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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아 / 몸의 연금술, 액체(애브젝트)의 연금술

고충환

예술가 되기와 미친년 되기. 무슨 범죄인 초상사진 찍기라도 하듯 벽에 등을 기댄 작가가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무슨 표적이라도 되는 양 계란이 날아와 깨지면서 얼굴 위로 내용물이 흘러내린다. 처음에 부닥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그는 이내 씩 웃는다. 그 웃음이 못마땅한지 다시 계란이 날아오고 그도 다시 웃는다. 그렇게 계란투척과 웃음이 점점 더 빨리 교환된다. 그리고 마침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화면 속으로 손(아마도 계란을 투척한 남자의 손)이 들어와 계란 분비물로 떡이 된 그의 머리를 거칠게 흔든다. 그래도 그는 마치 웃음이 자신의 소임이라도 되는 양 끝내 웃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 제목이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이다.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선 어떤 폭력도 굴욕도 비아냥거림도 말도 안 되는 처사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인가. 이 작업은 남자와 여자가 마주보며 서로 상대의 뺨을 때리는 다른 작가의 다른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시작된 작업이 종래에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끝나는 작업이다. 이 작업에서 폭력이 상호적이라면, 작가의 작업에선 일방적이라는 데 차이점이 있다. 


Standing up peeing, 2006


그리고 작가는 밤에 작업실에서 드로잉을 한다. 그렇게 드로잉을 하다가 불현듯 옷을 훌훌 벗어던져 알몸이 된다. 그리고 얼룩말 줄무늬 바지 하나만을 달랑 입은 채 밤거리로 나선다. 섹시코드로 알려진 얼룩말줄무늬바지와 알몸으로 밤거리에 나선 그의 행위는 통념상 영락없는 미친 짓이고 미친년이다. 야하고 의심스런 밤의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선 마녀의 현대판 버전? 이 작품 제목이 <자화상>이다. 예술가 되기와 미친 년 되기는 다른 사람들을 연출하는 다른 작업들에 비해 작가가 직접 출연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그리고 작업에 대한 작가의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 표면적 의미는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선 때로 말도 안 되는 처사도 감내해야 한다는, 그리고 예술가로 성공하기 위해선 때로 미친 짓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로 들린다. 예비 예술가에게 말도 안 되는 처사며 미친 짓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그리고 그 처사며 짓을 통과한 예비 예술가에게 비로소 예술가로서의 자격을 부여해주는 예술제도에 대한 코멘트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 이면의 의미가 질 들뢰즈의 00되기 철학에 공감하는 실천논리로 보인다. 알다시피 00되기는 항상적으로 자기를 어떤 이행하는 순간이며 유보적인 위치에 정초하기 위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정체성의 논리를 재고하기 위한, 그리고 그렇게 정체성의 논리를 강요해오는 제도의 관성에 대해 차이의 논리로 대응하기 위한 들뢰즈의 핵심전략이다. 어쩜 예술가 자신 아님 미친년 자체가 이행하는 순간이며 유보적인 개념일지 모른다. 예술에 대한 통념과 실제 사이, 미친 짓과 미친년에 대한 통념과 실제 사이엔 건널 수 없는 의미론적 차이가 있고 갭이 있다. 그래서 어쩜 예술과 미친 짓은 그 의미론적인 차이며 갭을 재확인하는, 확장시키는,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차이를 좁히면서 고쳐 잡는 행위이며 과정이며 실천논리일지도 모를 일이다. 


