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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환경미술의 현황과 전망

김영호

환경미술의 조건

환경미술이란 ‘작품을 그 자체로서 완결된 것이라 여기지 않고 그것이 놓인 주변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미술’이라고 되어 있다. 이 사전적 문귀는 환경미술품의 의미를 규정하는 기본인 동시에 그것의 기능과 가치를 진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환경미술의 문제점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관계의 미학을 소홀히 하는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환경미술품으로 제시된 작품이라면 그것이 조각이든 회화이든 아니면 첨단의 매체를 이용하든 자연오브제를 이용한 설치작업이든 간에 주변공간과의 관계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비단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의 입장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의 입장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할 기준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점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환경미술에서 다루어지는 ‘환경’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오늘날 주된 관심이 되는 것은 도시환경이다. (물, 숲, 초원, 바다 등 자연환경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 미술이 아닌 환경보호운동의 차원에 머무르는 한계를 보인다. 환경미술과 환경운동은 별개의 차원으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도시화가 가속화 되면서 대형 마트나 사무용 빌딩 그리고 주거지로서 아파트 단지가 폭증하고 도시환경은 척박하게 변모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청계천 복원사업이 대규모로 추진되고 환경미술에 대한 중요성이 공공적 측면에서 첨차 강조되고 있는 것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의 차원에서 도시 환경미술의 기능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은 뒤에 살펴볼 ‘장식물’ 운운하는 용어사용이나 제도적 취약점에서 드러나고 있다.

환경미술이란 결국 도시와 미술 그리고 인간의 관계성을 통해 노동의 현장과 주거환경을 쾌적한 공간으로 조성하고 문화적 공간으로 가꾸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국내외 도시를 여행 하면서 한점의 조형물이 그 주변 공간을 통째로 바꾸는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파리 도심의 생라자르 역전 광장 한가운데 설치된 아르망의 가방탑과 시계탑은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시적 청량제 역할을 하는 대표적 작업으로 소개될 만 하다. 역사를 마주보고 쌓아올린 여행용 가방이나 각각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들의 집적물은 여행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역전 광장을 단숨에 일상적 공간에서 낭만적 공간으로 변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망의 작업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천안시 도심에 자리한 고속버스 터미널에 <수백만마일>이라는 제목으로 설치된 조형물이 그것이다. 자동차의 축을 수백개 쌓아놓은 작업은 높이가 20미터에 이르는 기념비적 설치물로서 터미널 주변의 도시공간을 새롭게 변모시키는데 공헌하고 있다.

환경미술품이 주변환경과 결합하는 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앞서 살펴본 아르망의 경우가 산업오브제를 쌓아놓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면 다니엘 뷔랭의 경우는 보다 적극적으로 특정 장소와 공간에의 개입을 시도한다. 프랑스의 대표적 개념미술가의 한사람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적인 환경미술품은 정부지원 공공프로젝트로 건립된 팔레 루와얄의 대리석 기둥작업 <두개의 고원>으로서 역사적 건물의 안뜰을 파리장과 여행객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수직의 색띠를 대리석 기둥에 반복적으로 부착한 단순하고도 추상적인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소위 사변적 행위를 건축적 구조물에 가함으로서 그것을 미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라 할 것이다. 결국 환경미술은 팝아트와 미니멀아트 그리고 개념미술 등의 미술사적 문맥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경미술은 도시의 미술이자 관계의 미학을 지닌 문화적 생산물이며 나아가 환경과의 상관성을 연구하는 생태학적 미술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환경미술의 기능

