 있는 섬의 분위기는 전쟁에 지친 영혼을 끌어안아 품어주는 따스함이 있었고, 이곳에서 마주친 해녀들과 조랑말은 후일 작가에게 창작의 샘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섬은 태평양 전쟁의 핵심에 놓여 많은 인명을 앗아간 섬이기도 했다. 10여년전인 강점기의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일본은 제주도를 요새화 하였고 그 결과 1945년 미군 폭격기의 주 공격대상이 되었다. 당시에 전투기와 군함을 보호하기 위한 격납고와 동굴들이 아직도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남아 있다. 해방 후에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마수가 1948년 4.3 사건을 만들어낸 아픔의 땅이었다.)

1950년 12월에 장리석은 해군 정훈실 선무공작대 요원의 자격으로 제주도에 입도하였다. 당시에 함께 내려온 최영림 이외에도 제주도에는 홍종명, 이중섭, 이대원, 최덕휴, 구대일, 옥파일 등을 비롯하여 1952년 입도해 도경찰 정훈관으로 근무하던 김창렬도 있었는데 이들은 6개월에서 4년간 지내면서 제주화단의 형성에 기여했다. 장리석은 동료화가로서 1951년 봄에 입도하여 서귀포에서 6-7개월간 정착했던 이중섭과도 잦은 교류가 있었다. 또한 같은해 2월에 입도한 동경제국미술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홍종명과도 가깝게 지내었는데, 그는 1945년 5월까지 머무르면서 제주미국공보원이 주최한 전도학생미술전에 <자화상>을 찬조출품하기도 하였다. (홍종명은 1952년 9월부터 1954년 5월까지 제주 오현중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다.) 조선후기에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떠나와 9년간 체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역사의 뒤를 이어 전쟁중의 피난화가들은 제주화단에 근대미술을 싹트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피난화가들이 대부분 제주도를 떠난 1954년 오현중고등학교 주최 제1회 전도학생예술제는 5만여 가구에 8만여명이 관람함으로서 두집에 3명이 입장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 여세를 몰아 1955년 제주도미술협회가 창립된다. 20세기 중반 뉴욕화단이 유럽의 전쟁을 피해 온 화가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처럼 제주 근대미술의 태동기에 피난민 화가들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장리석은 도내에서 처음으로 반공포스터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군속화가로서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해군 정훈실이 해산되면서 일반 피난민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장리석은 그림을 배운 덕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제주시의 명동이던 칠성통에는 칠성다방과 칠성사진관을 운영하는 현지인이 있었는데 장리석은 이집 선친의 제사용 초상화를 제작해 주는 것이 계기가 되어 한동안 머물게 되었다. 또한 절간의 벽화와 불상을 제작하기도 하였고 “극장간판과 잡지삽화를 제외하고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며” 지내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군인장교의 가족들이 피난지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이들을 포함한 피난민에게는 무상으로 쌀과 얼마간의 생활비를 배급하고 있었다. 장리석은 제주도 시절에 향후 평생을 같이할 황해도 출신 피난민 여성과 재혼도 하였고 이들 부부는 전쟁이 끝난 1954년 3월 서울로 이주하여 보광동에 정착하게 된다. 장리석이 제주도에 거주하던 시절에 제작한 작품들은 앞서 말했듯이 주로 해변과 해녀 그리고 조랑말 등이었으나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51년 종이에 과슈로 그린 <오현중학교 근방>과 1952년 종이에 수채로 제작한 <남해의 여인들>, 그리고 1953년에 그린 유화 <해녀들>이 현재 알려진 전부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제주도의 풍물과 해녀 등 작가가 제주를 소재로 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제주에서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상경한 이듬해인 1955년, 장리석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조롱과 노인>을 출품하여 특선을 수상하고, 이듬해인 1956년에도 연이어 특선을 받음으로서 화단에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1958년 제7회 국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게 됨으로서 일약 한국화단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당시 국전은 정부수립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국민적 관심 속에서 개최되었는데 수상작 <그늘의 노인>은 공원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노인의 자태를 신파적으로 표현해 낸 것이었으며 당시 장리석의 나이는 42세였다. (이후에도 그는 1959년과 1960년에 열린 제8회와 제9회 국전에서도 연이어 특선을 수상하였다.)