너의 죄를 고백해! 뼈와 살이 타는 밤. 미셀 푸코는 정신병원이 정신병자를 감호하기 위한 곳이면서, 동시에 잠정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본다. 적어도 시작은 그랬다고 본다. 잠정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는? 잠정적으로 불온한 사상을 퍼트릴 수도 있는? 잠정적으로 도덕적 불감증을 유포시킬 수도 있는? 잠정적으로 반사회적인? 잠정적으로 정신병적인? 여기서 유보적인 개념정의에 주목할 일이다. 잠정적인 건 잠정적인 것일 뿐, 사실도 현실도 아니다. 사실을 빌미로 잠정적인 것마저, 아님 현실과 더불어서 잠정적인 것마저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제도의 기획이며 관성을 경계할 일이다. 제도의 바깥에는 그 무엇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잠정적인 것마저도. 옛날에 제도는 개인의 몸을 통제했지만, 지금은 개인의 잠정적인 영역 말하자면 의식을 감시한다.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의 규준을 제시하고, 그 규준이 저마다의 의식 속에 내재화하게 한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개념정의를 도구로 저마다 스스로 감시하게 한다. 그래서 무의식에 마저 숨을 데가 없고 숨을 수도 없다. 


여기에 <나는 나의 죄를 고백 한다>는 영문자 텍스트가 쓰여 있다. 피복이 벗겨진 전선으로 쓰인 그 텍스트 위쪽에는 도르래가 달려있고, 도르래 끝에는 고깃덩어리가 매달려 오르락내리락한다. 텍스트에는 전기가 통하고, 그 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가 닿을 때면 스파크가 일면서 뼈와 살이 타는 냄새가 나고 뿌지직 소리가 난다. 그렇게 고깃덩어리는 죄를 고백할 때마다 움찔한다(실제로는 위험을 감안해 관객의 접근에 반응하는 센서로 대체했다). 죄를 고백하는 고깃덩어리? 우리 모두는 죄를 고백하는 순간, 고깃덩어리가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잠정적인 죄를 암시라고 할라치면 지레 놀라서 움찔한다. 뼈와 살이 타는 밤을 상상이라도 할라치면 실제로 뼈와 살이 타기라도 하는 듯 움찔한다. 상상력 탓에 처벌 받기라도 하는 듯, 상상력이 곧 사실이며 현실이라도 되는 듯 움찔한다. 사실이며 현실 바깥에는 그 무엇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상상력마저도.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돌아가며 저마다의 죄를 고백한다(동공은 빛을 조절한다). 나는 사람을 때리고 괴롭혔습니다. 나는 동물을 학대하고 죽였습니다. 나는 사람을 다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나는 아는 사람이 죽길 바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남의 실패와 좌절이 즐겁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면 빛이 그의 동공을 비춘다. 그의 동공이 진실을 증언해주기라도 하는 양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흘리는데, 죄가 부끄러워 우는 것인지, 죄를 고백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우는 것인지, 아님 그저 동공에 맞춰진 빛 때문에 고통스러워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죄를 고백하면서 움찔하는 고깃덩어리며 눈이 아파서(?) 우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고백을 강요하는 사회를 고발한다. 개인주의의 한 가운데에서 정작 더 이상 숨을 데가 없는 개인이라고 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며 관음증적 사회를 폭로한다. 모든 걸 고백해! 심지어 잠정적이고 무의식적인 상상마저도. 그리고 아마도 사사로운(혹은 좀 더 그럴듯하게는 남다른) 생각마저도. 


오줌과 침과 피가 흐르는 살 혹은 몸. 여자가 선 채로 오줌을 눈다(서서 오줌 누기). 보통은 남자가 서서 누고 여자는 쪼그리고 앉아서 눈다. 통상적으로 그렇고 상식적으로 그렇다. 여기서 작가는 여자는 왜 서서 오줌을 누면 안 되느냐고 반문한다. 그 반문은 서서 오줌 누는 자세에 대한 반문이라기보다는 통상과 상식에 대한 반문이다. 생물학적인 몸 구조가 차이나는 자세의 원인일 수 있겠지만, 여기서 작가는 이보다는 통상과 상식이 원인이라고 보고 그 원인을 문제시한다. 여자는 이렇고 남자는 저렇다거나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사실을 결정짓는 원인은 타고난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보다는 관습적인 경우가 많고, 작가는 바로 그 관습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그대로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섹스와 젠더), 성결정론과 비결정론(성은 타고난 것이라는 입장과, 성에 관한한 결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입장), 배설과 쾌락의 문제(개인의 영역의 문제가 어떻게 제도에 의해 감시되고 억압되는가 하는 문제), 금기와 위반의 문제(금지는 위반을 부른다. 금지는 없는 욕망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모든 금지는 어쩌면 잠정적인 위반 가능성에 대한 처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정상성과 비정상성(정상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제도의 개념규정 내지 정의의 문제) 논의에 연동된다. 


