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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렬 / 적멸 이후, 적멸 속으로, 적멸마저 사라진

고충환

정영렬 / 적멸 이후, 적멸 속으로, 적멸마저 사라진 


적멸 속으로 사라지다


적멸. 적막과 적요 속으로 사라진다는 뜻이다. 완전하게 사라진다는 뜻이고 철저하게 소멸된다는 뜻이다. 절대적인 무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뜻이고, 이를 불교에서는 열반에 든다고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 곧 이 세계에 달랑 나 혼자임을 인식하는 것과도 통한다. 그리고 어쩜 이 절대 고독한 세계마저도 넘어선 어떤 경지며 차원 속으로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이며, 바로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해탈은 윤회의 사슬을 끊고 절대적인 무의 세계 속으로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 세계가 좋은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좋은 것도 아닌 것도 다만 인간의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 인식을 넘어선 인식, 논리를 넘어선 논리의 차원을 인간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다만 여기서 조건이 있는데, 그 차원에 들기 위해선 업을 쌓으면 안 된다. 세속적인 개념으로 치자면 욕망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 프로이트도 사르트르도, 정신분석학도 실존주의도 하나같이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조건으로 욕망(리비도와 자기를 실현하려는 의지)을 든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욕망하면서 욕망을 떨쳐내는 것, 욕망 안에서 욕망 밖에 있는 것, 욕망 안에 욕망의 바깥을 마련하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래서 선사상이다. 흐르는 물처럼, 스스로 그랬고 처음부터 그랬던 자연처럼 인식과 논리를 넘어선 어떤 세계며 차원의 한 원소로 동화되고 스며들고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이 적멸의 세계이다. 


적멸 시리즈_캔버스에 유채


그리고 알다시피 이런 적멸의 세계와 그 세계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선사상이 작가 정영렬의 작업 속에 깃들었고, 그렇게 깃든 연후에는 한순간도 작가의 작업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어쩜 작가의 작업은 적멸을 예비하는 단계와 이후 적멸을 감각적으로 실현한 단계(예술은 실재가 아니다. 감각적인 표상의 형식으로서만 겨우 실재를 암시하고 추체험할 수 있을 뿐)로 나누어질지도 모르겠다. 사후적으로 맞춘다고 하겠지만, 그리고 작가의 다양한 형식실험의 지평이며 성과를 무시한다고도 하겠지만, 제목에 연연하지 않고 작업의 저변에 깔린 세계관을 인정한다면 크게 무리가 없는 해석이라고 본다. 그렇게 작가는 절대적인 적막과 적요와 고독 속에서 평상심을 찾고 평정심(마치 적멸처럼, 절대적인 무처럼 좋고 나쁨을 떠난 항상적인 마음상태)을 유지하는 것, 그림 속에 그 평상심과 평정심의 성좌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그림으로 하여금 그 성좌의 표상이 되게 하는 일에 자기의 온 화력을 투사했다. 그리고 그 투사의 정점에 적멸 시리즈가 위치해 있고, 연이은 한지조형작업은 이런 적멸 시리즈를 심화하고 확장해온 과정으로 볼 수가 있겠다. 



적멸에 이르는 전조


한지조형작업을 보기 전에 먼저 전사를 보자. 어느 날 갑자기 작가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분명 한지조형작업에까지 이르게 한 전사에서의 계기며 동기가 있기 마련이다. 평자들의 견해와 실제로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양상을 종합해보면 정영렬의 작업은 대략 다음과 같이 그 시기가 구분된다. 즉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까지의 앵포르멜 시기,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의 자기형식을 찾기 위한 과도기 혹은 모색기,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적멸 시리즈, 그리고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말 작가가 암으로 작고하기 전까지 한지조형작업으로 풀어낸 적멸 시리즈(실제로는 작가의 다른 작업들에 비해, 특히 캔버스에 그린 적멸 시리즈에 비해 그다지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탓에, 그리고 더욱이 작가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 완전한 형상을 찾아서 계속 씨름하는 과정에 있었던 탓에 제목조차 없이 남겨진 경우가 태반이지만, 정황으로 봐서, 특히 작가의 증언으로 봐서 적멸 시리즈로 불러도 무방할 것. 말을 만들자면 후기 적멸 시리즈?)의 시기가 그것이다. 


