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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 미술의 모험 - 모순과 역설의 유희-1

김영호

I. 머리글

20세기 후반 서구의 주요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회와 미술관련 서적들을 조사해 보면 당대의 현장을 주도하던 미술이론가와 큐레이터들이 새로운 미술의 매체로서 오브제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단편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1) 오브제의 모험은 단순히 활발한 전시활동이나 의욕적인 출판활동의 차원을 넘어 예술의 정의와 그 한계를 분별하기 위한 끝없는 논쟁을 파급시켜왔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설명될 수 있는 예술’, ‘목적을 지닌 예술’, ‘진보하는 예술’의 신념위에 구축된 기존의 학설에 대한 부정적 관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러한 관점들은 점차 모더니즘 예술의 견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2) 이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한 1960년 전후의 시기에 이르러 그 움직임은 구체화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술은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초래하는 한편 새로운 미술사를 기술하기 위한 제로지점에 서게 되었다.
숨가쁘게 변모하는 현대문화의 발자취를 돌아볼 때, 1960년대에 나타난 오브제 미술의 실험적 경향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에 없이 폭넓은 비젼 속에서 당대의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브제의 위상은 예술작업을 위한 재료로서 또는 미학적 사고의 근간으로서 풍부한 내재적 가능성을 지니면서 다양한 의미생산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나아가 현대미술의 미술지평을 넓히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글의 전반부에서는 오브제의 개념과 유형 그리고 그것이 예술영역으로 개입되는 1910년대의 과정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있다. 하나의 오브제는 그것이 자연물이든 아니면 인공물이든 간에 예술적 주제로 다루어지거나 ‘오브제 미술(objet-art)’이라는 용어로 독립되기 위해서는 다른 예술생산물들과 구분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오브제를 둘러싼 개념은 하나의 명확한 원리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브제 미술의 생산과 해석의 방식은 모순과 역설의 구조를 포함한 다중적 의미체계를 따른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의 이름으로 축성된 오브제들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자신의 원래적 기능이나 물질성으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나타나기도한다. 한편 오브제를 둘러싼 의미생산의 이론적 범주 역시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테크놀로지, 인류학, 기호학, 해석학, 의미론 등등 제한이 없다.
결국 오브제 미술에 있어 논쟁의 초점은 작품의 조형적 형식의 문제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오브제가 예술작품임을 인정하려는 작가 혹은 관객의 인식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브제의 예술적 가치들에 대한 연구는 바로 가치의 체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예술과 반예술 그리고 비예술에 대한 물음은 오브제를 둘러싸고 지속되는 질문의 핵심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 필자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오브제 미술’로의 접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1950년대 오브제 미술의 실험에 대한 비평적 분류는 우리들에게 추상미술의 새로운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면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예술가들은 당대에 전개되는 다양한 상황 그 자체에 몰두함으로서 이전의 비평적 원리들에 연결되어 있던 고리들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누보레알리즘, 팝아트, 컨셉츄얼 아트, 비디오아트, 플럭서스, 아르테 포베라 등의 운동은 이러한 상황의 결과물들이었다.
1960년대 초반의 실험적 오브제미술은 도시 자연이나 기계주의에 그 의미가 집중되어 있었다. 젊은 예술가들은 오브제의 차용을 통해 소비사회에 밀착함으로서 예술창조에 또 하나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쟝 보드리야르가 그의 저서를 통해 분석했듯이 1960년대의 서구사회는 오브제의 소비와 그것에 대한 고발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3) 이러한 분석이 예술과 상관이 없다할 지라도 오브제 소비의 새로운 현상은 인간의 물질적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II. 오브제의 개념과 인식적 원리 4)