작가는 그렇게 여자가 눈 오줌을 수거한다. 그리고 <오줌나무>를 만들었다. 투명한 유리 플라스크가 링거 병을 대신하고 영양제나 피를 수혈할 때 사용하는 투명 비닐호스로 나뭇가지를 대신했다. 그리고 플라스크와 비닐호스에 피 대신 오줌이 흐르게 했다. 알다시피 오줌은 생리현상의 부산물이고, 의학은 생리현상을 관리하는 기술이다. 그렇게 오줌나무에는 유사의학이 포개져 있다. 그리고 오줌나무 자체에 주목해 보자. 나무에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준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오줌나무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순수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나무지만, 동시에 성을 매개로 한 그리고 생리현상을 매개로 한 것이란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상상력을 가동시켜 이것과 저것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고, 아닌 것과 아닌 것을 중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관심으로 오줌 꽃을 만들었다(Fixed Object). 어항과 같은 수조에 이러저런 오브제들을 세팅해 놓고, 수조를 오줌으로 채웠다. 그리고 오줌을 건조시키면 소금 결정체가 오브제의 표면에 하얀 꽃처럼 피어난다. 그래서 오줌 꽃이다. 아닌 것과 아닌 것과의 결합이 피워 올린 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오줌처럼 혐오스런(?) 물질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 여기서 작가는 호와 불호, 호감과 혐오감, 그리고 미와 추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든다. 그 자체로 호감을 주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이며 존재 같은 것은 없다. 물질이며 존재에 대한 감정은 상대적이고 양가적이다. 그 원료가 오줌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오브제를 보면 영락없는 소금 꽃이고 성에꽃이다. 여기에 그 꽃이 다름 아닌 오줌 결정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서 꽃에 대한 감정이 달라지는가. 꽃에 대한 호감이 불현듯 오줌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뀌기라도 하는가. 작가는 바로 그런 문제, 곧 물질이며 존재에 대한 상대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그리고 남녀들이 릴레이로 키스를 한다(입에서 입으로). 키스는 혀와 혀가 교환되는 행위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혀 대신 캐러멜이 교환되고 있다. 혀 대신 캐러멜? 혀도 이물스럽지만 캐러멜은 혐오스럽다. 아님, 혀는 사랑스럽지만 캐러멜 그것도 상대가 질겅질겅 씹은 캐러멜은 밉다. 반전이다. 사랑인줄 알았던 행위가 불현듯 혐오감으로 변질된다. 혀와 혀가 교환되고 침과 침이 교환되는, 그리고 여기에 침이 진득하게 묻어 허물 허물해진 캐러멜이 교환되는 이 장면은 키스일까. 아님, 키스에 대한 환상이 허물어지는 순간일까. 누군가의 키스는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누군가의 쾌락은 누군가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 여기서 키스와 캐러멜은 이데올로기의 유비적 표현이 된다. 이 사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키스하는 남녀들이 입고 있는 옷에 프린트된 문자에 주목해보자. 바로 작가가 세계인권선언문에서 발췌한 6개의 단어, 곧 자유, 거부, 평등, 저항, 독립, 그리고 인권에 해당하는 영문자가 각각 인쇄돼 있다. 세계인권선언문이라는 출처 자체도 그렇지만, 그 자체가 전형적인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핵심개념들이다. 여기서 주체에게 이데올로기는 혁명이며 의미이며 쾌락이지만, 객체에게 이데올로기는 착취이며 무의미이며 고통일 수 있다. 실제로 마지막 인권이라는 영문자가 프린트된 옷을 입은 여성이 손에 뱉어낸 캐러멜은 홀로코스트 사진에 기록된 목이 잘린 나체 남성의 형상이다. 달콤한 캐러멜과 인권이라는 이데올로기 그리고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부닥치면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심각하게 재고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작가는 의식에서 의식으로 전달되기 마련인 이데올로기를 입에서 입으로, 혀에서 혀로, 침에서 침으로, 몸에서 몸으로 교환되는 것으로 전유한다. 그 전유를 통해서 의식에 내어준 몸의 정치학을 복원(아님 복권?)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데올로기를 성애에 연결시키고, 에로티시즘을 카니발과 결합시킨다(내 혀를 받아먹어라?). 