풀어보면, 앵포르멜은 전후 유럽의 피폐해진 시대상황을 추상으로 풀어낸 그림이다. 그 영미 권(엄밀하게는 미국이 주도한) 버전이 액션페인팅 혹은 추상표현주의 회화이다. 어감 상 추상표현주의보다는 액션페인팅이 뜻하는 몸 그림이라는 말이 앵포르멜의 원래 의미에 더 가깝다. 즉 피폐한 시대상황이 만들어준 인간성 상실의 경험을 온 몸으로 부닥쳐 그려낸 그림이라는 말이다. 인간성 상실의 경험을 구상적인 표현으로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여기에 새로운 형식추구로 나타난 아방가르드의 실험정신이 맞아 떨어진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하튼 그렇게 50년대 중반 앵포르멜은 국내에 상륙했고(엄밀하게는 당시 국내에 주둔했던 미군에서 흘러나온 라이프 지와 같은 잡지의 문화면을 통해 소개된 미국식 버전의 추상표현주의로 재해석된 경향), 작가는 50년대 말 그 정점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후의 피폐해진 시대상황이며 위기의식을 앵포르멜의 형식에 담아 온 몸으로 풀어낸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그 정신을 계승한 그룹 악튀엘에 몸담고 있기도 했는데, 그룹 악튀엘은 앵포르멜의 소위 뜨거운 추상의 경향을 대변하는 그룹으로서, 기하학적 형식을 통한 소위 차가운 추상을 추구했던 그룹 오리진과는 비교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이러저런 그룹 활동을 했지만, 작가의 그룹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아마도 이러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룹 활동이 내재할 수 있는 집단개성 속에 정작 자기의 개성이 함몰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형식을 찾아야 한다는 자의식이 절실했을 것이다. 얼추 비슷한 수순을 밟아온 동년배의 다른 작가들, 이를테면 앵포르멜로 화력을 시작해 이후 70년대의 모노크롬 회화 경향으로 빠지던지, 개념미술이나 설치 그리고 행위예술과 같은 실험미술을 통해 자기변신을 꾀하던지, 아님 한지조형작업으로 선회한 일부 작가들에 비해 작가의 작업이며 존재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게 된 배경에는 이렇듯 그룹 활동이 화단을 주도했던 시대에 정작 그룹 활동에 다소간 소원했던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저런 이유를 따지기 이전에 자기만의 형식을 위한 고심과, 이를 실현하고 실천하기 위한 자기에의 칩거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그리고 근거 있는 이유랄 수 있겠다. 


그 와중에도 작가는 해외에서 열리는 유명 국제전에 참여 작가로 참여했고, 이를 계기로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 기회는 자기만의 형식을 찾아야 한다는 진즉의 문제의식이며 자의식을 더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모색기 혹은 과도기를 지나쳐오면서 지역적인 것(사실은 지역적이면서 지구적인 것)이며 한국적인 것(사실은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것)에 주목했고, 불교문화며 예술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쯤은 의식적인 것이고, 반쯤은 몸에 밴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렇게 적멸 시리즈에 이르는데, 그 직전 형식이 비록 방법도 형식도 다르지만, 마치 적멸 시리즈를 예비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작가의 적멸 시리즈는 같은 단위구조의 반복패턴이 특징이랄 수 있는데, 적멸 시리즈에서 그 패턴이 다소간 기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면, 이 일련의 그림들에선 그 패턴이 병렬된 띠 그림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마치 리드미컬한 울림이 감지되는 것 같은 유기적인 표현이 차이 나는 점이다. 해서, 작가의 적멸 시리즈는 유기적인 표현에서 기계적인 표현으로, 정감적인 표현에서 관조적인 표현으로, 실제로 어떤 울림이 감지되는 감각적인 표현에서 일체의 움직임을 내부로 거두어들여 다만 움직임을 암시할 뿐인 내재적이고 정적인 표현으로(정적인 가운데 동적인 것을 암시하는 정중동의 표현으로) 진화하면서 마침내 적멸에 걸 맞는 형식을 얻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적멸의 감각적 표면을 경유해 마침내 그 진정한 의미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모든 사물 현상이 그렇듯 감각적인 어프로치가 있는 연후에라야 비로소 이를 근거로 삼아 그 내재적 의미에 이르게 되는 것이 수순이며 이치가 아닐까 싶고, 그 수순이며 이치는 그대로 작가의 적멸 시리즈의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 감각적인 것(띠 그림)이 관념적인 것(적멸 시리즈)의 표상 형식임을 인정한다면 더욱이 그렇다. 그렇게 과도기와 모색기의 끝자락에 나타난 띠 그림은 적멸 시리즈의 본격적인 등장을 예비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적멸 시리즈가 기계적인, 관조적인, 내재적이고 정적인 표현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점이다. 기계적이고 관조적이고 내재적이고 정적인? 뭔가 모노크롬 화가들이 반복적인 과정 속에서 마침내 자기가 지워지고 무화되는 어떤 차원을 떠올려주지 않는가.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같이 시작했다가 저마다 다른 길을 걷게 된 동류의 아님 동년배의 작가들과 그 저변에서 만나지고 있었다. 시대적 감성에 대한 아님 당대적인 그림의 존재방식에 대한 암묵적인 공감이 통했으리라고 보아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작가는 기계적이고 관조적이고 내재적이고 정적인, 일체의 감각적 울림을 자기 내부로 거두어들여 갈무리 한 것 같은, 그리고 그렇게 어떠한 최소한의 미동이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은 고도의 자기 통제력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을 통해 적멸의 관념 세계를 표상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고독과 무와 더불어서 절대적인 적요와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소멸되는 자기를 표상하고 있었다. 