어원학적으로 오브제란 단어는 스콜라학파들 사이에 사용되던 라틴어 ‘오브젝툼(objectum)’에서 유래되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오브제란 “우리 앞에 제시되거나 놓인 어떤 것(une chose qui est jetee ou placee devant)이다. 즉 오브제는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제시된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오브제란 단위를 이루는 물질적 실재이며 크기가 제한되고 어떤 용도를 품은 대상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오브제에 관련된 연구서들을 보면 하나의 오브제는 우리가 다루거나 재거나 무게를 잴 수 있으며 거머쥐거나 소유할 수 있는 실물만을 이르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것은 표피적 리얼리티를 벗어나 심연의 진실을 내포하는 추상적 혹은 상상적 원리로도 제시되기 때문이다. 5)
우리의 시각이나 의식 앞에 제시되어 놓인 인식의 대상이라는 오브제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그것의 종류를 분류해 보면 그 유형은 크게 ‘실재 오브제(objet reel)’와 ‘부재 오브제(objet absent)’로 구분될 수 있다. ‘실재 오브제’는 다시 ‘인공 오브제(objet artificiel)’와 ‘자연 오브제(objet naturel)’로 나뉘어 지며 ‘부재 오브제’는 다소 추상적 개념이라 할 수 있지만 그림 속에 ‘그려진 오브제(objet-image)’와 같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루전을 지시하며, 한편으로 그것은 생각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상적 오브제(objet imaginaire)’라 불리우기도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오브제들의 유형과 해석의 원리들은 독단적이거나 차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브제와 맺게되는 관계는 오브제 자체의 물성이나 기능 혹은 용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의존하여 각각 다른 연결고리를 통해 접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오브제의 의미는 그것이 어떤 문맥 속에서 의미화 되기까지 열린 상태로 머물러 있다. 가령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범주에 들어온 오브제는 차별화된 의미소가 될 수 있다. 몇몇 문화이론가들의 경우 오브제는 인간 존재의 의미들과 연계시키고 있다. 가령 롤랑 바르트는 “오브제는 세상을 사는 인간들의 서명이다(Lobjet est la signature humaine du monde)”라 하여 인간과 오브제 그리고 세계 사이의 비평적 시각을 의미론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뒤에 살펴 보겠지만 인간과 세계 사이를 잇는 오브제는 관자의 심리적 인식영역으로 진입되면서 ‘일상의 신화’를 이루는 요인들로 작용한다. 6) 롤랑 바르트는 이를 위해 오브제에 기호학적 분석을 시도함으로서 외부세계로 투영된 오브제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체계적으로 진단하였다. 7) 그가 제시한 오브제의 해석방식은 우리들에게 현대미술작품을 둘러싼 쟁론의 체계를 이해하는데 기여하고 나아가 인간 사상의 구조를 파악케 하는 길잡이로 평가되고 있다.

III. 오브제 미술, 그 역설적 자유

20세기 전반기에 도상학 연구를 통해 해석학의 일반론과 기호학의 발전에 기여했던 독일계 미국인 미술사가 어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1955년의 저서 『예술작품과 그 의미』에서 “모든 오브제들은 그것이 자연물이든 아니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이든 미학적 방식(le mode esthetique)으로 인식될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8) 이러한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오브제에 대한 비평적 접근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한 토양이 되고 있다. 사실 하나의 오브제는 그것이 예술작품이든 아니든 또는 고급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미학적인 접근의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오브제를 둘러싼 기본적 규정을 내릴 수 있다. 즉 예술가는 오브제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브제에 적용된 최초의 의미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브제에 대한 분석의 원리는 한마디로 규정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제시와 재현의 유희적 행위”속에서 이루어지고, 오브제를 둘러싼 “상업적 물신숭배와 예술종말론(예술극복론)의 역설적인 접합”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오브제가 제시하는 비평적 담론의 가능성을 일깨우고 있다. 9)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듯이 “예술작품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메시지를 지니며, 하나의 기표(signifiant)는 다수의 기의(signifie)들과 공존하고 있다” 10) 따라서 우리는 이 메시지의 불확실성이 어떻게 작품제작과 비평의 명백한 원리가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세기초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내세우는 무질서(desordre)와 우연(hasard) 그리고 모순(paradoxe)의 개념들은 이러한 불확실성의 원리들을 규정하는 요인들로 나타날 것이다.