그리고 작가의 작업에서 신체분비물(애브젝트)은 오줌과 침을 경유해 피에 이른다(The Reason is You). 처음에 작가는 소 한 마리가 흘린 피를 앞에 두고 난감했다. 여전히 따뜻한 피에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생명의 것이었을 온기와 생기가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꽤나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 온기와 생기가 점차 기억으로부터 가실 즈음에 작가는 그 피를 되불러냈다. 그리고 그렇게 되불러낸 피로 벽돌을 만들었다. 비록 벽돌 한 장 한 장은 보잘 것 없지만 집을 짓고 문명을 짓고 세계를 짓는 기초며 모나드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피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사실은 생명의 에너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로 기하학적 도형을 만들었다. 실제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착상된 것이지만, 수학으로 대변되는 기하학적 도식이며 도형이 흡사 수술을 위해 살에 금을 긋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수학과 수식 그리고 기하학적 엄밀함으로 대변되는 이성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러저런 오브제를 만들었다. 꽤나 심각할 수 있는 피로 만든 오브제(애브젝트?)를 통해 마치 장난감이라도 만들 듯 심각한 것을 유희적인 것으로 상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이것들을 만드는 내내 작가는 피 칠갑을 했다. 소 한 마리가 흘린 피에다가 작가의 하혈이 더해지면서 작가는 그야말로 피와 자신이 혼연일체(무아지경?)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자신이 주체가 돼 무언가를 만든다기보다는, 자신이 객체가 돼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순간과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매개처럼 느꼈다. 그 경험은 혹 정화며 자기정화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소의 피를 앞두고 처음에 느꼈을 죄책감을 속죄하는 심정이었고, 그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며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런 피가 불러일으키는 죄책감도 피를 통한 속죄의식에서도 어쩌면 예술의 기원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원형적인 제의의식의 희미한 그림자가 엿보인다. 