한지조형작업


적멸을 더듬어 찾다, 적멸의 완성


그렇다면 이렇게 문제는 끝인가. 적멸의 세계는 이렇게 그 완성된 형식을 얻었는가. 그리고 다만 그렇게 완성된 형식을 반복하고 변주하는 일만 남았는가. 그렇지가 않다. 그리고 그렇게 그 이후를 위해 불려나온 형식이 한지였고, 작가가 죽기 직전까지 씨름하고 형식실험을 거듭했던 한지조형작업이었다. 작가는 말하자면 한지조형작업을 통해 적멸의 세계를 완성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냐면,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작가의 적멸 시리즈는 기계적이고 관조적이고 내재적이고 정적인 표현이 그 특징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존재가 절대적인 고독과 무, 절대적인 적요와 적막 속으로 사라지는 적멸의 세계를 표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 표상형식인 평상심과 평정심의 성좌를 그림 속에 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밝힌 것처럼 작가를 사로잡은 것은 적멸의 세계였고, 그 적멸의 세계에 이르기 위한 도정이며 과정으로서의 선사상이었다. 미심쩍은 것은 바로 이 도정이며 과정이었고 선사상이었다. 도정이며 과정이 없이 적멸의 세계에 바로 도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령 바로 도달할 수는 있다고 해도, 그 도정이며 과정이 생략된 도달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도정이며 과정을 복원해 도달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 도정이며 과정을 선사상이 품고 있었고, 그래서 선사상이 문제였다. 선사상이란 뭔가. 흐르는 물처럼, 스스로 그랬고 처음부터 그랬던 자연처럼 인식과 논리를 넘어선 어떤 세계이며 차원이다. 그리고 그 세계이며 차원의 한 원소로 동화되고 스며들고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이 적멸의 세계이다. 해서, 뭔가 선사상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것, 이를테면 인위적이지 않은 질감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도달이 보여주고 있는 절대적인 관념세계며 표상형식과는 다른, 감각적인 질료와 그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불려나온 것이 한지였다. 


처음엔 다만 지지대가 캔버스에서 한지로 바뀌었을 뿐, 적멸시리즈 그대로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시 설명을 하자면, 작가의 적멸 시리즈는 똑같은 단위구조의 반복패턴이 특징이다. 이 기계적인 패턴을 얻기 위해 작가는 특별히 고안된 도구를 사용하는데, 그림에 나타난 패턴 그대로 따내 만든 일종의 세로로 긴 형태의 종이 자를 사용한다. 그 종이 자를 캔버스의 표면에 대고 그림을 그리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종이 자를 옆으로 옮겨가면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기계적인 반복패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화면을 긁어낸다든지, 부드러운 붓으로 문지른다든지, 패턴 위에 가필을 한다든지 하는 등의 이러저런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과정이 부가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의 그림을 특징짓는 반복패턴은 이렇게 얻어지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렇게 얻어진 이미지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이다. 그래서 한지로 옮겨왔고, 캔버스 그림보다 상대적으로 더 자연스런 색감이며 질감이며 느낌을 얻을 수가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작가의 작업이 회화와 판화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엄밀하게는 판화라기보다는 일종의 판법을 응용한 회화를 예시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지판 내지 공판법의 변형된 형태며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런 판법의 수용은 향후 작가의 한지조형작업에서 더 전면화하고 본격화한다. 그래서 작가의 한지조형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런 회화와 판화와 판법과의 상호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작가의 한지조형작업에 나타난 요철을 판에 의한 엠보싱으로 보는 경우에는 판법과의 관련성이, 그리고 캐스팅에 의한 일종의 저부조로 보는 경우에는 조각에서의 주조와의 관련성이 부가되는데, 이를 통해 회화의 평면성을 넘어 그 표현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겠다. 