예술창조의 영역 안에서 오브제가 처음으로 등장한 1910년대에 이르러 일루저니즘의 문제에 물음을 제시하면서 시작된 새로운 실험의 방향은 크게 관례적인 구상적 형태로 부터의 근본적인 탈피와 새로운 매체들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유물론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존재와 사물의 문제를 실험적 예술의 실천적 비젼으로 영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우리는 오브제 미술의 발현을 한계상황에 봉착한 회화예술과 그를 둘러싼 미학적 개념에 대한 대체물로 제시될 수 있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브제 미술의 발현은 전개되는 근대적 삶을 수용하지 못하는 과거의 미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오브제 미술이 단순한 시각적 혁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 혁명과도 연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세기 초반의 전위적 물결 속에서 야기된 전통적 조형방식으로부터의 단절은 1912년에서 1913년 사이에 입체파의 콜라쥬와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와 함께 나타난다. 이들이 사용하는 오브제는 표현방식이나 개념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경험과 시각적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20세기 미술을 새롭게 전개시키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도 전통적인 방법에서 과감히 일탈하여 시각체험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들이 시작한 모험을 이어받아 오브제를 몽환과 환상의 영역으로 이끌었고 그것에 상징적 개성을 불어넣었다. 이들이 발견한 새로운 조형형식과 그 논리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나 오브제 미술이라는 관점에서 20세기 후반에 펼쳐질 다양한 미술의 실험적 제 경향들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므로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912-1913년경 분석적 큐비즘에서 종합적 큐비즘의 시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들의 작품에 처음으로 실재 사물을 도입했다.(도1) 그의 화면에 생경하게 부착된 오브제들은 물감 텃치나 몇 개의 드로잉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입체주의의 조형언어 발전과정의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20세기의 예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11) 이렇듯 입체주의 화가들에 의해 실현된 콜라쥬는 예술 창조활동에 있어 개념 뿐만 아니라 기법의 확장을 초래하게 된다.
결국 입체주의자들의 정물화와 함께 형상적 오브제는 기능적 특성을 점차 상실하고 화면에 조형적인 요소들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시각적 대상으로 환원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자면 네덜란드 정물화나 샤르댕의 작품에서 등장하던 일상적 사물들은 이제 화면의 구도나 물성을 드러내기 위한 조형적 요인으로 환원되기 시작하였다. 궁극적으로 화면에 그려진 허상적 이미지들은 입체주의자들에 이르러 부분적으로 실제 사물들로 대치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나아가 작품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물성을 지닌 독립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스스로 하나의 실재(une realite en soi)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체주의자들의 콜라쥬는 객관적 실재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화면의 표피에 접착된 오브제들은 관객의 시각을 통해 인식되는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실재 오브제의 존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화면의 주제를 위한 보조적 기능 안에서 사용됨으로써 우리의 인식을 시각적 원리 속으로 유도하기 때문이었다. 피카소나 브라크의 최초의 콜라쥬 작품들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의도가 입체주의의 논리에 집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의 작품은 물질적 리얼리티의 표현과 실재 사물의 변형에 따른 구조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는 바탕과 주제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결국 그들은 타블로-오브제가 하나의 리얼리티로 인식될 수 있는 종합적인 인식의 지점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콜라쥬는 복합적인 의미체로 인식되기를 희망한다. 