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문창배- 이것은 돌이 아닙니다

김영호

문창배가 육지에서 그림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간 것은 일년 전의 일이다. 대학에서 5년간의 조교생활을 거쳐 모교의 강단에서 강의를 시작한 출발점에 그가 내린 결정은 귀향이었고 가족과 화구를 모두 챙겨 훌쩍 내려간 것이다. 안성캠퍼스에서 그는 황소 같은 부지런함으로 불철주야 그림 그리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었다. 평소에 말수는 적어도 이미 두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각종 공모전에서의 수상실적은 그의 작품제작에 대한 의욕과 근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로서는 문창배의 귀향결정이 뜻밖이었지만 지역화단과 작가자신을 위해서 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제주화단은 그에게 제주미술대전 최고상을 수여함으로써 환영의 정표를 건네주었다.

제주에 내려가면서 달라진 것은 돌그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소재가 다양하게 선택되어 왔다는 점에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환경의 영향 탓일 것이다. 사실 삼다도 제주의 돌은 제주화가들에게 더없이 좋은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다양한 돌의 형상에 익숙해져 있는 도내 거주 작가들과는 달리 문창배의 돌그림은 특이한 면들이 있다. 고향을 떠나 한동안 접하지 못하던 돌섬의 품으로 다시 안겼을 때 그것이 주는 인상은 돌을 넘어선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변혁, 도시, 권력, 환경, 물질문명 등으로 점철된 세간을 돌아보고 다시 찾은 고향의 바람이 더 이상 바람 자체가 아닌 것처럼 제주의 돌은 더 이상 돌이 아니었다.

문창배가 그리는 것이 돌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이자 이미지로서 제시된다. 작가가 설정한 작품의 명제 <시간-이미지>는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표상하는 시간은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돌에 대한 기억의 공간을 관통해온 시간이며, 풍파에 깎이고 깎여 내린 영겁의 세월이 작가가 드러내려는 시간이다. 전자는 개인적 삶의 시간이며 후자는 자연을 거슬러온 시간인데 그 두개의 시간이 하나의 화면에서 교차되며 어우러져 있다. 캔버스 앞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순간은 자신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깨어있는 꿈으로서 백일몽이고 그 꿈의 실행자는 바로 예술가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가 드러내는 시간은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돌이 머금은 시간이 이미지에 의해 가시화 되는 것이다. 마치 비가시적인 자연의 바람결이 갈대나 파도의 외관을 통해 가시화되듯이 시간의 개념은 돌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의 몸을 빌어 우리의 앞에 드러나고 있다. 이때 그림의 돌이 자연의 돌 자체가 아니듯 그의 돌 이미지는 돌 자체가 아닌 돌 모양을 한 허상의 집합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창배의 돌그림에는 역설적으로 ‘돌의 부재’가 전제되어 있다. 이것이 역설이라는 사실은 미술작품이기 때문에 정당화 된다. 르네 마그리트가 파이프 그림을 대상재현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님을 선언한 이래 이러한 실상과 허상의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상에서 보듯 문창배의 돌그림은 더 이상 돌 자체를 나타내고 있지 않으며 시간과 이미지라는 두개의 이질적 축 위에 서있는 작가의 의식을 반영하는 평면적 그림으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문창배의 작품은 사실적 묘사, 그것도 극사실적 기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누가 뭐래도 그의 그림은 돌그림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창배의 돌그림을 해석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것이 돌이 아님을 아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캔버스 앞에서 수없는 조약돌의 형상을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작가의 심정은 이미 풍경으로서 돌밭의 인상을 넘어 의식 혹은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는 자아를 체험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김창렬의 물방울이 더 이상 물방을 자체가 아닌 것과 같은 체험이다.
<



문창배가 그리는 돌그림의 형식은 풍경화가의 그것과 다른 개성적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우선 그의 돌은 유기물처럼 강한 물성을 드러낸다. 마치 현미경에 포착된 허파의 세포나 절개된 부레의 표면처럼 생명질의 유기적 외관으로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두 번째의 특성은 색채의 사용을 회피함으로서 감정의 개입이 될 여지를 상실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사진처럼 차겁고 이성적이다. 또한 색채가 삭제된 화면은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보는 이에게 기억의 시간으로 여행을 유도하는 안내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그의 화면에서는 삼차원적 원근을 암시하는 배경도 삭제되어 무중력의 공간을 드러낸다. 상상과 상징 그리고 기호적 의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돌의 극사실적 이미지를 그리면서도 돌의 실체를 넘어선 세계를 드러내는 문창배의 예술이 기호적 의미들로 채워져 있음은 바탕에 깔린 문자(알파벳이나 한자)들에 의해 드러난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는 고궁과 기와담장을 그린 것들이다. 특히 고궁 시리즈에 작가는 <역사-이미지>라는 제목을 달았다. 앞선 돌그림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궁 이미지들 역시 대상에 대한 주제적 접근을 넘어선 세계를 드러낸다. 이른바 그것은 문명화된 시간의 집적으로서 역사이며 허상적 이미지의 극단적인 실현을 통해 그것을 표현해 내고 있다. 사진에 대한 해석의 체험은 우리에게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도움을 준다. 우리가 여행사진에서 보는 것은 인물뿐만이 아니고 그것이 연출되었던 시간의 현장에 대한 기억 혹은 상상이다. 이러한 가설이 가능하다면 문창배의 돌과 고궁 그리고 기와담장 뿐만 아니라 이번 개인전에 조심스럽게 선보이는 몇 점의 바다풍경 모두는 동일한 예술관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창배의 그림은 예술의 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마치 앤디 워홀이 평범한 비누포장박스인 <브릴로 상자>를 재현해 예술의 본성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예술의 종말을 야기 시켰던 것처럼 문창배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돌의 묘사를 통해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무관심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야기 시킨다. 거기에서 결과하는 것은 이른바 ‘자연 자체의 표상으로서’ 그림의 종말이자 개념의 탄생이다. 작가의 그림은 기계적으로 재현해 놓은 사진처럼 대상에 대한 무관심과 재현의 무의미성을 드러낸다.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보이는 삶의 현장을 연출하려는 의도가 배제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적도 없고 인간의 체취나 숨결도 없다. 차거운 그림은 무의미한 시각적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드러낼 뿐이고 감각을 동하게 하는 색채도 없고 수평의 구도로 정지된 화면은 차거움을 더해준다.

결론적으로 문창배가 그리는 대상은 돌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돌그림 이기를 거부한다. 역설적이게도 회화예술의 가능한 모든 것을 거부한 문창배의 그림은 해석의 제로지점에 서있다. 예술이 의미생산의 형식이라면 작가가 표상하고 있는 ‘시간’과 ‘역사’ 그리고 ‘이미지’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전적으로 관객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2005.1)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