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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로- 나의 그림은 무작위 한 것이다.

김영호

윤명로 - 나의 그림은 무작위 한 것이다


2000년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운명로는 <익명의땅> 연작이후 <겸재예찬> 이라는 표제를 새롭게 내걸었다. 그리고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과 그 이후에 이 표제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의문이 제기 되었다. 그 하나는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해온 전위세대의 선도주자로서 자신이 일구어 놓은 비정형적 경향의 예술관을 전통에 새롭게 접맥시키려는 적극적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의 작품세계를 차용함으로서 전통 회화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정체성 찾기에 관한 문제가 그렇듯이 하나의 결론으로 매듭짓기는 어려우나 60년대 이후 국내미술계에 지속되어 온 화두라는 점에서 전부한 면이 없지 낳다. 하지만 글로벌리즘이나 신 자유주의 담론이 비서구권 지역의 문화질서를 재편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규모의 미술제를 통해 뉴미디어 경향의 작품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회화예술의 순수성과 절대성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유효하다.


<겸재 예찬>으로 명명된 연작들을 통해 작가가 자신의 예술관에 대한 변화와 대중적 이해 또는 오해의 반응을 감지하였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최근작들은 <겸재 예찬> 이라는 표제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형식이나 재료의 사용 그리고 공간운영 등의 측면에서는 이전과 동일한 방법론을 적용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윤명로의 근작에 나타나는 겸재와의 연계성 또는 차별성이란 어떤것일까.

윤명로의 작업은 재료적 측면에서 ‘쇳가루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붓을 사용해서 바인더로 점성이 주어진 철분(鐵粉)을 캔버스 화면에 올리고 나이프와 헝겊을 이용해 그 양과 리듬을 조절하면서 작업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이는 한지에 수묵만으로 겸재가 그렸던 전통적인 산수화의 기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맥루한(M. McLuhan)의 관점에서 보면 매체의 변화에 따른 형식의 변화와 그에 상응하는 이념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따지고 보면 동일한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이질적인 양식과 세계관을 나타내는 경우나 반대로 이질적인 재료로 동일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윤명로의 작업에 쓰이는 철분자체가 작가의 예술론을 규정하는 단서가 될 수는 없지만 그의 작품을 어떻게 철분을 통해 시각화 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방법적 측면에서 보면 윤명로는 극도로 긴장된 필선으로 일획적인 제스처를 실행함으로서 작업을 마무리 하고있다. 작가가 사용하는 도구는 앞에서 말했듯이 붓과 나이프 그리고 표면을 닦아내기 위한 헝겊이 전부인데 안료를 대신해 사용하는 철분은 개칠(改漆)이 불가한 재료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도구 사용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작업은 철분이 화면위에 올려지면 형성되는 톤이 미묘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관건이다. 철분 그림의 톤은 덧칠과 수정이 가능한 유채나 화면의 지층 속으로 스며드는 수묵과 달리 한차례의 붓질을 통해 만들어진 두께에 의해 결정되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톤을 결정 지우는 것은 바로 ‘호흡’이라고 말한다. 즉 호흡은 개칠 불가한 재료적 특성을 지닌 철분을 화면의 이곳 저곳에 차별적으로 살포시키는데 기본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때 작가가 말하는 호흡이란 다름아닌 대상인 화면과 주체인 작가 사이의 일치의 상태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최초로 사용한 철분이랑 재료가 화면 위에 얹혀지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또한 그것을 주도하는 호흡은 화면과 작가의 일치를 이루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일치의 상태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일까.

다소 현학적인 표현이지만 화면과의 일치란 체험적 경험으로서 화면공간에 대한 인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의의를 바르게 이해하고 판별하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인식은 일종의 정신능력에 속하는 것이지만 화면을 주시해본 경험이 있는 화가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비어있거나 아니면 단색으로 채워진 거대한 캔버스의 색면 앞에서 느끼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또한 리오타르 (J.F. Lyotard)가 규정하는 ‘숭고’의 개념과 끈이 닿아 있으며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나 별들로 가득 채워진 밤하늘의 무한성 앞에서 겪게 되어지는 어떤 상태와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화면은 비어있으며 사각의 틀을 지니고 있는 유한한 물적 대상이지만 그것은 또한 희열과 감동이 교차하는 무한한 상상의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윤명로의 경우에 화면과의 일체감이란 결국 화면에서 어떤 공간과 기운을 체득하는 과정이며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작품제작을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은 완성되어지는 셈이다.





캔버스 공간에 대한 인식의 과정 이후에 시도되는 단계는 어떤 것일까. 윤명로가 화면에서 어떤 공간과 기운을 체감하면서 행하는 일은 곧바로 화가가 실행하는 그리기의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윤명로는 이 그리기를 무작위적 행위로 여기고 있다. 그가 “나의 그림은 무작위한 것이다 (I paint at random)”라고 할 때 거기에는 자신의 예술이 비대상(非對象) 또는 비지시(非指示) 세계를 지향한다는 선언적 의지가 담겨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잭슨 폴록(J. Pollack)의 드리핑이다. 두 작가 사이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일반적으로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점과 제작과정에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에서 발견된다. 물론 이러한 의도와 제작방식에 대한 타당성은 좀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작가가 실행하는 우연적 행위는 조건적 필연성의 논리로 규정됨으로서 모순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과 차별화 되는 예술 창조의 영역에서 문제는 캔버스를 대하는 작가의 직관적 사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윤명로의 작업에 적용되는 ‘무작위한 것’이라는 의미는 이성적 인식의 세계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명로의 작업은 공간을 드러낸다. 그것은 작가가 화면에 대한 사유과정과 호흡을 통한 화면과의 일체감 그리고 ‘무작위적’ 제작행위가 탄생시킨 공간이다. 캔버스의 크기와 형태에 관여하지 않고 드리핑을 시도하는 폴록과는 달리 윤명로에 있어서는 캔버스의 형태와 당겨진 표면의 탄력 그리고 올의 굵기에 대한 인식의 단계가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남기는 공간은 여백이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며 필선들은 작가의 신체로부터 배설되듯 뿌려진 것이 아니라 호흡이 남긴 흔적이 된다. 작가가 실행하는 이러한 사유의 흔적은 캔버스의 가장자리에 남겨두는 색면에서도 발견된다. 색면은 화면을 분할하여 화면의 한면에 자리잡거나 아니면 화면의 양쪽 측면에 또다른 유형의 공간을 발생시키는 띠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부분이다.