피카소에 있어 그것들은 일종의 정신속임(trompe-lesprit)의 장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지와 그 표시(son signe), 오브제와 그 개념(son idee), 진실과 거짓 그리고 모방, 형상(la forme)과 텍스추어 사이의 개념적 유희를 주관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의 영역에 끼어든 오브제들은 인습적으로 행해지던 바라보기의 한계를 각성시키고 그림의 표면을 확인하는 데 공헌하게 되었다. 입체주의자들의 콜라쥬는 그 후 이차원적 평면을 새롭게 파악함과 동시에 타블로의 조각적 효과를 드러내는 새로운 테크닉으로 각광을 받았고, 뿐만 아니라 회화와 조각에서는 여태껏 찾을 수 없었던 다양한 의미들을 파생시키는 매체로 자리잡게 된다.
1913년 귀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예술’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화가들이 사용하는 마티에르에 어떠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 예를 들어 파이프, 우표, 우편엽서, 촛대, 납을 입힌 천조각, 칼라(faux cols)등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12) 피카소와 브라크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작품을 위한 재료로써 신문, 성냥상자, 골판지, 끈, 염색된 천, 명함 등 대부분의 일상용품들을 도입했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에 어떠한 사물이든 도입하면서 그것이 지닌 물질적 리얼리티를 생경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오브제 사용은 여전히 회화적 또는 조각적인 영역 즉, 조형적 언어 속에 머물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작업방식은 여전히 재현적 형식이나 일루전의 문제를 벗어나 있지 않았음을 볼 때 쉽게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아폴리네르가 지적했던 것처럼 입체주의자들의 낯설고 생경하고 잡다한 물질들은 어떠한 격조를 부여받게 되었다. 작가들은 물질들의 개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에 구조적 견고성과 품위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1912년에서 1914년경에는 피카소나 브라크 누구도 정치참여에 관심이 없었고 그들의 작업은 사회적 현상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작업은 카페 주변이나 화가의 아틀리에로 제한되어 있었고 외부적 리얼리티를 표상하는 데 대한 일종의 회피적 태도를 보여준다. 입체주의자들의 오브제는 형식적 과정과 타블로 안의 리얼리티에 동화되었던 것이다. 만일 입체주의자들의 콜라쥬가 당시의 미학에 대응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큐비즘의 논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잡다한 재료들을 작품에 도입하는 콜라쥬의 발명으로 예술가들은 전통적 조각의 개념과 형식에 문제들을 제기하게 되었다. 입체주의자들 중의 다수는 콜라쥬 작업과 동시에 조립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오브제에 관한 연구의 또 다른 기법인 아쌍블라쥬를 새로운 창작의 원리로 태동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페인팅과 콜라쥬 그리고 조각의 세 기법을 작품 제작에 번갈아 사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게 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피카소는 점차 새로운 시리즈를 실행하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실재 오브제’와 ‘그려진 오브제’ 그리고 ‘조각된 오브제’등 여러 차원의 리얼리티를 병렬상태로 제시함으로써 모호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를 가리켜 “순수한 시적 탐구들(recherches proprememt poetique)”이라 명명했다. 그의 작품들은 오브제-조각의 고정관념을 자유롭게 해체시켰으며 사물에 대한 보는 이의 순간적 관점과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그 의미들은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마지 로웰(Margit Rowell)에 따르면 이러한 입체주의자들의 성과는 '지각적 예술에서부터 개념화된 예술로의 변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13)