차차 살피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좀 더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한 것 같고, 우선은 작가의 종이작업은 크게 엠보싱이 없는 경우와 엠보싱이 있는 경우로 구별된다. 종이작업을 시작한 초기에 주로 엠보싱이 없는 그림이 제작되어지고 있고, 엠보싱이 있는 경우로 치자면 이후 본격적인 종이조형작업에 집중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종이조형작업 중 대개가 이런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세부적으로 엠보싱이 없는 경우로는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적멸시리즈와의 형식적 유사성을 견지한 작업에서 그 사례를 엿볼 수 있고, 이외에도 그저 한지의 표면에다 붓으로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나간 경우가 엿보인다. 회화가 시작되는 최소한의 근거 내지는 형식지점이랄 수 있는 점찍기 아님 선긋기로 자신을 되돌려 놓는,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을 지우면서(무화시키면서), 대신 회화의 본성이며 본질이 오롯하게 드러나게 한 자기반성적 행위로 볼 수 있겠다. 그 자체를 이러저런 형식요소에서 회화의 이유며 당위성을 찾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공감으로 볼 수도 있겠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세례를 받은 세대라면 한번쯤 거치는 수순으로도 보이고, 작가 역시 그 수순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경우로도 보인다. 


이 작업을 거치면서 작가는 뭔가 평면상에 구현된 회화적 일루전의 경우를 넘어 소재 고유의 질감이며 질료가 손에 잡히는 어떤 차원을 열어 놓고 싶었고, 한국적인 이미지의 이면 말하자면 그 감각적인 표면 이를테면 불상이나 청자 아님 단청과 같은 눈에 보이는 실체를 넘어선 이면에 면면히 흐르는 어떤 정신성의 질감에 이르고 싶었고, 선사상의 자연스런 질료를 통해 적멸의 세계를 완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비록 한지에 입문했지만, 그저 한지만으로는 성에 차지가 않았다. 한지 자체를 만들고 싶었고, 한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작업이며 조형이고 싶었고, 그 작업이며 조형에 자기를 일치시키고 싶었다. 적멸의 세계를 구현하는 방법론 아님 그 세계에 도달하는 과정 상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바로 일루전에서 질감으로, 비전에서 질료로 작업의 축이 옮아간 것이다. 시각적인 차원을 넘어 촉각적인 차원으로 건너간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주와 객의, 주체와 화면과의 거리를 유지하던 것에서 그 거리가 소거돼 하나로 합치되는 차원으로 넘어간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이로써 그 위에 그려질 무엇이 아닌 그 자체를 대상화하고 싶었고, 한지 자체를 일종의 자족적인 오브제로서 제안하고 싶었다. 


