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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덕 / 나무를 닮은 사람들, 나무에서 캐낸 사람들

고충환

박종덕 / 나무를 닮은 사람들, 나무에서 캐낸 사람들


창작주체가 창작을 하려면 소재가 있어야 한다. 소재는 감각적 실재와 같은 유형의 것과 관념적 실재와 같은 무형의 것을 아우른다. 소재 가운데 창작주체가 가장 많이 천착하고 심화하고 변주해온 소재로는 단연 인물이며 인체를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반성적 성찰과 모색과 호기심이 담겨있다. 반드시 자화상이며 자소상이 아니더라도, 내가 누군지 알고 싶고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궁금한 것이다. 심지어 너를 그리고 조각할 때조차 작업은 너에게 가닿고 재차 나에게로 되돌려진다. 너와 나 사이를 왕복운동하면서 순환하는 것. 그러므로 인물이며 인체를 소재로 한 작업은 작가 개인에게 속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존재 일반으로 확장할 수 있는 보편적 주제의식에 미친다. 


인물은 이처럼 가장 많은 작가들이 천착해온 소재인 탓에 더 이상 끄집어낼 새로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싶은데, 지금도 여전히 인물은 그려지고 있고 조각되고 있다. 여차하면 새로울 것이 없는 반복에 머물 수도 있는 것이어서 어렵다.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인물에 천착하는 것은 반복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호기심과 너를 향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그리고 그 해갈에의 욕망은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반증한다. 


어쩜 내가 누군지 너는 누군지 그리고 인간이 뭔지 묻는 물음은 마치 양파껍질 벗기기와도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을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 객관적 사실보다는 개인적인 신념이나 믿음의 층위에 속한 것으로 범주화한 항목들에 종교 내지 예술과 함께 인간을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을 그리고 조각하는 행위는 매번 나에게로 되돌려지는 자기반성적인 물음이며, 너와 나 사이를 무한 순환하는 존재의 미궁 속을 헤매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답이 없기에 매력적이고, 미궁 속을 헤매는 일이기에 매료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종덕은 인물을 소재로 한 조각을 매개로 바로 그런, 답이 없는 답에 빠지고, 미궁 속을 헤매는 일에 매료된다.   


박종덕은 흔한 나무토막으로 인물을 조각한다. 그래서 나무토막인물조각이다. 원형 그대로의 나무토막을 취해와 조각을 하는데, 주로 세부가 생략된 세로로 긴 형태의 몸통에 머리를 강조한, 얼굴에 초점이 맞춰진 조각이다. 여기에 단청이나 꼭두의 그것과도 같은, 반쯤은 시간이 만들어준 것 같은 채색을 올려, 조각과 채색이 하나로 어우러진, 일종의 채색조각으로 범주화할 수 있겠다. 


문제는 조각도 채색도 일반적인 완성의 기준으로 치자면 좀 그런, 적당히 미완이고 적절하게 어눌한,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런 느낌이다. 더러 꽤나 섬세하고 완성도가 높아 보이는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미완의 느낌이 덜떨어진 손재주 탓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밖에 없는데, 손재주보다는 감각에서 그 의도를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뭔가 인위적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런 느낌을 주는, 그래서 마치 그 자연스런 느낌의 이면에 모델의 얼과 혼이 탑재돼 있는 것 같은, 그리고 그렇게 은폐된 얼과 혼이 은연중에 얼굴의 표면 위로 부각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지점이며 감각의 지점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점은 어떻게 가능한가. 알다시피 얼굴이란 얼의 꼴이란 말이며, 얼이 거하는 집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제는 꼴이 가시적인데 비해, 얼 자체는 비가시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꼴을 빌려 얼을 현현하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며 최소한 힘든 기획이 아닌가. 그래서 암시다. 어쩌면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층위로 밀어 올리는 일이며, 따라서 암시력을 구사하는 감각적 기술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렇게 암시를 매개로 가시적인 것(꼴)으로 하여금 비가시적인 것(얼)의 표상이 되게 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얼을 포착하고 혼을 포획하는 일은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선다. 


그렇게 외적으로 보기에 적절하게 미완으로 보이고 적당하게 어눌해 보이는 작가의 조각은 사실은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 저편의 얼과 혼을 불러낸 것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모델과의 진정한 닮은꼴을 성취하고 있었다. 모델에 대한 단순한 관찰을 넘어서는, 상호 이해와 공감의 지난한 그리고 내밀한 과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자면, 나무토막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레 뒤틀린 몸통에다 나무가 건조되면서 생긴 크랙도 있고 옹이도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살아가면서 생긴 이러저런 삶의 생채기로 보면 되겠다. 그런 자리며 자국에는 칼집도 잘 안 먹히는데, 사람이 유독 상처에 민감한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되겠다. 이처럼 나무는 사람의 본성을 닮았다. 작가는 가급적 그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본성이 오롯이 드러나 보이게 하고, 그 자체가 조형의 일부가 되게끔 한다. 나무의 본성이 자기를 실현하도록 돕는 것인데, 그러면서 그 속으로부터 모델과의 닮은꼴을 찾는다. 나무의 본성과 모델의 본성이 합치되는 감각적 지점을 더듬어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조각은 어쩌면 반쯤은 나무의 본성에 연유한 것일 수 있겠다. 나무의 본성에다 모델의 본성을 그리고 여기에 작가 자신의 본성(아님 감각?)을 합치시키는 과정이며 결과일 수 있겠다. 


그 과정은 그대로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대하는 태도를 닮았다. 미켈란젤로는 돌(작가의 경우에는 나무) 속에 이미 완전한 형상(에이도스)이 들어있어서, 조각가가 할 일이란 다만 불필요한 부분을 들어내 그 완전한 형상이 스스로 드러나 보이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에 머문다고 했다. 돌의 본성(돌의 물성? 돌이 이미 구현해 가지고 있는 완전한 형상?)에 대한 이해가 조각의 성패를 가름하는 관건임을 강조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다만 자연 그대로에 충실할 것, 그리고 여기에 그 무엇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에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본 로댕의 전언도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에게 조각이란, 사실은 나무의 본성을 찾는 일이며, 그 고유의 물성이며 형태로부터 사람과의 닮은꼴을 찾아내는 과정이며, 종래에는 자신과의 닮은꼴 곧 존재의 원형을 찾아 자기 내면으로 떠나는, 그런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들의 얼이며 혼을 나무토막 위로 되불러낸다. 그렇게 불러낸 얼굴들을 보면 한눈에도 저게 누구지 싶은, 알만한 얼굴들이 있는가하면, 이 시대의 보통사람들이랄 만한 익명의 초상도 있다. 모르긴 해도 작가가 자신의 일상의 주변머리로부터 알게 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주변사람들이며 보통사람들의 초상을 조각하는가. 그리고 그 조각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가는 아마도 이로써 주변적인 삶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풍경에다 기념비적인 아우라를 부여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보통사람들의 삶의 초상을 조망한 작가의 조각은 거대담론이 흔들리는 시대에, 개인과 개인이 관계할 일도 연대할 명분도 상실한 시대에 새삼 개인의 존재를 부각한 것이어서 그 울림이 더 크게 와 닿는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나무에서 사람보기>라고 부른다. 나무에서 사람과의 닮은꼴을 보아내고, 그렇게 보아낸 얼과 혼을 나무 조각으로 되불러내는 일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호출된 사람들의 초상이며 얼과 혼을 조각으로 기록하는 일은 일종의 <만인보>의 조각 버전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나무토막인물조각은 한 시대의 삶의 평균수준을 가늠하게 해주는 이 시대의 초상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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