정부가 인정하는 확고한 위치의 화가가 된 장리석은 몇 년전에 문을 연 서라벌 예술대학의 강단에 1960년부터 서게 되었는데 당시 강사로 출강하던 박득순, 변시지, 최영림, 변관식 등과 더불어 학교의 위상을 견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서라벌 예술대학은 1953년에 문예창작과, 연극영화과, 음악과를 둔 초급대학으로 개교하여 1956년 미술과를 창설하였으며 1964년 4년제 예술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후 장리석은 1971년부터 대우교수를 거쳐 1973년에는 서라벌 예술대학을 병합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전임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81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교육자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장리석은 동향인 최영림과는 친형제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강사로서 강단에 첫발을 내딛었던 순간부터 20년이 지나 정년에 이르기 까지 교육자로서 활동을 함께 했으며 국전 내부의 아카데미즘으로 고착된 대상 재현적 사실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형상주의 미술을 개척해 나갔던 전후 한국화단의 동반자였다. 특히 그가 참여했던 구상전은 전통적 구상작업과 관념적 세계를 탐닉하는 추상작업의 어느 영역에도 제한되지 않는 새로운 구상회화의 화풍을 잉태하고 천착하는데 기여하였다.

대학의 교수로서 장리석은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중 으뜸은 실기 시간에 붓을 들어 제작 시범을 보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이다. 고등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고 올라온 학생들의 세밀한 그림은 뭉툭뭉툭한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의 대비에 의한 가필에 의해 여지없이 주인이 바뀌고 말았고 붓을 돌려받은 학생이 다시 손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표현주의적 작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열성을 다해 지도했던 것이다. 비단 실기실에서 뿐만 아니라 장리석은 모든 모임에서 주도적이었다. 외모가 미남형은 아니지만 납작한 코와 그 아래에 달린 히틀러형 콧수염을 움직이며 목청을 한 옥타브 높여 재담을 할때면 주변에는 벌써 신파극의 관객처럼 신이 났다. 이러한 성품은 항상 말이 없고 조용한 미소로 일관했던 친구 최영림과는 대조적이었다. 그의 위트와 재치 그리고 만담은 90세를 앞둔 지금도 변함없는 것으로 보아 천성이다.




II. 시대별 대표작과 작품경향

195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에 이르는 50년간의 시기에 제작된 장리석의 작품들을 일괄해 보면 소재는 서민의 모습과 생활상에서 취하고 있지만 현실비판적 메시지나 민중의식을 고취시키는 선동적 발언 따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장리석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잣대로 다루어질 수 있다. “구수함과 뭉클한 정감을 쏟아놓는 타이프의 작가”로서 혹은 “서민의 애환을 쫓는 시대적 증인”(오광수)으로서 장리석은 엘리트적 권위나 의협심으로 한 시대를 개화하려 한 선각자의 입장이 아니라 변혁기의 서민적 삶을 살았던 인간 그 자체였다. 천성적으로 그는 유머와 위트를 지닌 자유인이었으나 어떤 세속적 권세나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 기술자가 아니라 역사 자체로 남아있으며 그의 작업은 시대에 대한 비판이나 진단의 증거물이 아니라 시대상 자체의 증거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민간단체의 미술상 수상제의을 수차례 사절하였고 심지어는 국가에서 수여하는 문화훈장 수여식에도 참석하지 않는 무관심을 보였다. 공적 모임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은 예술가로서 화업 55년 동안 개인전을 세 차례 겨우 개최하는 진기록을 만들어 내었다.)

장리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소재를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1950년대는 노인과 마부 그리고 해녀가 중심이 된 일상풍경이 주를 이루고 있다. 1960년대는 서민적 일상풍경과 더불어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고속도로 건설등의 국토 재건사업과 연계된 노동현장과 종자소를 키우는 목장풍경이 새롭게 나타나는 점이 이채롭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제주의 해변풍경과 해녀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하는 한편 석화(石花)가 핀 바위로 덮힌 계곡 풍경이나 향토색 짙은 설경이 주를 이루고 이러한 소재 선택은 1980년대와 그 이후의 그림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특히 해녀들은 작가에게 창조적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으로서 그 건강하고 원초적 생명성이 깃든 모습은 작가의 트레드 마크가 되기에 이른다. 이상과 같은 소재들에서 보듯이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가의 예술은 가식없는 서민의 전형적 삶을 반영하며 강인하고 신선함을 진닌 미학적 인물로서 해녀상을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한편 풍경을 중심으로 작가가 드러내는 세계는 돌꽃이 자라는 영원한 시간속의 풍경이며 남국의 신비로운 풍광이 서려있는 세계이다. 이러한 풍경은 척박한 현실에 머물고 있는 작가가 꿈꾸는 영혼의 고향이자 이상향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나타내고 있다.