예술과 반예술 사이의 경계를 집요하게 파해치는 행위는 다다에서 본격화되었고 예술적 표현 방식을 위해 차용되던 오브제가 이제 개념화된 사건을 야기시키는 매체 자체로 다루어지는 결정적인 시기를 맞게 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러한 성상파괴의 행위는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와 함께 시작되었다. 레디 메이드라는 용어는 뒤샹이 미국에 체류중이던 1915년에 만들어졌는데 용어가 명명되기 이전에 그는 이미 단순한 심심풀이(simple distruction)로 자전거 바퀴(도2)와 병 건조기(도3)를 1913년과 1914년에 이미 탄생시켜 놓은 상태였다. 마르셀 뒤샹이 레디 메이드라는 이름으로 선택한 최초의 오브제는 ‘부러진 팔에 앞서서’라는 글이 적힌 1915년의 제설용 삽(la pelle a neige)에서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뒤샹은 그의 레디 메이드가 관습적인 서술의 대상에서 벗어나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즉, 그의 오브제는 예술의 개념을 파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표현수단임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의지는 샘이라 명명한 남성용 변기에서 극에 달하게 된다. 그는 이 포르셀린 재질의 위생용구를 익명을 사용하여 1917년 2월에 개최된 제1회 인디펜던트 작가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에 출품하기를 시도했다. (이 조직은 전해에 창립되었고 뒤샹은 주요 창립 멤버중의 하나였다.)
이 사건은 레디 메이드를 대중의 영역으로 영입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르셀 뒤샹은 후에 이 사건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일어난 것은 바로 이것이다.” 14) 그의 무정부주의적 사상은 그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917년 뉴욕에서 창간했던 장님(The Blindman)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통해 전파되었다.
마르셀 뒤샹은 전통적인 예술규범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음모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성상 파괴론자였다. 생경한 물건을 예술적 매체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입체주의자들이 콜라쥬를 통해 화면의 리얼리티에 주목함으로서 예술창조의 영역을 넓히는 데 공헌했다면, 뒤샹은 레디 메이드를 통해 기존에 확립된 예술창조의 방식들을 파괴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점유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 부쳤다고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의 생산된 오브제들은 따라서 예술적 승화의 측면보다 지적 논쟁을 위한 가치들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IV. 레디 메이드의 딜레마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에 나타난 일반적 의미들은 파라독살하고 모순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모순적이라 진단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반회화 또는 반예술을 내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차대전 이후의 현대미술가들 거의 대부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레이 메이드를 둘러싸고 있는 의미들을 검색하는 일은 현대미술의 지속과 단절의 모순적 구조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요소들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거부의 논리(la logique lexclusion)를 확정적으로 제기함으로써 반예술의 개념으로 결론지어지는 미학의 부재를 선언하고 있다. 마르셀 뒤샹은 자신이 오브제를 선택함에 있어서 그것의 가치평가도 없고 중화의 상태에서 그리고 어떠한 미학적 동기의 부여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령 그의 <자전거 바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작업실에 뒹굴고 있었고 그것을 다시 의자에 결합하게 된 배경은 상황적(circonstanciel)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반미학적 태도는 오브제들이 갤러리나 미술관에 전시 되고 상업적 유통과정에서 조각작품과 함께 놓이게 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제기의 방법론(la problematique)이 되었다. 장 클레르는 이에 대해 불확정성 관계(relation dincertitude)라 명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레디 메이드를 둘러싼 문제들은 불합리와 모순을 토대로 한 미학적 개념들을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병 건조기나 변기가 실험적 조각 작품으로서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분명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 이들 레디 메이드들을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의 구성적 작품이나 브랑쿠지의 광택 나는 철제나 대리석 작품들의 우아미와 비교할 때 순수 시각적인 차원에서의 차별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에서 제기되는 물음은 과연 예술작품은 그 자체에 불변의 가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태도가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인가를 따져보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질문은 사실 레디 메이드를 둘러싼 질문이자 모더니티의 파라독살한 얼굴들에 겨냥되어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15) 역사적 문맥에서 일반적 예술의 개념을 서술하는 곰브리치의 시각에서 본다면 대문자 A로 시작하는 순수예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예술가들이 존재할 뿐이라는 지적은 일면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 16) 이러한 그의 생각은 예술의 본질적 원리는 존재하지 않고, 예술이냐 아니냐에 대한 결정은 우리들 자신의 의사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위와 같은 관점은 오브제가 예술과 비예술의 틈새에 존재하는 비논리에 대한 어떤 논리적 정당성을 보장하고 있기도 하다.
