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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수 /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와 실재의 반영

고충환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와 실재의 반영 


박현수의 그림은 추상이다. 흔히 추상으로 치자면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핵심 개념이며 형식논리로 알려져 있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원인을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는, 형식주의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추상이면서, 동시에 이런 순수 형식적인 요소며 논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추상이면서, 동시에 이러저런 의미며 내용을 탑재하고 있다. 추상이라는 말이 원래 압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감각적 실재든 관념적 실재든 그 실재를 압축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서 받는 추상의 인상은 추상의 원래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추상과 형상을 종횡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작가의 그림에서의 추상은 그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러저런 의미내용을 탑재하고 있는 추상회화, 이러저런 의미내용의 메타포로서의 추상회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고, 그 자체를 일종의 상징추상으로 부를 수 있겠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형식적으로 추상이면서도 내용적으로 어떤 의미내용을 내장하고 있다. 그렇게 형식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일정부분 수용하면서 확장하고 변주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긴장감은 바로 이런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작가의 이중적인 태도와 입장 그리고 해석에 연유한 것이다. 



Circle-Blue,122x122cm,Oil on Canvas, 2009


드로잉과 소품 제작을 통해 현장의 분위기를 담아 온 작가는 한국의 작업실에서 칸세라의 느낌을 살려 <Welcome to CAN>, <Grove> 등의 대작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작품에서 마치 푸른 들판에서 솟아나는 새순같기도 하고 오래 전 태고의 시간으로부터 거기에 자리잡고 있었던 괴석 무리들이 과묵하게 서있는 것같기도 한 화면속의 오브제들은 홍수정의 이전 작품들에서처럼 반복적으로 굽어지는 선들을 나이테처럼 품고 서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 내지 과정은 크게 드리핑 기법과 디깅 기법으로 이뤄진다. 흘리기 기법과 발굴 기법이다. 발굴 기법? 도대체 뭘 어떻게 발굴한다는 것인가. 발굴은 작가의 그림에서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의 그림을 들여다보자. 


작가는 우선 흘리기 기법을 통해 바탕화면을 조성한다. 그렇게 현란한 원색들이 난무하는 것 같은 화면이 만들어지고 나면, 원색과는 대비되는 중성적인 색채로 화면을 덮어서 가린다. 그리고 이러저런 기하학적인 형태를 변주한 이미지를 그려서 중첩시키는데, 주로 원 형상을 변주한 이미지들이다. 화면에서 원 형상은 단독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큰 원 속에 작은 원이 포함되는, 원과 원이 중첩되고 포개지는 형태로 그려진다. 어느 경우이든 중심성이 강한 구도(종교적인 성상이나 도상학의 전형적인 포맷이랄 수 있는, 그런 만큼 관념적인 성격이 강한 편인)와 함께, 중심으로부터 파동이 번져나가는 듯한 일종의 핵 이미지가 강조되고 연상되는 편이다. 여기까진 크게 봐서 덮어서 가리는 과정이 되겠다. 