한지 자체가 일종의 자족적인 오브제로서 제안되는 차원? 이건 분명 쉬포르 쉬르파스 내지는 아르테 포베라 내지는 일본의 모노하와도 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주지하다시피 쉬포르 쉬르파스는 지지대와 지지체라는 말이다. 그 위에 무엇인가를 그리는 기능으로부터 캔버스를 해방시켜, 그 자체를 자족적인 오브제로 제안하고 있는 것. 그리고 아르테 포베라는 가난한 미술이며 빈약한 미술이라는 말이다. 지리멸렬한 재료라서 가난하고 빈약한 미술이 아니라, 재료 자체가 이미 작업이라고 보고, 재료 고유의 물성을 부각한다는 전략이고 개념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모노하는 물 자체라는 말이다. 물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예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렇게 예술이 가능해지는 실천논리를 최소한으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적어도 작가의 한지조형작업은 한지 고유의 물성을 부각한다는 측면이 결정적이고, 따라서 이러저런 당대의 예술양식이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회화가 가능해지는 최초의 지점 내지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자기를 환원하는 경우(점찍기)와 함께, 다시금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공감을 재확인시켜주는 대목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는 처음에 기성의 한지를 사용했고, 이후 산지에 가서 주문제작한 종이를 사용했고, 그리고 마침내는 종이원료를 구해다가 종이 자체를 아예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고하는 순간까지 그렇게 직접 종이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종이는 그 무엇을 위한 예비단계가 아니었고, 종이 자체가 작업이었고, 종이를 만드는 과정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 자체가 조형이었다. 그 과정을 보자면, 종이원료는 닥이다. 엄밀하게는 껍질을 벗긴 닥을 도구를 이용해 짓이겨놓은 상태로서, 그 조직을 허물 허물한 상태로 유지시켜 놓은 것이다. 작가는 이 원료를 물에 풀어 24시간이 경과한 연후에 사용하는데, 아마도 조직이 더 부드럽고 유연해져서 그 본성이 더 잘 드러나는 탓일 것이다. 그리고 따로 구해온 닥 껍질과 종이원료를 함께 넣고 삶아내면, 조직도 부드럽고 유연해질뿐더러 거뭇거뭇한 닥 껍질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질박한 질감의 종이를 얻을 수가 있다. 흔히 한지가 숨을 쉰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성근 조직 사이로 바람이 통하는 것을 빗댄 표현일 것이다. 대개의 양지가 그렇듯, 분쇄한 가루를 원료로 한 탓에 그 조직이 상대적으로 조밀하고 섬세한 소위 펄프종이에 비해 통풍성이며 통기성이 뛰어나고, 따라서 자연의 본성에 더 가까운 질박한 표면질감이 특징이다. 그 자체, 자연과 하나로 호흡하고 싶어 했던 동양인의 성정이 만들어낸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렇게 종이원료가 마련되고 나면, 이를 채로 떠내 판에다가 대고 부어 넓게 펴 말린다. 그렇게 판 전체를 하나의 질감을 가진 종이원료로 덮어 전체가 같은 질감으로 고르게 분포된 한 장의 종이를 얻을 수도 있고, 다른 질감과 색감의 종이원료를 사용해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진 상대적으로 더 다채로운 표정의 종이를 얻을 수도 있다. 특히 색감과 관련해선 색지 자체를 원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종이가 완성된 연후에 필요에 따라서 색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판에 종이원료를 부어 펴 바르기 전에 먼저 판에다가 안료를 뿌리기도(바르기도?) 하는데, 종이가 완성된 연후에 색을 올리는 경우에 비해 마치 안료가 종이의 조직 내부로 충분히 침윤된 것 같은, 그리고 그렇게 종이와 안료가 일체화된 것 같은 부드럽고 은근한 색감을 얻을 수가 있다. 보다 자연에 가까운 성정의, 표정의, 질감의 종이를 얻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며 형식실험의 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종이원료를 판에다가 대고 펴 말리는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종이를 만들고 얻는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한지조형작업에는 판이 있고 종이가 있다. 한 장의 종이를 얻기 위해 판이 매개가 되어져야 한다. 한 장의 판화를 얻기 위해 판을 매개로 하는 판화와도 통하는 부분이다. 주지하다시피 판을 매개로 한 간접성은 판화의 특징으로서,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 원하는 이미지를 얻는 회화의 직접성과 비교된다. 작가의 한지조형작업이 갖는 판화와의 관련성은 엠보싱 때문이고, 이런 엠보싱을 얻기 위해서 판이 요청된다. 그런데, 작가의 판이 흥미롭다. 흔히 그렇듯 목판이나 동판 대신 인조 석판이나 패널에 덧댄 합판 위에 엠보싱을 만들어줄 재료를 배열해 고착시키는데, 주로 크고 작은 자갈돌을 배열하고 그 표면에 수지(투명 폴리나 파라핀)를 엷게 펴 발라 고착시킨다. 자갈돌이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보기에 따라선 똑같은 감도의 에디션을 얻기 위해 판의 표면을 코팅하는, 그리고 그렇게 판의 마모를 방지하기 위한 판화의 경우를 닮았다. 