둘째, 마르셀 뒤샹이 레디 메이드를 통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원리는 미나 추의 개념에 대한 작가의 무관심성(indifference)이다. 그는 하나의 오브제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오브제에 인상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즉, 레디 메이드 선택은 억매이지 않는 비규범적 즐거움과 동시에 좋고 나쁜 취미의 부재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7) 그러나 내세워진 무관심성이란 일종의 합의(consensus)에 의해서 규정된다. 선택은 어떤 방법에 의해 이루어지든 순수성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결국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무의미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그의 오브제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표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세째, 결국 예술가에 의해 선택되거나 부여된 레디 메이드의 의미는 오브제를 둘러싼 기존의 의미들을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하나의 오브제를 선택하는 단순행위에 의해 예술가는 자신의 개념적 논쟁을 제기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레디 메이드라는 영역으로 접속된 오브제는 ‘제시의 유희’에 의해 원래적 신원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태도는 뒤샹으로 하여금 하나의 오브제에 새로운 개념(une pensee)을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새로운 제목을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야기시키는 방식이다. 그런데 예술가의 선택은 독자적인 산물이 아니다. 입체주의자들의 정물에서부터 샤르댕이나 그 훨씬 이전의 작가들에 있어서도 오브제들은 예술적 주제로 영입되기 위해 그것의 용도적 기능이 변화되어 왔다. 오브제들은 항상 예술가 자신들의 변형적 지각 속에서 선택되었다. 레디 메이드와 일반적 예술작품이 동일하게 오브제를 선택하고 그것의 원래적 기능을 변모시킨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재현’과 ‘제시’라는 차이 또는 ‘예술가의 기능적 작업의 존재’와 ‘기능적 작업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네째, 레디 메이드의 제시는 오브제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기능과 가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오브제를 그것의 기능적 문맥에서 이탈시켜 놓거나 또한 심리적인 전이(轉移)를 유도함으로써 그것을 또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술가에 의해서 단순히 선택된 레디 메이드 자체는 분명 예술작품이 아니다. 뒤샹 자신에 의하면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주의해서 쳐다보지도 않은 물건에 불과하다. 18)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레디 메이드는 그것이 지닌 평범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명히 어떤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주목해 보면 그의 소변기는 살롱의 조각대 위에 설치되어 있고, 벽 부착용 망토걸이(Trebuchet, 1917)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으며, 모자걸이(1917)는 끈에 매달려 설치되었다.(도4) 레디 메이드가 제대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오브제의 원래 용도를 반드시 알아야 하며 또한 그것을 둘러싼 개념적 유희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레디 메이드들을 제목을 설정하여 미술관에 보내면서 마르셀 뒤샹은 오브제들의 미학적 가치들은 기관(institution)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파리1대학의 교수이자 미술사가였던 마크 르 보(Marc Le Bot)는 레디 메이드에 의해 야기된 미술의 위기에 관한 논쟁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다. 그는 지상 논쟁에서 이중적 가치는 작품의 본질이 아니며 기관에 의해 수여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19) 만일 우리가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태도 안에서 모든 미학적 상업적 가치들에 대한 거부 의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의 거취는 오브제로 하여금 그것의 용도적 가치를 상실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관 안에 전시된 모든 작품들의 가치를 동시에 전복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술관에 의해 받아들여짐으로 해서 그의 오브제는 스스로를 변신할 뿐만 아니라 미술관 안의 모든 작품들을 평속한 오브제들로 변신시킨다. 이것은 분명히 예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아이러니컬하며 폭력적인 노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레디 메이드는 기존의 모든 가치들을 파괴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이 부정될 수 없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성상파괴론자로서 마르셀 뒤샹의 모든 제스추어는 예술과 반예술 사이의 극단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명상과 실천, 단절과 지속의 틈새에서 논란의 소재가 되고 있다. 레디 메이드는 전투의 접점상에 위치해 있으며 1960년대에 새롭게 전개되는 예술개념에 원천을 이루기도 한다. 일련의 작가들은 그가 남긴 오브제의 문제점을 당대의 사회현상과 결부된 하나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재론을 시도한다. 그들은 오브제를 둘러싼 예술적 가치를 당대의 불확실한 문화적 현상과 결부시키며 재론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들은 두 가지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 뒤샹을 승계하는 단절의 태도와 뒤샹과의 차별화를 위해 실제적 개념을 추종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마르셀 뒤샹의 도전적 개념에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데콜라쥬나 아쌍블라쥬 그리고 다양한 오브제 사용의 예들에서 그들 자신의 어법들을 발견하게 된다. 레디 메이드는 1960년대 미술의 운명과 전개과정에 깊숙히 개입하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오브제의 제 경향들은 미학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의 새로운 유형들을 재정착시키게 되고 나아가서 그것은 발전하는 인문과학적 성과들과 긴밀하게 연계를 가지게 된다. 뒤샹에 의해 출현된 신화는 드디어 20세기 후반의 예술을 규정하는 일반적 언어의 하나가 되었다.