도시를 중심으로 한 환경미술의 기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행을 하다 마주치는 고대의 분수조각이나 기마상 그리고 승전비 같은 조형물들은 환경미술의 기원을 이루는 조형물로서 ‘종교적 혹은 정치적 기능’을 지닌 것들이다. 그러나 환경미술이 독립된 조형영역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로 되어있다. 예술가들이 조형적 자율성의 과정을 거쳐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적 현실과 환경의 변화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환경의 변화란 도시팽창에 따른 환경의 오염과 권위적 사회제도에 대한 일탈의 움직임이었으며 예술적 차원에서는 예술적 자율성이 키워놓은 숨막히는 미술관의 횡포에서 벗어나 도심의 거리와 해변 등을 선택했던 일련의 작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는 환경미술이 기존의 굴레에서 잍탈 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대변하며 따라서 미술관용의 전통적인 조각이나 회화의 범주와는 다른 형식을 차용하게 되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환경미술의 기원을 보면 민속신앙과 연계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장승이나 솟대 그리고 돌하르방 등과 경복궁을 지키고 있는 광화문 앞의 해태상 등이 좋은 예이다. 특히 해태상은 동물조각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한양천도 당시의 풍수지리 사상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한다. 즉 선악을 판단하며 불을 먹고 사는 상징적 동물로서 대문앞에 설치되면 화재를 방지하고 남방의 열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는 환경미술의 ‘주술적 기능’을 알리는 가장 훌륭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광화문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세종로 복판에 설치된 이순신 장군상도 환경미술의 ‘역사적 기능’을 담당하는 작품이다. 그 동상으로 인해 네거리의 포인트가 생겼을 뿐 아니라 역사적 기운을 맴돌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각상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면서도 그것이 설치된 장소와 연계되는 환경미술품이 되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사회적 기능’을 지닌 도시의 환경미술품 중에서 대표적인 사례는 강남의 포스코 건물 앞에 설치된 <아마벨>이라는 이름의 작품을 들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으로서 높이 9미터에 30톤이나 되는 고철을 쌓아놓은 작업인데 찬반론이 분분한 스켄달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실패작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은 그것이 도시환경을 쓰레기 처리장으로 변화 하여 혐오감을 준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에 대가로 치룬 높은 비용이 적절치 않다는 소리도 한몫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은 그것이 급진적 산업사회를 달려온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상징하고 있으며 산업화에 대한 역설적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철덩어리가 도시공간을 혐오적 환경으로 타락시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진선미의 기준이 붕괴되어 위악추가 예술의 화두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현대미술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것은 엄연한 의미생산의 구조를 지닌 환경조형물로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상의 사례를 보면 환경미술의 주요 기능은 시각적 쾌적함을 제공하는 심미적 기능 이외에 종교적, 정치적, 주술적, 역사적, 사회적 기능이 포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지역정체성을 표현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기능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상징탑이나 추모비 등이 그것인데 이 경우는 보다 복합적 의미를 지닌 환경조형물로서 소규모의 환경조각과는 다른 의미구조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환경미술의 문제