사랑의 도구와 고문의 도구. 한 여자가 매를 들어 한 남자의 엉덩이를 내려친다.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에서 감지되듯, 그렇게 내려치면서 발갛게 달아오른 남자의 엉덩이에 여자는 연민을 느낀다(실제로 이 작업은 그 포즈와 형태가 피에타를 상기시키고,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작가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세속적인 이미지와 충돌시키고 결합시킨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매질로 인해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다? 혹 남자는 매질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이 작업에서 작가는 혹 가학과 피학, 사디즘과 마조히즘, 사랑과 폭력, 사랑과 고문의 모호한 경계와 나아가 아예 공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감정을 더 고조시키기 위한 스킬에 대한, 아님 사랑의 표면과는 다른 이면에 대한, 아님 사랑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오리무중임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이를테면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라는 영화(루이스 브뉘엘)도 그리고 <사랑의 단상>(롤랑 바르트)이나 <사랑의 역사>(줄리아 크리스테바)와 같은 저작도 있지만, 사랑의 기호며 언술은 가장 애매하고 중의적인,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실제로 여자가 손에 든 매의 표면에는 중세의 고문 그림이 아로새겨져 있다. 여기서 사랑의 도구(혹은 기술)와 고문의 도구(혹은 기술)가 하나로 만나진다. 사랑의 도구(그리고 기술)는 정교해야 한다. 그래야 더 잘 즐길 수 있다. 고문의 도구도 정교해야 한다. 그래야 더 잘 괴롭힐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향유로 전유할 수 있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에선 사랑과 고문이 공모하고 쾌락과 고통이 합치된다. 그리고 작가는 노마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문한 중국의 한 지방에서 한 꾸러미의 고대 외과용 수술도구 세트를 얻는다. 예나 지금이나 수술도구는 가장 잘 생긴 오브제들에 속한다. 철저하게 기능을 본떠 만든 군더더기 없이 정교한 형태는 물론이거니와 그 표면에는 현대에는 없는 미세 장식마저 부가된 골동품들이다. 수술도구는 정교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 여기서 작가는 엉뚱하게도(?) 수술도구를 고문도구로 탈바꿈시킨다(여기서 작가는 이것과 저것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고, 또한 그 관심은 상당할 정도로 현실에 연유한 것인 만큼 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수술도구의 정교한 생김새에 맞춰 어떤 식의 고문에 사용된 도구인지에 대한 일종의 가상의 상세표(매뉴얼?)를 만든 것이다. 수술도구도 몸에 대한 것이고 고문도구도 몸을 대상으로 한 것인 만큼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작가의 말마따나 이번에도 도덕적 선입견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볼 때, 고문은 객체에게 고통인 만큼이나 주체에게 쾌락의 도구인 것이고, 따라서 주체가 향유할 쾌락의 강도가 상식적인 도덕의 계율을 위반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겠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수술의 도구와 고문의 도구, 쾌락의 기술과 고통의 기술(?)은 그 경계를 허물면서 하나로 넘나들어진다. 그 도구와 기술의 애매한 경계며 나아가 아예 공모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권력이 편재화하면서 주와 객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그리고 권력이 미시화하면서 개인의 무의식을 파고든다는 권력에 대한 푸코의 입장은 사랑의 기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알다시피 푸코에게 성은 동시에 권력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고 부분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상호간 권력관계도 인정되고, 향유를 공유하기 위한 상호간 공모도 확인된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적어도 사랑의 기술이며 언술에 관한한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중의적이고 양가적인 모호한 경계를 인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언술이 특히 감정표현과 관련된 언술(감정표현으로서의 언술은 특히 무의식과 관련이 깊고 정신분석학과 관련이 깊고 이미지정치학과 관련이 깊다)이 그리고 때론 가치관과 관련된 언술이 그러므로 어쩌면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언술이 사실은 사랑의 언술에 연유한 것임을 그리고 나아가 사랑의 언술에 연동된 것임을 인식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도구들, 브레이킹 휠. 작가는 근작에서 오프닝 퍼포먼스를 위한 설치작업을 제작한다. 오프닝 퍼포먼스 이후 계속 설치될 이 작업은 둥근 원형의 장소 내에 설치된다. 흡사 여성의 속치마와도 같은 하늘거리는 흰색 천을 이중으로 드리운, 지름이 11m에 달하는 원형 막을 경계로 장소는 안쪽과 바깥쪽으로 나뉜다. 예로부터 원형의 안쪽은 성스러운 장소 곧 성소로 여겨졌고, 실제로 도둑과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성소 안으로 도망가면 세상의 법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과 인간이 접속하는 일종의 경계적인 장소로 봐도 되겠다. 주로 기하학적 형태를 취하기 마련인 이런 장소 중 원형의 미로와 만다라 정도가 그 상징적이고 도상적인 성소의 의미며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일종의 성소를 짓고 있는 것인데, 알다시피 성소에는 그곳을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주는(예컨대 성수를 뿌리는 것과 같은) 미학적(아님 종교적?) 장치 내지는 의식이 있어야 하고, 작가의 경우에 그 장치는 순결(혹은 처녀성)을 상징하는 흰색 천의 원형 막이 되겠다. 원형 막을 열고(여성의 처녀막을 찢고?) 성소의 안쪽으로(여성의 몸 안쪽으로?) 들어서면 폭 120cm, 높이 240cm, 그리고 여기에 퍼포머가 앉으면 총 높이가 350cm 정도에 이르는 총 12개의 설치물이 원형 막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둥글게 위치해 있다. 크게는 스탠드와 바퀴(나무 재질의 바퀴살에다 철제 프레임을 덧대 만든 옛날식 마차바퀴)가 조립된, 동으로 만든 이 구조물은 퍼포머가 스탠드 위에 장착된 밑이 뚫린 안장에 앉아 가장자리 선을 따라 깃털장식이 덧대어진 바퀴를 발로 굴리게끔 돼있다. 그리고 그렇게 퍼포머가 바퀴를 발로 굴리면 바퀴 가장자리의 깃털장식이 퍼포머의 음부를 스치게끔 돼있다. 퍼포머가 앉는 안장 윗부분에는 각기 다른 영어 단어가 크리스털로 장식돼 있어서, 퍼포먼스가 끝난 후 퍼포머의 엉덩이 부분에 글씨가 빨갛게 새겨질 것이었다. 이를테면 각각 변수, 오밀조밀한 곳, 단죄, (하얀) 뼈, 땀, 어둡고 텅 빈, 제의(축제), 모독, 순환(사이클), 우주, 추종자들, 그리고 찡긋거림과 같은 알쏭달쏭한, 암시적인 의미며 단어들이다. 그 의미가 사랑의 언술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언술과 마찬가지의 애매하고 유보적인,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중의적이고 양가적인 경우로 보면 되겠다. 뭐, 크게는 사랑의 기술과 치유의 언술로 봐도 무방하겠다. 