장리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표현방식(기법)을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노인이 주를 이루는 1950년대 후반의 인물화에는 갈색과 녹색이 주를 이루는 화면에 백색의 뭉툭한 터치의 붓자국을 사용해 빛에 의한 명암대비 효과를 강화시킴으로서 인상파적 경향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1958년 국전에 대통령상을 받은 <그늘의 노인>과 이 작품과 더불어 대통령상 후보에 올랐던 <복덕방 노인>, 그리고 새장을 앞에 두고 실내에 앉아있는 <조롱과 노인>에서는 배경과 인물 사이에 강한 빛의 대비효과가 강조되어 있어 여름날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을 느끼게 하고 있다. 해석학적 측면에서 이 두 작품이 다른 점은 <복덕방 노인>이 어두운 벽돌담을 배경으로 서서 햇빛을 받고 있는 일상적 생태 현상으로 보는이들을 안내하고, <그늘의 노인>은 원경의 정원에 쏟아지는 햇볕을 뒤로하여 졸고있는 노인의 인물을 어둠 속으로 배치시킴으로서 상징적 해석의 가능성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유도하는 작가의 조형적 착상은 작가의 대담한 화면구성과 조형감각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그늘의 노인에서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친채 졸고 있는 무심한 노인의 표정이나 오른팔에 끼고 있는 낯선 우산은 작가의 예술세계에 잘 절여진 풍자와 해학 그리고 여유를 엿보게 하는 대목들이다. 복덕방 노인에서 허리춤에 손을 찔러넣고 담배를 피우는 노인의 자태는 “이제 사라져 가는 한국 남자의 어떤 전형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 흐르는 서정은 이전 1955년의 작업 <고독>에서 보이는 암울하고 폐쇄적인 자기표현의 그것과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예술작품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심리를 반영한다면 이 몇 년간의 차이를 두고 제작된 작품 사이를 흐르는 세계관의 변화는 현실을 대하는 예술가의 이중적 심리를 나타내는 대목으로 평가될 수 있다.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소개되는 일상적 풍경들은 사실적인 묘사를 기조로 한 서사성이 강조되고 담담한 마티에르와 소박한 붓터치는 견고하고 안정된 구도와 더불어 연극적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둔탁한 사각의 나무 식탁 위에 프라이팬과 기름병 등의 정물을 중심으로 하여 명태와 함께 배치시킨 <찬방>(1965)이나, 말이 있는 마구간을 배경으로 펌프가 있는 마당에 아이를 안고 서있는 여인을 그린 <막동이>(1965), 그리고 가오리 등의 어물이 널려있는 대청마루 건너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어촌 여인을 그린 <오수(午睡)>(1969)와 같은 작품에서 이러한 구도의 완결성이나 서사성이 돋보이게 표현되어 있다. 한편 <건설>(1960)이나 <경부고속도로>(1969) 등의 국가 건설사업에 초점을 맞추어 현장에서 노동하는 인부들을 표현한 경우나 공공 목축산업을 장려하기 위한 종자소들을 방목하는 현장을 그린 <5월의 목장>(1969)은 소재의 특성상 서사성이 강조되어 작가에게는 특별한 시기의 작품으로 분별되고 있다. 이러한 시국정황을 나타내는 그림은 당시에 주류 화가들에게 나타나는 한시적 경향이었다. 이는 작가가 사회현상에 기여하고 경제부흥이나 도로건설 등 동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기록적 측면도 없지 않으나 작가의 순수한 예술적 혼이 깃들여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분류되기에는 예외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 적용된 화면구성의 의도성이나 인물에 대한 리얼하고 주체적인 해석방식은 이후 구상전 등의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하는 단체에 소속된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 나타나는 기법상의 변화는 자연의 신비한 풍광을 녹색과 백색을 근간으로 하여 차분한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전의 그림에서 보이는 명암의 강렬한 대비효과에서 오는 표현적 화면을 대신하여 신비하고 온화한 서정성이 한층 강조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작가로 하여금 남국의 풍경에 천착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오광수는 이 시기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을 색채의 하모니가 뚜렷해 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와 때를 같이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가 이른바 제주의 해변풍경과 해녀 그리고 향토색 짙은 설경이나 석화가 핀 바위로 덮힌 계곡 풍경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업의 하나인 <남국의 봄>(1972)은 제주의 해변을 그린 것으로 소라나 고동 등의 조개더미가 화면의 중앙에 있는 바위 아래로 은닉되어 있는 것이다. 그 너머로 자리한 바다는 짙은 초록으로 칠해져 신비로운 깊이를 나타내며 원경으로 배치된 언덕은 노을지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사이로 비치는 빛에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낭만성을 더해준다. 이와함께 등장하는 계곡 풍경 <벽계(碧溪)>(1970)나 <석화(石花)>(1972)에서는 바위에 피어난 돌꽃 무리들이 조개의 무지개 빛 서정성을 대신하고, 보석과 같은 색채의 조화가 이상향의 세계로서 자연의 신비를 유감없이 발산해 내고 있다. 