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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조각, 한국현대조각 아카이브

고충환

사적 조각, 한국현대조각 아카이브


먼저, 전시 타이틀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야겠다. 사적 조각이란 한국현대조각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짚는다는 의미(史的)와 함께, 작가들 저마다의 조각에 대한 사사로운 입장과 개념(私的)을 함축한다. 그 의미 그대로 아카이브를 내용으로 한 이번 전시의 성격을 부연하고 보충 설명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아카이브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자료 일체를 의미한다. 때로 자료와 작품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는데, 특히 개념미술에서 그렇다. 예컨대 마르셀 뒤샹의 일련의 상자 시리즈 작업은 그 자체가 작품이면서 동시에 작품을 부연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아카이브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작품과 비평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져야 한다. 하나의 작품은 그리고 그 작품을 대상으로 한 비평행위는 텍스트와 콘텍스트와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바탕을 둔다. 여기서 텍스트란 작품의 물적 근거 곧 작품 자체를 말하고, 콘텍스트란 작품의 비가시적인 영역 일체, 말하자면 작품의 환경적이고 인문학적인 배경과 과정과 의미내용과 관련되거나 이로부터 부수되는 일체를 아우른다. 


여기서 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는 헤겔의 정의가 도움이 되겠다. 예술이란 창작주체의 이념이 조각이나 회화와 같은 물적 형식을 빌려 감각적 층위로 드러나 보이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방점은 자연스레 조각이나 회화로 나타난 물적 형식이 아닌, 그 물적 형식이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창작주체의 이념에 찍힌다. 조각이나 회화 속에 창작주체의 이념이 숨어 있어서 그렇게 숨겨진 의미를 캐내는 행위가 해석(내용 분석)이고, 여기에 조각이나 회화의 물적 형식에 대한 분석(형식 분석)이 더해져서 하나의 비평행위가 완성되는 것이다. 조각이나 회화 속에 창작주체의 이념이 숨어 있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비평행위가 작품분석과 함께 작가분석에도 연동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아카이브는 하나의 조각이나 회화를 비롯해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작업이 가능해지는 비가시적인 영역으로부터 부수되는 일체를, 그리고 여기에 작가적 아이덴티티(일반적인 혹은 존재론적인 아이덴티티와는 구별되는)에 연유한 일체를 포함한다. 쉽게 풀어보자면, 조각이나 회화로 나타난 작품 자체의 연대기와 작가의 연대기, 그리고 그 두 연대기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의 흔적과 부산물 일체를 포함한다고 보면 되겠다. 


조각을 중심으로 그 가능한 대략적인 범주를 보자면, 전시도록, 작가노트, 작업과 관련한 견해와 입장을 밝히고 있는 그리고 상호간 논쟁이나 논점을 담고 있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서신(편지), 전시와 관련해 기관이나 행정처가 발부한 초청장과 같은 공문서와 메일과 계약서, 이러저런 매체에 연재하거나 발표한 텍스트 형식의 글과 삽화, 개인이나 기관과 인터뷰한 내용과 과정을 기록한 텍스트 형식의 글과 영상물, 작품 제작과정을 기록한 영상물과 전시장면을 찍은 사진, 본격적인 조각을 제작하기 전에 미리 만들어보는 아님 실측 그대로 확대해 옮기기 위해 만든 모형, 마케트와 에스키스와 드로잉과 작업을 위한 개념도(특히 크리스토의 평면 작업이 이 개념도에 해당한다), 조형물과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부수되는 일체 이를테면 계약서와 작업일지와 드로잉과 미니어처와 단계별 모형들, 주형작업의 경우에 주형에 해당하는 거푸집 내지는 틀, 평소 본격적인 작업과는 별개로 손을 풀기 위해 습관적으로 부담 없이 그리거나 만든 평면과 입체와 오브제들, 본격적인 작업 과정에서 생긴 자투리 재료를 이용해 만든 모형과 조형물들, 작업에 대한 발상 내지 착상과 직간접으로 영향관계에 있는 사사로운 취미와 컬렉션(예컨대 인형 수집 같은), 여타의 형식실험의 과정에서 유래한 부산물과 흔적들, 개인적으론 애착이 가지만 이러저런 이유로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작품들, 작가의 조각이 발생한 원인 내지는 원형을 밝혀줄 초기 작업들,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물과 다큐멘터리와 같은 파일 형식의 자료들, 현재의 아님 전형적인 작업과는 사뭇 다를 수 있는 의외의 조형적 성과물과 흔적들, 그룹을 창립하거나 운동을 위해 발표한 선언문, 미술계 자체를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 볼 수 있다는 전제(조지 디키와 아서 단토의 예술제도론과 아트서클 곧 예술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하에 이런 미술제도와의 관계와 관련해 의미 있는 에피소드를 밝혀줄 자료들, 그리고 기타 형식실험이나 공상 수준에 머물렀던 관념의 부산물들 정도를 아우를 수 있겠다. 