퍼포머들은 특별한 의상을 입고 스탠드 위에 설치된 안장에 앉아 발로 바퀴를 돌리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는 전통적인 노동요와 그레고리안 성가의 음원이 교차되고 믹서 된, 단순한 리듬의 멜로디를 따라가듯 진행되는 돌림노래 방식이다. 천상의 소리와 지상의 소리가 서로 화답하고, 성과 속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하나로 합치되는 어떤 경지며 차원 정도로 보면 되겠다. 노래가사는 충북음성에서 채록한 디딜방아 노동요를 사용했는데, 그 가사를 옮겨보면, 굴러라 굴러라/ 상가래꾼도 굴러라/ 굴러라 굴러라/ 옆가래꾼도 굴러라/ 꽃이 폈네 꽃이 폈어/ 방아머리서 꽃이 폈네/ 방아를 찧자/ 방아를 찧자/ 상가래꾼도 굴러라/ 옆가래꾼도 굴러라/ 꽉꽉에 눌러라/ 꽃이 폈네 꽃이 폈어/ 방아머리서 꽃이 폈네, 가 된다(음악은 이나리메 음악감독 작업). 방아타령 자체가 그렇지만, 다분히 암시적이고, 특히 성적으로 암시적이다. 성적 암시를 통해 노동의 고된 순간을 잊고자 했던 해학의 미학이 확인되는데, 사실 그 경우는 전통적인 노동요에서 그렇게 낮선 것은 아니다. 어쩜 작가는 이처럼 노동요가 품고 있는 성적 암시를 건강한 에너지로 보고, 이를 발굴하고 부각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더불어 노동을 신성시하면서 성적 암시를 금기시해온 전통적인 문명사의 이분법을 타파하고, 한편으론 성적 암시를 상품화하면서 다르게는 오히려 금지를 강화해온 자본주의의 이중성(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을 돌파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퍼포머들은 안장에 앉아서 바퀴를 구르는데, 바퀴를 구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짐에 따라서 노래도 빨라지고, 덩달아 바퀴 끝에 달린 깃털이 퍼포머의 음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횟수도 잦아진다. 그리고 그렇게 속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순간적으로 노래도 바퀴도 멈춘다. 그러면 바퀴를 굴리느라 숨이 차오르고, 여기에 깃털이 은밀한 부분을 자극해 숨이 가빠오는, 그리고 그렇게 숨소리와 노래 소리가 하나로 섞이다가, 종래에는 정적 속에 다만 가쁜 숨소리만이 여운처럼 남겨진다. 무슨 여운? 이건 분명 성 행위를 암시하는 것이고, 성의 절정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노동요가 품고 있는 성적 암시를 건강한 에너지로 보고 이를 발굴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굴된 에너지를 절정의 강도로 증폭시켜 순간의 에너지 속에 응축해 들인다. 에너지가 고농축으로 응축되고 응집되는 순간, 말하자면 성적 절정, 오르가즘, 엑스터시, 그리고 조르주 바타이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은 죽음의 순간이며, 삶과 죽음, 성과 속, 하늘과 땅이 연속성을 회복하는 지복의, 지락의, 주이상스의 순간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에너지는 당연히 치유를 위한 에너지이기도 한 것이며, 그 의미가 존재가 재생되고 거듭나지는 성소의 장소특정성과도 통한다. 