1) 1990년을 전후한 당시의 대표적인 미술관 전시회와 학술지의 특집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프랑스국립근대미술관 : “장 팅겔리”(1987), “다니엘 스포에리”(1990), “레이몽 앵즈”(1990), “앤디 워홀”(1990), “예술과 광고”(1990-1991), “베르트랑 라비에”(1991), “장-뤽 빌무스' (1991), ”마니페스트“(1992)
- 파리시립근대미술관 : “백남준”(1989), “개념미술에 대한 하나의 관점”(1989-1990), “피에로 만초니”(1991), “피노 파스칼리”(1991)
- 프랑스국립갤러리 쥬드 폼므 : “마르셀 브로타에스”(1991-1992), “마샬 레이스” (1992-1993), “타키스”(1993)
- 님므 미술관 : “20세기미술 속의 오브제”(1993), 
- 보르도 현대미술관 : “장-피에르 레이노”(1993)
- 미술전문지 에스프리(Esprit) : “현대미술의 위기: 오늘의 미학적 판정의 척도는 무엇인가?, 레디메이드를 시작으로”(1992년 2월 발행 179호와 1992년 10월 발행 185호)

2) Antoine Compagnom, Les cinq paradoxes de la modernite, Paris, Seul, 1990.

3) Jean Baudrillard, La societe de consommation, Paris, Denoel, 1970.

4)‘오브제의 개념과 유형’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할 것 ; 김영호, “오브제의 기호학적 해석-마르셀 브로타에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14집, 2000년 하반기, pp69-89.

5) 대부분의 사전에서 오브제는 1.사물 2.주제(sujet) 3.목적 등의 다중적 의미를 지닌 단어로 설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병이나 찻잔처럼 “눈앞에 제시된 것” 뿐만 아니라 사랑이나 행복처럼 특정한 주제에 관해서 “생각되어진 것”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6) Roland Barthe, 'Le monde-objet', in Essais critiques, Paris, Seuil, 1964, pp.19-28.

7) Roland Barthes, Laventure semiologique, recueil de textes, Paris, Editions du Seuil, 1985.

8) Erwin Panofsky, Loeuvre dart et ses significations, Paris, Edition Gallimard, 1969(1955), p.38.

9) Jean-Pierre Charpy, Lobjet pictural de Matisse a Duchamp, Paris, Edition du CNRS, 1976, dans la page dargument.

10) Umberto Eco, Loeuvre ouverte, Paris, Editions du Seuil, 1965(1962), p.9.

11) Clement Greenberg, Art et Culture, Paris, Editions Macula, 1988(1961), p.81.

12) Guilaume Apolinaire, 'Pablo Picasso' (14 mars 1913), Chroniques dart, 1912-1918, reedition, Paris, Gallimard, 1960, pp.367-370.

13) Margit Rowell, 'Cubisme, Futurisme', Catalogue de lexposition Quest ce que la sculpture moderne, MNAM, 1986, p.26.

14) Dans lExpress, 23 juillet 1964, no 684, cite par Jean Clair, Marcel Duchamp, catalogue raisonne, Paris, MNAM, 1977, p.9.

15) Antoine Compagnon, op. cit., p.131.

16) Ernst Gombrich, Histoire de lart, Paris, Flammarion, 1982(1972), p.4.