같은 시기에 작가는 해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바다를 배경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몸을 다듬는 여인 습작이 종이에 오일 파스텔로 대량 제작되는데 보랏빛에서 적, 청, 녹, 연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원색의 터치들이 화면 전체에 퍼져 있어 원초적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다채로운 색상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풍부한 질감의 해녀도 습작은 조랑말과 더불어 제주풍경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법으로 자리잡게 된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지속되는 남해의 여인 연작들을 보면 강인하고 원초적인 생명성을 지닌 여성들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비단 제주도 해녀에서 받은 인상을 표현해 낸 것이지만 특정 인물의 초상이라기 보다 화가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여인상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는 오래전에 서울에 정착해 살고 있지만 피난시절 제주도에서 경험했던 바다여인들의 육체적 건강성은 자연과 오버랩 되는 여성 이미지로 남아있고 그것이 점차 작가의 머릿속에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리석이 오랜기간에 걸쳐 수많은 연작을 남긴 <차돌 어멍>(1983)(1986)(1989)(1990)이 실존인물이 아닌 모델을 이용한 상상의 인물이었다. 한편 바다일을 마치고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해녀를 그린 <휴식>(1985)과 같은 해녀도가 기념비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점이나, 마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같은 원시 조각이 지닌 생명성을 드러내는 해녀상과 더불어 자연 이미지와 밀착된 영원성을 드러낸다. 장리석에 있어 남국의 여인들은 만물을 배태하고 양육하는 자연에너지를 지닌 모태성징의 표상이다. 한편 1960년대 후반부터 부분적으로 나타나던 설경 역시 1980년대 이후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선호하는 주제가 된다. 작가의 뭉툭하고 감각적인 물성을 드러내는 붓 터치는 푸근하게 눈으로 덮인 자연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더없이 적합한 주제로 보인다. 특히 작가의 작업에 강한 명암대비의 효과로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효과적으로 표상하는데도 설경은 나름의 기여를 하고 있다.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를 그린 <보광동 설경>(1980)에서부터 산자락을 휘감아도는 구름과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한 <다도의 설경>(1981)과 팽나무아래로 강아지와 더불어 길을 재촉하는 아낙을 그린 <분이네 외가촌>(1984)에 이르기 까지, 또는 석화 바위 위에 쌓인 눈을 그린 <계곡의 초설>(1986)에서 한라산을 배경을 이국적 정취를 드러내는 <제주의 서설(瑞雪)>(1992) 등은 설경 시리즈로서 주옥같은 작업들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상의 단순화는 강화되면서 전체적으로는 완숙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색채 역시 강렬하면서도 화려한 보색을 대비시킴으로서 색채의 향연을 보는 듯 하다. <제주의 봄>(1992)은 소품이면서도 이러한 완숙의 경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깊은 녹빛의 바다위를 떠가는 순백의 고깃배, 화면의 중심에 자리잡은 갈색의 바위 주변으로 선홍의 기운을 내뿜는 꽃들이 만개해 있고 하늘저편으로는 남해의 소식을 알려오는 대기의 흐름이 드라마틱하게 밀려오고 있다. 바위 사이로 아이를 업은 여인은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고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장리석은 인도와 몇몇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오는데 그림속에 자화상이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인도 사원에서의 나>(1990)는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한 종이위에 파스텔을 덧칠한 것이고 <백두산 관참>(1990)은 말 그대로 백두산을 둘러본 소감을 그린 대작인데 현지 풍경을 스케치 하는 작가 자신이 화면에 인상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해녀와 자화상>(1992) 역시 그간에 자신이 일구어온 남국의 풍경을 안에 자신의 모습을 등장시킨 것이다. 일국을 창조한 신처럼 묘사한 70대 중반의 모습은 마치 예술세계를 주도하는 희랍의 신처럼 당당하다. 이러한 일련의 자화상들은 70대 중반에 접어든 노년기의 작가가 자신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 해석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작업량이 줄어드는데 몇 되지 않는 작품의 특징은 색감이 전체적으로 핑크빛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동지날 아침>(2001)은 마치 진달래처럼 연분홍 빛을 띤 사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밝은 색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노안에 따른 시력의 저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연의 청조한 색상에서 느껴지는 건강과 생동감에 대한 관심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작품세계의 특성

