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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선화 / 민화의 재구성, 미시적 유토피아

고충환

민화의 재구성, 미시적 유토피아


작가의 작업실은 광릉수목원 부근의 전원에 위치해있다. 작업실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주변에 야트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계절감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때로 작업이 막힐 때면 주변의 오솔길이며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을 찾는데, 그렇게 산길을 걷다보면 자연과 내가 서로 파장을 교환하며 교감함을 느낀다. 작가는 그 경험을 전율이라고 표현하는데, 뭔가 벅찬 감정(차라리 감동 아님 감사라고 해야 할)에 사로잡히는, 아님 주와 객이 허물어지면서 혼연일체가 되는, 그런 느낌 내지는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연이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 그래서 문득 살아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유별난 경험이랄 수 없지만, 도시인에게 그건 그저 경험 이상의 사건일 수 있다. 


Harmony, 145.5x97cm, Oil on canvas, 2014

작가는 전율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지만, 자연과의 교감이며 자연이 주는 감동을 잃어버린 도시인에게 그 말의 울림은 크게 다가온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상실감이야 말로 현대인의 보편적인 조건이며 존재론적 자의식으로 봐도 되겠다. 그가 상실한 것들 중엔 고향도 있고 자연도 있다. 현대인에게 유원지와 관광지라면 모를까 자연은 없으며, 사진 찍기와 인증 샷이 있을 뿐 자연과의 교감도 없다. 특히 고향으로 치자면 그저 지정학적 장소로서보다는 존재론적 원형 내지 원형의식을 의미하며, 그 의미가 자연과 통한다. 작가는 그런 자연을 그린다. 그러므로 그가 그린 자연은 좀 거창하게 말해 자연을 매개로 아님 아예 자연과 더불어서 존재론적 상실감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원형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하자면 자연을 소재로 한 자신의 그림으로 하여금 그 원형을 환기시키고 싶다. 


다시, 작가는 자연을 그린다. 작업실 주변이며 일상의 주변머리에서 채집된 자연을 그린다. 그러므로 그가 그린 자연은 동시에 자신의 일상이며 현실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림 속에 호수 아님 저수지가, 야트막한 동산과 언덕이, 산과 호수 아님 산과 산 사이로 연이어진 오솔길이, 크고 작은 밭들이,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가, 그리고 여기에 화면 위로 작은 쪽빛 하늘이 가만히 들어서 있다. 대개는 호수를 중심으로 다른 자연요소들이 에둘러 싸고 있는 형국이어서 마치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의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고지도를 보는 느낌이다. 고지도가 이런 구도를 취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마을을 중심으로 풍경을 잡아서이다. 마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린, 실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어쩜 관념을 그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그림 역시 주변풍경에서 호수가 가장 크게 그리고 인상적으로 와 닿았고, 그래서 호수를 중심으로 그렸다. 그저 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여기에 작가가 생각하는 생명이랄지 내면(아님 심연)의 메타포 그리고 자기반성적인 거울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경우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림은 정황적으로 주변풍경을 그린 것일 터이다. 정황적으로? 작가의 그림은 주변풍경 그대로를 감각적으로 재현해 그린 그림은 아니다. 마치 주변풍경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화면 위로 불러들여 재구성하고 재편집해 그린 그림 같다. 풍경요소를 실경으로부터 취해온 것인 만큼 실경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실경 그대로의 감각적 닮은꼴을 좇아 그린 그림도 아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실경과의 이중적인 태도며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그런 이중적 태도가 작가의 그림을 지배하는 특징적인 성질이며 요소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작가의 그림은 풍경요소를 재구성하고 재편집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그린 재현적인 그림이라면 모를까, 이처럼 재구성하고 재편집된 그림에는 분명 남다른 방법(형식논리)과 이유(의미내용)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한다. 재구성된 풍경? 그렇다면 무엇(관념)을 어떻게(방법) 재구성하고 있는가. 


크게 봐서 작가의 그림은 전통적인 민화와의 비교설명을 통해서 그 특성이 더 잘 드러나 보일 것 같다. 민화에서 상당할 정도로 제기되고 제시된 방법론을 취해와 심화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화의 방법론을 각색하고 자기화한다고나 할까. 우선, 민화도 평면성이 강하고 작가의 그림도 그렇다. 그저 명암도 없고 음영을 따로 그려 넣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요소들을 화면 내에서 재구성하고 재편집한 탓에 그렇게 보인다. 화면의 자족적인 원리에 따라서 그린 그림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서양화의 원근법이 적용되지가 않는 것도 민화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평면적으로 어필되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화에서 원근법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원근법에 구애받지 않는 작가의 그림은 또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주지하다시피 서양화에서 원근법은 절대주체의 가정과 관련된다. 내가 보기에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선명하게, 그리고 멀리 보이는 것은 작고 흐릿하게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점차 작아지고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그림 속으로(밖으로?) 사라진다.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인식할 수 없는 세계 속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이다. 원근법에서의 소실점은 바로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와 그 한계를 의미했던 것. 


Harmony, Oil on canvas, 2013


그렇다면 이처럼 주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게 해주는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는 작가의 그림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거창하게 말하자면 주체의 상실이다. 주체를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루는 형식요소들이며 풍경요소들 저마다의 의미비중이 균등해진다. 여기선 화면 밖에 선 작가(엄밀하게는 작가의 시선)도 풍경의 한 요소로 화해 그림 속에 묻힌다. 그렇게 균등하므로 평면적이다. 주와 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시선의 권력이 허물어진다. 그렇게 차이를 내포한 다른 것들(이를테면 산과 나무와 꽃들)이 마치 배열되듯 배치된다. 그 꼴이 흡사 조각보를 보는 것 같다. 특히 밭들의 경우에, 손바닥 크기로 보일 정도로 멀리서(이를테면 부감법 내지 항공촬영법으로) 보면 올망졸망 어깨를 덧대고 있는 꼴이 꼭 그렇게 보일 것 같다. 밭들 하나하나는 말하자면 조각보를 이루는 조각 천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에 작가는 삶의 수를 놓는다. 마치 자수를 하듯 삶의 편린들이며 생각의 조각들을 낱낱이 풀어놓는다. 거기에는 저게 뭐지 싶은 알만한 풍경요소들이 있고, 상징적 기호들이 있고, 추상적 패턴들이 있다. 그리고 때론 알록달록한 색동문양으로 장식을 끼워 넣기도 한다. 그것들이 저마다의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차이를 넘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상호간 이질적인 것들의 관계(불교의 연기설)를, 조화와 화해(더불어 사는 삶)를 이야기한다. 시선의 권력이 해체되고 주체가 상실된 자리에 대신 들어선 인연이며 삶의 가치로 보면 되겠다. 


작가의 그림엔 하늘을 날고 산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등장한다. 논리의 비약으로 논리를 넘어서는 민화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며, 하늘을 날고 싶고 산을 헤엄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그림에서의 물고기는 말하자면 자유를 갈망하는 작가의 욕망이며 분신으로 보면 되겠다. 알다시피 자유는 삶의 욕망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욕망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연을 매개로 한 그림 위에, 일상과 이상을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흡사 조각보와도 같은 그림 위에, 주와 객이 아님 나와 네가 경계를 허물어 서로 어깨를 덧대고 있는 무슨 밭과도 같은 그림 위에 이런 예술에의 욕망을, 자유로운 영혼을 향한 갈망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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