이제 우리는 윤명로의 작업이 겸재의 그것과 갖게 되는 상관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조형적 측면에서 볼 때 작가는 겸재가 일구어낸 실경산수(實景山水)의 업적을 승계하고 있지 않다. 무작위적인 그림의 그의 작업은 특정한 대상으로서 풍경을 소재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나아가 소재 그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산천을 탐구한 겸재의 산수화론이 윤명로의 예술론에 온전히 적용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수직준법이나 미점 등의 화풍을 승계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겸재와 그를 따랐던 일련의 화가들과 무관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조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윤명로가 겸재를 예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된 사실 중 주목할 것은 <겸재 예찬>의 큰뜻은 회화의 복권을 위한 의지의 표명이자 세부적으로는 여백에 대한 인식의 방법이었다. 여기서 작가가 시도하는 그리기는 사유와 호흡을 통한 화면과 일체감을 체험하는 과정이며 그 결과로 형성된 앞에서 말했듯이 여백으로 공간이 아닌 사유적 공간이라는 특성으로 나타난다. 윤명로의 사유공간이란 화면에서 대상을 소외시킴으로서 가능한 공간이며 그것은 미적 정관 즉 칸트(I.Kant)의 미적 무관심성의 관전에서 설명될 공간인식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표상하는 사유공간은 구체적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자신의 작업에 이를 실천하기위해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패러디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는 은연 중 겸재에 대한 선택적 수용의 의지가 담겨 있다.





결국 <겸재 예찬>이 의미하는 것은 조선후기의 화론에 대한 생산적 부정이자 그것을 시간이라는 채로 걸러내어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에 다름아니라 할 수 있다. 윤명로의 작품에서 대상의 외형을 화면으로부터 상실시키려는 시도는 겸재의 예술세계를 차용함으로서 역설적으로 적극적 사유의 가능성을 얻게 되는 효과로 나타난다.

작가는 겸재의 예찬을 통해 자신의 작품에 산수를 간접적으로 암시케 하고 결국 자신은 그러한 산수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사유의 공간으로 유도할 구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겸재 예찬>이라는 표제를 사용한 작가의 의도라면 필자의 지나친 해석일까 모더니즘의 시기를 거친 대부분의 화가가 그러하듯이 작가자신은 과거와 현실의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해 왔다. 이때 전통은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부정의 시각과 담론 자체는 언제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시각을 달리해 보면 윤명로가 겸재를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미학적 이유를 넘어선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작가가 속해있는 환경적 요인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작업실이 자리하고 있는 평창동은 바위와 나무가 절경을 이루는 북한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왕산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작가는 30년 가까이 자연과 더불어 이곳에 살면서 항상 산에 대한 표현의 욕망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일찍이 가시적 대상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서 자연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의지는 마냥 억제될 일 또한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윤명로의 작업은 자연의 음율로 가득 차 있다. 도미니크 샤토(D.Chateau)는 이러한 작가의 예술세계를 <자연의 음악>이라고 쓰고 있다. 윤명로의 작품에서는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느낄 수 있는 ‘표면의 떨림’ 현상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그의 작업과 그 해석의 방식에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작가의 작업에 나타나는 떨림은 울림, 즉 미세한 철분의 입자들 사이에 형성된 에너지로서 파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 자신은 캔버스에 올려진 쇳가루들이 ‘표면에 스며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는 쇳가루가 화면위에서 충돌하고 밀어내는 현상에 대한 발언일 듯 하다. 실제로 그가 사용하는 산화철은 자체의 전이 현상에 의해 짙은 현상에 의해 짙은 회색과 갈색으로 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쇳가루가 산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이동이며 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울림의 세계는 자연이 행하는 숨결과 같은 것이며 곧 자연의 음악이 된다는 생각은 아름답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윤명로의 근작에 나타나는 형식과 내용의 특성을 한마디로 종합해 보면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960년대 초의 <회화 M.10> 시리즈에서부터 <균열>, <얼레짓>을 거쳐 <익명의 땅>에 이르는 작가의 작품세계와 연계시켜 본다면 사유의 공간은 전통적 표현양식을 부정하면서 형성된 새로운 공간이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이러한 전통의 부정적 행위는 역설적으로 정통에 대한 재 해석이라는 차원에서 그것을 승계하는 역설의 구조를 지닌다. 결국 작가는 <겸재 예찬>이라는 화두를 통해 전통에 바탕을 두면서도 새롭고 혁신적인 회화의 예술세계를 실천하고 있다.

- 격월간 코리아아트 2005년 1, 2월호
< 이 글은 윤명로전 (2003. 10.17 - 10. 31 대구 갤러리신라)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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