오프닝 퍼포먼스 이후에 전시장에는 그 장면 그대로를 기록한 도큐멘테이션 영상이 프로젝션 된다. 그리고 가장자리를 따라 둘러쳐진 원형 막에는 설치물의 그림자가 투사되게 했다. 원안대로라면 퍼포먼스를 시작할 때 세이지 허브를 태우는데, 허브를 태울 때 나는 연기와 향이 그곳을 신성한 장소로 만들어주는 정화의식을 상징한다. 성의 영역과 속의 영역을 가름하는 그 상징적 의미가 순결(처녀성)을 상징하는 흰 막의 그것과도 통한다. 실제로 도둑이 몸을 숨기는 성소가 있었던 아득한 옛날에 예술가는 제사장이었고 무당이었다.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경계인이다. 성과 속,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상호소통과 교통의 계기를 트는 메신저들이다. 작가의 작업은, 특히 오프닝 퍼포먼스를 위한 설치작업은 다분히 이런 메신저와 통한다. 그렇게 작가의 예술가적 자질 속엔 현대판 무당이 잠자고 있었다. 그리고 여하튼 무당은 자신이 아닌, 타자를 위한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작가의 작업은 당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무슨 의미 있는 것을 주는가. 아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가. 


Sitting Young Girl, 2009


장지아의 작업은 성과 광기, 성과 권력, 정상성과 비정상성, 불경과 위반, 금기와 터부, 배설과 욕망, 에로스와 타나토스, 에로티시즘과 엑스터시, 쾌락과 고통, 가학과 피학, 수술과 고문, 폭력과 성스러움(르네 지라르), 그리고 욕망의 모호한 대상(루이스 브뉘엘)과 같은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의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거대담론의 지점 지점들을 미시담론의 층위로 전유하는가 하면, 미시담론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층위에서의 경험을 거대담론의 층위로 통섭해 들인다. 그렇게 존재가 아로새겨진 몸의 정치학을 가로지르고 위반의 정치학을 가로지른다. 작가의 작업은 특히 젠더 이후 간과된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몸을 부각하고 육질을 부각하면서 이 모든 담론의 지점 지점들을 호출한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호출된 지점 지점들을 감각의 층위에서 일어난 생생한 일이며 사건처럼 제안하고 재현하고 해석한 것이란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현실성을 획득한다. 특히 애브젝션 곧 비루한 것들의 미술에 대해서,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에 대해서 숙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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