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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럭서스와 테러리즘

김영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펜타곤에 동시에 가해진 가공할 테러사건이 텔레비젼과 신문지상에 생생히 보도되면서 지구촌 곳곳에는 참으로 많은 추론과 진단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한 사건이 세계각국 모든 분야의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경우도 드물다. 문화계에서는 21세기를 20세기와 구분 짓는 이념상의 분기점으로 이번 사건을 규정하려는 입장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고 있다. 이른바 모더니즘의 종말과 새로운 정신환경의 출현이라는 기존의 주장들이 현실적 사건을 통해 재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분명 세계의 질서와 구조는 소련의 붕괴 이후 근본적으로 재편되어 왔고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세계적 재앙 앞에서 예술의 방법과 가치를 진단하기 위한 비평의 틀도 일변하리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글은 미국의 테러참사와 기간을 같이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독일 플럭서스 1962-1994>전을 보고 현대미술에 있어 테러리즘의 적용 가능성과 그 근거를 찾으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테러란 폭력수단을 행사하여 상대를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트리는 행위이며 테러리즘은 폭력을 이용하는 행위를 논리화시킨 사상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테러의 본성이 오랜 시간동안 구축되어진 질서에 대한 파괴와 전복에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미술에 있어 문화적 테러리즘의 자취를 어렵지 않게 추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예술이론이나 미학의 가치를 보호하는 전통적 관습에 대한 파괴와 전복은 사실 근․현대미술의 기관차를 이끌어온 하나의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미술사는 이러한 파괴와 전복의 발자취를 테러리즘으로 표현하는 대신, 혁명이니 전위니 하는 정치적 혹은 군사적 용어로 포장함으로서 그 가치를 긍정적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 예를 들어 곰브리치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를 거쳐 인상주의에 이르는 미술의 성과를 <프랑스 미술의 3대 혁명>으로 진단한 사례나, 모더니즘의 강령 아래 20세기 전반을 장식했던 아방가르드 미술의 제 경향들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미술사의 방법론은 대혁명과 함께 근대에 접어들어 파괴와 전복의 행위가 미래의 이상적 가치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다루어지며 자리잡게 된 하나의 표준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에 등장한 플럭서스 운동은 혁명이나 전위의 이론으로 보호되었던 이전의 미술경향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취급될 수 없을 것이다. 플럭서스는 파괴와 전복을 수단이 아닌 본질로 내세웠으며 그들에게는 모더니즘이 내세웠던 하나의 질서를 갖춘 이상세계의 건설이나 조형적 이념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럭서스 운동의 참가가 들은 무정부주의를 꿈꾸었으며 ‘예술작품이 영구 불멸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감상되고 소유되며 거래된다는 기존의 관습에 의문’을 제기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플럭서스 멤버들은 다다로부터 부정의 피를 수혈 받은 철저한 반예술의 신봉자들이었으며, 기존 관습에 대한 파괴행동은 어떤 통일된 대안을 제기하는 집단적 움직임이 아니라 산발적 행동들을 통해 파괴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테러리즘과 속성을 같이 하고 있었다.