그렇게 자갈돌이 평면 위로 돌출된 판에다 종이원료를 대고 떠내면, 판과는 거꾸로 종이 안쪽으로 움푹 팬 역엠보싱 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이미지가 뒤집혀져 보이는 판화의 특징 탓이며, 실제로 그 이미지가 섬세한 판화의 경우라면 오랜 숙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이미지를 읽어내는 감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역엠보싱이 아닌 엠보싱 된 이미지를 얻고 싶은 경우라면, 이번에는 판 자체를 안쪽으로 파내 요철을 만들면 된다. 작가는 그렇게 판의 표면에 자갈돌을 배열해 고착시킨 경우, 실리콘을 이용해 판의 표면에 원하는 패턴을 만들어 고정시킨 경우, 그리고 판의 안쪽으로 원하는 형태며 패턴을 파내 고정시킨 경우의 다양한 판을 이용해 다채로운 표정의 종이조형작업을 인출해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부분적으로 색을 올린다거나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그 표면을 긁어낸다거나 하는 등의 과정을 더해 자연성과 최소한의 인위적인 과정이 어우러진, 필연성(판화에 의해 찍혀져 나오는 기계적인 이미지)과 우연성(그 위에 부가된 과정에 연유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운 이미지)이 삼투된 다양한 색감과 질감의 화면을 얻고 있다. 


이렇게 작가의 종이조형작업은 판화와 관련된다. 이를테면 판을 매개로 해 엠보싱을 얻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판화와의 연관성은 판화와 마찬가지의 프로세스를 공유하는 것까지 만이다. 엄밀하게 작가의 작업은 판화로 환원된다기보다는 판법을 이용한 일품회화 내지는 단품작업의 경우로 보아야 한다. 작품 하나하나가 고유의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고 인정받는 경우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굳이 판화와의 연관성으로 치자면, 단 한 장만의 판화를 찍어내는 모노타입 내지는 모노프린트의 경우로 볼 수는 있겠다. 이 경우에도 작가의 작업에 두드러져 보이는 강한 물성이 판화로 보기에 주저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판화를 의식하고 만든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예컨대 일본에서의 전시를 위해 제작한 에칭 동판화의 경우에서와 같은), 거의 대부분의 종이조형작업이 심지어 어떠한 에디션 넘버조차 표기돼 있지 않다. 판화를 찍는다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조형을 인출해낸다는 생각에 급급했고 골몰했을 것이다. 판이 있으니 원칙적으로 똑같은 복수의 이미지를 얻을 수는 있다고 해도, 작가의 작업은 심지어 어떠한 프레스기마저도 사용하지 않는(물론 목판에서처럼 단단한 솔로 종이원료를 두드려 고착시키기는 하지만) 철저한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있어서 실제로는 똑같은 이미지를 얻을 수가 없다. 여기에 매번 아님 섬세하게는 그 질감이며 색감이며 조직이 다른 종이원료를 사용한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종이조형작업은 판법을 끌어들여 회화의 표현가능성을 확장하고 있었고, 그 자체를 자족적인 오브제의 한 경우로서 제안하는 것을 통해 조형의 영역이며 범주를 심화시켜놓고 있었다.  


이렇게 얻어진 화면을 보면 크고 작은 자갈돌이 울퉁불퉁 박혀있는 질박한 느낌의 땅이며 대지의 표면질감을 연상시키고, 풍화에 씻긴 부분적으로 설핏 조개껍질 무더기가 드러나 보이는 패총을 연상시키고, 지난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흙벽을 연상시키고, 덧바른 석회 사이사이로 적당한 크기의 돌들을 배열해 놓은 사뭇 장식적인 미감이 정감을 자아내는 돌담을 연상시키고, 일일이 새끼줄을 꼬아 만든 망태기며 가마니며 돗자리의 표면질감을 연상시키고,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의 단층을 연상시키고,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의 아득한 시간 저편의 그리움을 연상시키고, 친근하면서도 뭐라 규정지을 수는 없는 존재의 원형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존재에 원형 같은 것이 있다면, 그런 원형을 상기시킨다. 작가의 종이조형작업은 그렇게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아득한 시간 저편으로부터 건너온 것 같은, 친근하면서도 뭐라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은, 어쩜 반쯤은 시간이 만들어준 것일지도 모를, 그런 것들을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그런 천의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한지조형작업은 규정지을 수 없는 것들, 다만 감으로만 다가와 공감을 자아내는 것들, 한때 존재했었을 것들, 시간의 흔적 속으로 아님 흔적을 남긴 채 풍화되고 산화되고 흩어지는 덧없는 것들을 통해서 선사상을 실현하고 있었고, 이로써 적멸의 관념적 실재를 완성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비록 한지조형작가가 작가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리고 유일한 경우도 아니지만, 어쩜 다른 한지조형작가들이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도달한지도 모르고, 따라서 한지조형작업의 원형에 대한 그리고 그 됨됨이에 대한 진지한 재평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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