이번 전시는 한국조각가협회가 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전시다. 그런 만큼 뭔가 특별한 전시를 하고 싶었다. 대개 소품 하나씩 출품하기 마련인 그동안의 협회전의 전시관행을 지양하고, 협회 자체를 대상으로 한 전시를 하고 싶었고, 한국현대조각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싶었고, 작품보다는 자료에 방점이 찍히는 전시를 만들고 싶었다.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작품분석에는 텍스트와 콘텍스트, 작품 자체에 속하는 부분과 작가에게 속하는 부분, 작품과 자료를 아우른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미술에서 점차 이 두 부분의 경계가 애매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개념미술과 프로세스아트에서 그런데, 개념미술에선 자료가 작품을 대체하고 있고, 프로세스아트에선 과정이 작품을 대신하고 있다. 자료가 작품이 되고 과정이 작품이 되는, 태도가 작품이 되고 입장이 작품이 되는, 나아가 전시가 작품이 되는 차원 정도를 생각해볼 수가 있겠고, 이런 차원을 달라진 드로잉 개념이 반영하고 있다. 대개 그동안 드로잉이라고 하면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밑그림 정도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개념과 발상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것으로 그 범주며 영역이 확장되고 있고 유연해지고 있다. 자료와 과정, 태도와 입장, 개념과 발상에 방점이 찍히는, 그리고 그 자체가 작품이며 작업으로 인식되는, 그 차원 그대로 마치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을 실천하고 있고 실현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머릿속에 미의식이며 미적 기준을 탑재하고 있고, 그 무형의 의식이며 기준을 말로는 상상의 미술관이라고 불렀다. 알고 보면 데생의 어원인 디세뇨도 이런 의식이며 기준을 의미했다. 결국 예술이란 이런 비가시적인 의식이며 기준을 가시화하는 기술로 정의할 수 있겠고, 여기서 특히 현대미술은 가시화로부터 비가시화 쪽으로 역진화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런 달라진 개념이며 환경은 전시 현장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확인된다. 작가에게 작품이 있다면, 큐레이터에겐 전시가 곧 작품이다. 일전에 큐레이터의 가방이란 전시도 있었지만, 자료와 과정, 태도와 입장, 개념과 발상을 디스플레이하는 기술이 새로운 아님 의미 있는 전시공학으로 예시되고 있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여기에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작품을 그저 전시장에 가져다 놓는 식의 전시를 지양하고, 실제로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이며 현장 자체를 전시장에 옮겨다 놓거나 재구성하는 식의, 그럼으로써 전시 자체를 작품이며 작업으로 예시해 보여주는 식의 전시형태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전시관행이며 형태들이 아트신을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럼에도 마치 정답이 있는 양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술은 정답이 아닌 질문의 기술이다. 질문의 과정이며 이행의 연속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회의하고 부정하는 것이 삶에 균열을 내고 틈을 만든다. 그 틈으로부터 억압된 실재계가 출현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출몰된 실재계로 하여금 상징계를 반성하고 재고하게 하는 것, 질문의 기술로 하여금 정답들로 축조된 세계를 재구조화하는 기술이 예술이다. 예술은 삶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반성하게 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작품보다는 아카이브에 가깝다. 작품이 생산되기까지의 생각들의 흔적이 예술의 생리며 원형을 더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카이브를 전시로 끌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들 저마다의 머릿속과 작업실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수 있겠고, 그 개별적인 기회들이 모여 한국현대조각의 약사 내지는 소사를 재구성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 특히 작가들과 관련해선 때론 자신마저도 의식하지 못했던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자기와 만나지는 기회가 될 수 있겠고, 이로부터 의외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캐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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