미술에 있어 테러는 기존의 문화권력이 강대할 때 적극적으로 나타나며 테러리즘의 효력은 그 문화권력의 힘에 비례하여 커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원리에서도 플럭서스의 정체는 정치적인 테러리스트의 그것과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이차대전 이후 유럽으로부터 패권의 옥쇄를 물려받은 미국이 국제사회에 드러낸 힘의 과시는 경제, 군사, 문화, 사회, 정치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었고, 그 영향력은 부시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과 다른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고수하는 지구촌의 타자들에게는 하나의 위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응하며 발생한 테러리즘은 문화비평가들의 진단처럼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의 시각을 돌려 플럭서스 운동이 일어났던 1960년대 초의 유럽상황을 보면, 모더니즘미술의 극대화된 양식으로서 추상미술이 당시 미술계를 점령하고 있었다. 프랑스 평론가 미셀 라공이 제기한 ‘공식적 예술(Art officielle)로서 추상’은 서구미술의 새로운 아카데미즘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가운 추상’과 ‘뜨거운 추상’이라는 두 개의 문화적 마천루는 다국적으로 인물들로 짜여진 문화적 테러리스트들에게 어느덧 파괴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플럭서스는 독일에서 발생하였으나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노르웨이의 주요도시들과 대륙을 건너 미국과 극동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광대한 망조직을 형성하였다. 여행과 우편을 통한 작품 및 정보 교환은 이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콘서트와 이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나 전시회와 강연회 그리고 각종 선언문과 출판물 조형물과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들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였다. 이들 모두는 예술장르간의 경계와 영역을 넘나들면서 기존의 미술양식들을 파괴하거나 조롱했다. 플럭서스의 참가자들이 누보레알리즘이나 개념미술과 같은 미술운동에 동시에 참여하기도 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플럭서스는 온전한 본거지와 규율이 없는 집단이었으며 특정한 양식과 미적 기준이 없는 “일종의 정신적 태도”로 알려지고 있다. 그것은 제프리 핸드릭스의 작품 <구름상자> 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크리스텔 슈펜하우어의 지적처럼 “정신나간 인간들”의 신앙이었다. 무가치의 절대를 위한 성전(聖戰)이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였고 어쩌면 도래할 수 없는 이상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전사들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플럭서스 운동에 가담했던 예술가의 대부분은 다다의 세례를 받은 문화의 파괴자들이었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테러리스트들이기를 자처한 적이 없다. (당시 자신이 운영하던 화랑에서 플럭서스 콘서트와 해프닝을 기획했고 작가들을 후원했던 르네 블록에 따르면 플럭서스는 결코 파괴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플럭서스가 ‘듣기와 보기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원했으며 궁극적으로 플럭서스는 ‘일상의 사소한것들의 행복을 의미한다’고 소박하게 말한다.) 그러나 백남준이 관중석에 자리잡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절단한 행위나, 일련의 작가들이 그랜드 피아노를 망치로 부수고 톱으로 절단 내는 행위를 르네 블록이 말하는 ‘습관의 변화’나 ‘작은 행복’의 행동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실재 플럭서스의 기초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던 조지 마키우나스는 반예술의 기치를 내세우며 스캔들을 일으키는데 앞장섰고 몇몇의 작가들은 퍼포먼스 중에 경찰의 저지와 구속을 당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명백한 문화적 폭력이 있으며 파괴와 전복의 의도를 지닌 테러리즘의 행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플럭서스의 추종자들은 또한 혁명가들과도 다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혁명이 기존세력을 타파하고 권력의 전복을 꿈꾸는 투쟁이라면 테러리스트들은 체제를 부인하여 근간을 흔드는 일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완성된 혁명이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반해 테러리즘은 폭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를 감수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플럭서스는 새로운 문화권력의 도래를 지향하지 않았다.