17) Pierre Cabanne, op. cit., pp.84-85.

18) Alain Jouffroy, Conversation avec Marcel Duchamp(1954-1961) ; Une revolution du regard, Paris, Gallimard, 1964, pp.118-119.

19) Mark Le Bot, 'Marcel Duchamp et ses celibataires, meme', Esprit, no 179, fevrier 1992, p.13.

20) Catherine David, 'Raymond Hains', Catalogue de lexposition Raymond Hains,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1990.

21) 우리는 제1장에서 이브 클랭의 작업을 상상적 오브제의 한 유형으로 논한바 있다. 여기서 그의 모노크롬 작품은 모든 오브제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그는 해면과 같은 실재 물질을 사용하기도 한다.

22) 1948년 알랭디(Allendy) 화랑은 그의 추상작품들인 “Photographies hypnagogiques' (반수(半睡) 상태의 사진)을 선보였는데 이것은 골이 진 씨줄 대안렌즈를 통해 바라보도록 특수 안경을 관객들에게 제공하였다.

23) 1947년과 1949년 사이에 앵즈는 단편영화들을 다수 제작하였는데 주제는 광고 이미지들로 채워진 도시 위에 설정되어 있었다.


24) 전시도록 Yves Klein,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1983, p.263.


25) 전시도록 Yves Klein,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1983, p.263.

26) Ibid.

27) Ibid.

28) Dominique Bozo, “Orgueil et angelisme', Catalogue de lexposition Yves Klein, op. cit., p.7.

29) Pierre Restany, 'La pris en compt realiste dune situation nouvelle“, Catalogue de lexposition 1960- les nouveaux realistes,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1986, p.21.

30) - 팅겔리: 1959년, 제1회 파리비엔날레에 그의 마지막 그림 그리는 기계인 “메타마틱 17”을 출품. 이 기계는 모터에 의해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팔을 만들어 준비된 종이 위에 연속적으로 드로잉을 실행하며 가위에 의해 완성된 작품을 자동적으로 절단하도록 설계되었다.
- 앵즈: 1959년, 같은 비엔날레에 파리의 거리에서 옮겨온 벽보판 “예약된 장소들의 울타리”를 출품.
- 아르망: 1960, 이리스 클레르 화랑에서 개인전 “채움(Le Plein)”을 개최. 그는 화랑공간 전체를 각종 폐품으로 가득 채웠다.
- 세자르: 1958년 “살롱 드 메”의 조각분과에 정방형으로 압축시킨 1톤의 자동차를 출품.
- 이브 클랭: 1958년, 이리스 클레르 화랑에서 개인전 “텅빔(Le Vide)”을 개최. 그는 화랑공간 전체를 완전히 비웠다.

31) 출품작가들은 파리의 아르망, 세자르, 앵즈, 팅겔리, 이브 클랭, 니키 드 생팔등과 뉴욕의 라우센버그, 자스퍼 존스, 스탕키비츠, 챔벌린, 본테쿠(Bontecou), 스리사(Chryssa)등이었다.


32) Michel Giroud, “Le Nouveau Realisme', Art Press, 1976, p.30.


33) Tilman Osterwold, Pop Art, Cologne, Benedikt Tascen, 1990, p.116.

34) 파리국립장식미술관의 프랑스와 마테(Francois Mathey)는 실험미술을 지지하는 당대의 유일한 미술관장이었다. 지원 행정가였다. 다니엘 코디에 화랑은 1964년 프랑스 미술시장의 빈약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Jean-Paul Ameline, op. cit.,, p.79.)

35) Ibid.

36) Marc Le Bot, 'De lart comme relation amoureuse', Esprit, n°2, 1986.


37) Jean-Olivier Majastre, 'Sociologie de lart, art de la sociologie', Art et Contemporaneite, Bruxelles, Editions La Lettre Volee, 1992, p.10.


38) Antoine Compagnon, op. cit., pp. 143-144



- 현대미술학회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8호>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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