이상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장리석의 예술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성들은 내용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대체로 ‘투박한 서민적 의식의 건강성’, ‘해학과 재치 그리고 낙천성’ 등으로 요약된다. 평론가 오광수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서민의 애환을 쫓는 시대적 증인”이라는 용어로 장리석의 예술세계를 평하고 있는데 어두우면서도 진실에 찬 생을 살아가는 시골 노인에 대한 연민과 어시장이나 해변의 여인군상을 통해 서민의 강인한 의지와 감동적으로 표현해 냄으로서 한 시대를 사는 인간의 삶을 치열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리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서민의 이미지는 뚝배기와 같은 투박함과 원초적 건강성을 잃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학과 재치가 근저에 흐르고 있다. 이는 작가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낙천적 기질의 결과이자 이로 인한 여유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태도의 결과라 할 것이다. 아니면 전통회화로서 풍속화에 깃든 한국인의 보편적 서정성의 발로라는 점에서 보는이들에게 소통의 감정을 일으킨다. 특히 피난생활을 마치고 상경한 1950년대 후반의 어두운 상황에서 제작한 <그늘의 노인>이나 <복덕방 노인>에서 번뜩이는 해학과 재치는 작가의 창조능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한편 장리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향수’의 정체에 대해서도 언급해야만 하겠다. 실향민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작품에 흐르는 서정을 어둡고 비통하며 고독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향민에 있어 나타나는 향수란 개인적 경험으로서 특정 공간에 대한 기억과 귀소의 욕망이기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의 영혼이 쉴 영원한 안식처에 대한 회귀의 본능이라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작가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제주의 ‘조랑말’ 연작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따사로운 초여름 햇살아래 망아지를 돌보는 어미말 이나 물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무리들은 정겨운 가족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말이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적 견해를 빌리자면 우리가 이러한 해석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차원을 떠나 보편적 그리움의 서정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리석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보편적 무의식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는 영원한 이상세계를 향한 노스텔지어이다. 다시말해 장리석에 있어 고향의 의미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특정지역을 넘어 세상을 방황하는 보편적 영혼들이 지향하고 있는 이데아인 것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두개의 고향을 만들며 살아간다. 하나는 몸이 탄생된 곳이며 다른 하나는 영혼의 출처이다. 장리석의 경우 현실적 문제로 고향에 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느끼는 상실감은 정신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대적으로 배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리석의 작업을 둘러싸고 제기될 수 있는 ‘현실비판적 시각의 결여’라는 지적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앞서 말했듯이 장리석은 비판적 이념을 설정하고 선동하는 전사의 모습이 아닌 역사 서술의 대상인 민중 자체로 남기를 원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화가로서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서민의 삶을 거울처럼 반영하는데 있다. 이러한 태도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제공하는 근원적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서술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이념화되기 이전의 상태인 거칠고 생경한 재료나 원료로 존재하므로 관객들은 이러한 재료에 나름의 의미부여를 시도하며 새로운 의미를 재조립하는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 이러한 프로파간더적 선동과 이념의 구축에서의 이탈은 화면형식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엘리트적 비판의 칼날을 더 이상 무의미하게 만드는 장리석의 <산정山亭)>(1980)은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원초적 이상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깊은 샘이 있는 장엄한 산과 학들이 날개짓하는 신비의 영역이다. 그것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세계이자 현대인들이 꿈꾸는 신화세계이며 현실에 대한 비판 자체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존오의 세계이자 장리석의 일구어 놓은 건강한 힘의 예술세계가 아닌가 한다.
2004. 11 대전시립미술관 개인전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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