플럭서스의 테러리즘은 근대주의의 종식을 위한 필요악이었다. 이러한 점은 앞서 말했듯이 플럭서스가 전위주의와도 차별화되어야 하는 근거로 보인다. 전위미술의 기수들이 모더니즘의 비호 속에서 새로움을 지향하고 독자적인 형식주의 양식을 구축해 나갔다면 플럭서스의 전사들은 그 새로움을 파괴했으며, 예술의 이름으로 거대하게 구축된 형식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바벨탑이 인간의 교만의 상징이며 신이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인간의 언어를 갈라놓았던 것처럼 마천루는 과학문명에 대한 맹신과 교만의 결과물이었으며 그 결과로 테러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허리우드식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그러나 문화적 파괴와 전복은 수많은 희생을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플럭서스의 작가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폭력의 사례는 현대화단에 극단적이고 혐오스러운 형태의 미술표현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 종말이 완성되었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플럭서스의 한계를 목도하게 된다. 플럭서스는 새로운 문화권력을 지향하지 않으며 그것을 파괴하는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먼바다를 떠돌며 자신을 세우던 연어가 다시 출생지로 회귀하여 알을 토해 내는 일에 자신의 몸을 바쳐 하나의 생을 죽음으로 완성시키듯이 1962년에 태동된 플럭서스는 네트워크의 세계를 떠돌며 모더니즘의 파괴를 완성시키고 역사 속으로 사멸되고 있다. 그러나 미술에 있어 질서와 규율이 다시 형성되고 그것이 또 다른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는 어느 순간에 또 다른 얼굴의 플럭서스가 고개를 들게 될 것이다. 이것 또한 얼굴 없는 테러리즘의 실체이며 플럭서스의 역설과 한계라 할 수 있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개된 전시물들은 당대의 기록, 오브제, 출판물, 영화에 이르는 350여점의 작품과 자료들이다. 그것들은 박제화된 테러리즘의 기록들이며 전시 메카니즘 안으로 편입된 시간의 껍질들로 보인다. 하나 하나의 전시물들에는 당대에 전개되었던 테러리즘의 치열한 파괴행위나 의도가 담겨 있으나 이 모든 것들은 자료로서 제시되고 개념미술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서 현장성이 결여되고 있는 듯 하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온 테러리즘의 잔해들은 미술관의 축성된 기운에 의해 중화되어 생명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제도권의 상징인 미술관의 위세에 의해 무장 해제된 것일까? 모더니즘 문화의 대명사인 미술관은 테러리스트들의 잔해에 엄격한 꾸중을 내리고 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을 의심하는’ 벤 보티에의 칼리그래피나 <매달려있는 바이얼린>의 전치효과는 현상수배 포스터를 내건 경찰서의 벽보처럼 이제 메아리 없는 아우성으로 화석화 되어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테러리즘의 신화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차 있으나 전시물로 제시된 플럭서스의 잔해들은 대중들에게 힘을 잃어버린 화석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세계도처에서 벌어지는 테러리즘의 현장들을 매일 접하고 있으며 가공할 비인륜적 폭력에 이미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미술에 있어서 폭력과 전복의 이미지는 이미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전시도록을 장식하고 있으며 폭력, 마약, 섹스, 권력, 자학, 엽기 등의 이미지는 정보시대의 동영상으로 안방에 공급되고 있다. 볼프 보스텔과 백남준이 이끌었던 TV와 비디오 예술은 정보화 시대가 전개할 위기상황을 예고하며 등장했으나 이제 그들이 염려했던 견제의 상황은 실재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앞에서 이들의 이념을 추종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더 강도 높은 테러리즘을 계획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그러나 로버트 와츠가 “플럭서스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어디에 가든지 플럭서스를 만나게 된다”고 주장하는 점이나 딕 히킨스의 “플럭서스는 자신이 이름을 갖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은 플럭서스가 지닌 가치를 테러리즘과 연계해 해석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플럭서스 운동의 가치를 역사의 흐름이라는 보편성 속에서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1960년대 이후에서 오늘에 이르는 기간동안 플럭서스가 끼친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할 것이다.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곧 유명해지고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콘서트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것은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피아노에 대한 공격은 부르조아 사회와 도덕에 대한 공격으로 보여졌다. 그것은 마치 마르셀 뒤샹이 1910년대에 변기를 세상에 내놓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분위기와 맞먹을 것이다. 그러나 뒤샹을 아버지로 모시며 등장한 플럭서스의 전사들마저도 본래 의도와는 달리 역사 속으로 들어가 버린 상황에서 오늘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부과된 사명은 진정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요셉보이스와 로베르 필로우의 명제와 함께 20세기 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세력을 굳히고 있으나 그것은 플럭서스가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술사의 테러리즘은 종식되어야 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기능과 한계를 이미 진단하고 새로운 미학적 가치나 예술의 기준을 요청하는 시대로 다시 진입해 있는 것이 오늘이라면 플럭서스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이번 뉴욕과 워싱턴의 테러사건을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는 우리의 젊은 작가들과 대중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 출처 / 월간미술 전시와 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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