환경미술의 개념과 기능에 대해서 작가와 대중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국내 도시 곳곳에 설치된 작품들에 실재로 적용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환경조형물의 현실을 둘러싼 작가의 당위성 상실 등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작가만을 탓하기에는 주변적 여건이 너무 척박하다. 건축주의 무관심이나 건축법의 한계 그리고 정책의 부재에서 운영제도에 이르기 까지 총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법제의 문제점을 들어 보기로 하자. 환경미술의 대부분은 건축물 1%법에 의존하여 제작 설치되고 있는데 이는 건축주가 해야 할 일종의 의무조항으로 인식되어 예술성 따위는 고려 대상의 밖이다. 이 법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도시미관을 높인다는 취지로 건축비용의 1%에 해당하는 액수를 건축물 미술장식물의 설치에 쓰도록 정한 것인데 최근 그 비율이 하향 조절되어 있지만 그나마 공공미술의 유일한 재원으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품의 소유권과 구입권은 건축주가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건축주의 의지가 작가의 선택이나 작품경향에 절대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공공성을 지닌 사업이라는 이유로 시당국이 미술장식품 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으나 그 역할은 예술성이나 환경과의 조화 그리고 안정성 등의 형식적 내용만을 서류상으로 심의하는데 그친다. 좋은 작가의 추천이나 공간과의 관계성을 고려한 작품성향 그리고 예산의 집행 등에 대한 감독의 전문적 주체는 없는 셈이다. 한마디로 건축주의 의지가 작품의 질을 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결과 조형물 제작은 특정작가에게 쏠리거나, 심사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기 설치된 작업과 유사한 성향의 작품들이 난무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장식품 심의에 탈락되는 작품들이 대개의 경우는 ‘창의성’ 부족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환경미술의 문제를 야기하는 또 다른 주범은 방법적으로 건축의 설계나 시공과정과 별개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건축물의 설계에서부터 작가들이 참여하는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국내에서 설치되는 작품의 대부분은 건물이 완공된 후에 임의로 정해놓은 건축물의 현관 언저리나 공원 외부의 빈공간에 작품을 설치하는데, 작가는 조경이나 정원의 구조 그리고 건축물의 조형적 특성을 고려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과정에서 정원설계사와 의견이 대립되어 이미 심어진 나무들을 옮기거나 아니면 이미 설치된 작품의 위치를 타 공간으로 변경시키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는 우리나라의 도시는 환경조형물이 제대로 자리잡을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주범은 소위 난립하고 있는 간판들이다. 도시를 황폐화 시키고 있는 간판들에 의해 웬만한 조형물들은 숨겨진 상태로 방치된다. 특히 밤거리를 번쩍이는 전자광고판은 여행자로 하여금 작품을 대하며 명상의 기회를 완전히 앗아가고 도시인들의 시지각을 마비시키는 도구들로 작용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도시환경 개선을 위한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으나 아직도 광고판이 환경미술품들은 위협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환경미술을 위한 대안

국내 도시환경미술의 문제는 이제 양이 아니라 질이다. 건축법이 실행된 이후에 서울과 근교에 엄청난 물량의 공공시설과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면서 이제 수도권 전체가 조각공원 처럼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바람직한 것이나 그만큼 해결해야할 역기능도 많이 생기고 있다. 그중의 하나는 만들어진 조형물을 보수하고 관리하는 일일 것이다. 조형물 종합관리 시스템을 운영하고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일도 조형물 20년의 역사를 뒤로한 시점에서 필요한 것이다.

환경미술을 위한 대안은 앞서 지적한 문제점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건축물 1%법을 기저로한 개혁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현행 1%법에서 건축주가 부담하는 의무적 금액을 현실화하여 총괄함으로서 ‘환경미술기금’을 운영하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환경미술위원회를 통해 공공장소에 분수조각이라든가 상징물과 같은 기념비적 공공조형물을 제작하는 것이다. 이 경우 건축주는 조형물에 대한 부담과 사후관리에 따르는 책임에서 벗어나고 기금으로 제대로된 공익사업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외국의 경우 국가와 지방정부는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위한 기금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프랑스의 경우 <현대미술기금(FNAC)>이나 <현대미술지역기금(FRAC)>이 그것이다. 환경미술기금의 운영에 따른 기대효과는 정책수립의 효율성을 비롯한 경제적인 측면과 전문적 측면 그리고 공공적 기능의 측면을 모두 충족시키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기업이 주도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활성화 하는 일도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환경의 개선을 위한 노력에 기업들의 참여 역시 국제적으로 진행되어온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한 공공미술프로젝트는 주로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고 국내에도 이미 활성화 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삼성테스코 홈 플러스가 실시하는 공공미술품 설치사업 역시 이 경우에 속하며 시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도시의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지역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맡겨진 공공의 책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환경미술 프로젝트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문제에 따른 대안 마련과 새로운 정책수립에 협력해야 할 것이다.

삼성테스코의 공공미술프로젝트 모음전 ‘아트플러스-홈플러스’(2004)에 게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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