그리고 발굴을 하는데, 말할 것도 없이 바탕화면에 조성된 원색들의 난무를 부분적으로 화면 위로 되불러내는 과정이다. 이때 효과적인 발굴을 위해 특별한 도구가 사용되는데, 실크스크린용 스퀴지를 작게 잘라 만든 일종의 고무해라를 사용한다. 고무 소재인 탓에 적당한 탄력과 힘 조절이 용이한 도구로서, 안료가 채 굳기 전에 화면에 대고 긁어내면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과도 같은 형태를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발굴된 화면을 보면, 화면 위로 부유하는 뼛조각 같은 비정형의 얼룩을 보는 것도 같고, 막막한 우주를 떠도는 운석을 보는 것도 같고, 별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생긴 파편을 보는 것도 같고, 핵폭발을 통해 최초의 별이 태어나는 극적인 순간을 보는 것도 같고, 우주가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블랙홀 아님 화이트홀을 보는 것도 같고, 그 자체론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언어와 기호들의 노이즈를 보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다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일까. 미국 유학시절 작가는 곧잘 자연을 찾았었다. 사막을 여행하다 보면 한때 어떤 동물의 것이었을 뼛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그저 흔한 뼛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 속에 존재의 흔적과 자연의 비의를 내장하고 있는, 주물이라고까지 할 수야 없겠지만 예사롭지 않은 오브제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밤이면 칠흑 같은 하늘 위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존재 아님 존재감이 터무니없을 만치 투명해지고 선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여기에 정체성 문제가 부가된다. 정체성으로 자연을 찾았고, 자연은 저만의 방식으로 치유한다. 이를테면 숭고와 장엄, 각성과 무, 그리고 무한위안 같은.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덮어서 가리는 과정과, 그렇게 가려진 부분을 캐내는 과정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되고 포개진다. 그 과정 그대로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정의를 닮았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위해 대지와 세계를 도입한다. 대지는 진리를 숨기고(은폐), 세계는 진리를 드러낸다(비은폐). 진리는 대지 속에 숨겨져 있을 때 보석처럼 빛을 발하지만, 세계의 층위로 드러나는 순간 한갓 개념으로 화할 뿐 그 빛을 잃고 만다. 그렇다고 대지 속에 숨겨져만 있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진리임을 알아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세계의 층위로 드러나야 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숨기면서 드러내는 것, 빛을 잃지 않으면서 드러내는 것, 진리를 간직하면서 진리를 인식하는 것에 역설이 있다. 여기서 진리의 존재방식은 그대로 예술의 그것과도 통한다. 숨기면서 드러내는 것, 가리면서 캐내는 것이 서로 통한다. 그렇게 작가는 뼛조각을, 별 조각(유성)을, 존재의 한 자락을, 그러므로 존재의 원형을 캐내고 있었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기하학적 형상 내지 도상으로 치자면 단연 원을 꼽을 수가 있다. 이러저런 정형 비정형의 원 형상이 그림의 기조가 되고 있는 것. 작가가 이처럼 유독 원 형상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작가의 작업을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작가의 전작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형식논리를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림에서 원 형상은 물론 조형적인 요소로서 도입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꽤나 의미 있는 상징적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는 원을 모든 형상의 근원적인 형상이며 원형적인 형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며, 모든 형상과 존재의 최소단위이며 원소, 모나드이며 단자로 보고 있는 것. 이런 원 형상의 원소들이 모여 사물을 만들고 자연을 만들고 우주를 만들고 존재를 생성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형상은 결국에는 원으로 환원된다, 고 하는 일종의 환원주의적 존재론을 주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원 자체는 일종의 에너지원으로 볼 수가 있겠고, 그렇게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에너지를, 그리고 그 운동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며 맥락에서 근작에서의 세도우 곧 그림자 시리즈는 사물형상이 최소단위의 원소로 환원될 때 드러나는 원 형상의 희뿌연 가장자리 라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말하자면 일종의 존재의 그림자 내지 존재의 에너지를 그린 그림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한다. 피직스는 감각적 층위로 드러나 보이는 자연의 질료적 측면을 말하며, 나투라는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질료를 가능하게 해주는, 질료의 원인 내지 존재의 원인에 해당하는,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에너지를 의미하며, 사실상 자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연을 자연이게 해주는 성질 내지 본질 내지 원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로써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것과 같은, 사물형상 내지 존재를 최소단위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맞닥트리는 원 형상은 그리고 원과 원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세도우 곧 흐릿한 그림자는 바로 이 자연성을 가시화하고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작가는 원 형상을 매개로 특히 세도우로 명명된 근작에서 존재의 원소며 원형을, 존재의 에너지(어쩜 생명)를, 존재와 존재가, 원소와 원소가, 생명과 생명이 무한 네트워킹(연동)되는 생물학적인(미시세계를 열어놓는) 그리고 우주론적인(거시세계로 확장되는) 서클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시세계와 거시세계가 작가의 그림 속에서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며 상호적인 총체로서 통합되고 있었다. 


더불어 작가의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거나 암시되는 질료적인 성질로 치자면 빛을 들 수가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빛은 그러데이션 기법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중첩된 원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미세한 파동이나 흐릿하게 지워진 원 형상의 가장자리에서처럼 암시적으로 다가온다. 빛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양이 없는 음은 생각할 수가 없다. 빛은 그림자와 대비될 때 실제보다 더 빛나 보이고, 그림자는 빛의 반영으로 인해 존재의 이유를 얻는다. 작가는 세도우 곧 그림자 시리즈에서 세포로 환원되고 우주로 확장되는 존재의 모나드를 형상화했다면, 일련의 커팅 시리즈에선 빛의 질료며 질감이 그 뚜렷한 실체를 얻는다. 


그날그날의 일상 내지 인상을 써내려간, 마치 일기와도 같은 심정으로 제작한 작업이며, 검은 종이에 커팅 한 작업이다. 커팅 된 모양새로 치자면 작가가 다른 그림에서 스퀴지로 긁어내 만든, 발굴된 이미지들의 변주로 보면 되겠다. 캔버스와 스퀴지와 디깅이 상호작용하는 문법 그대로 종이와 칼과 커팅이 연동된 방법론으로 갈아탄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세도우 연작과 커팅 시리즈가 서로 별개이면서 통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커팅 한 종이들을 연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하나의 전체 화면을 조성한 연후에 공간에다 설치한다. 그리고 전면에서 조명을 가하면 커팅 된 구멍을 투과한 빛이 벽면에다 커팅 된 모양 그대로의 형상이며 이미지를 투사한다. 그렇게 투사된 이미지는 실체가 있는 것인가. 비록 가시적이지만 실체로 치자면 오히려 종이에 커팅 된 구멍이 실체에 가깝고, 벽면에 투사된 이미지는 다만 그 실체가 만든 반영이며 그림자가 아닌가. 이렇게 커팅 시리즈(실체의 그림자)는 재차 세도우 시리즈(존재의 그림자)와 통한다. 서로 부연하는, 상호 주석 관계로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 특히 근작에서의 세도우 연작과 커팅 시리즈는 실재와 그림자의 문제며, 실체와 반영의 문제로 건너가는, 아님 이를 본격화하고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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