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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상 / 나는 너에게 가시 돋친 상처가 되고 싶다

고충환

원재상, 나는 너에게 가시 돋친 상처가 되고 싶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예기치 못한 상황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게 꿈이야 현실이야.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건 결코 현실일 수가 없어. 그러나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와 박힌 걸 보면, 그리고 파출부가 말똥벌레(거대한 말똥벌레!)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건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의 일이었다. 카프카의 알레고리는 꿈을 현실처럼, 아님 부디 꿈이었으면 좋았을 현실을 정색을 하고 보여준다. 어떠한 감정도 배제하면서. 무미건조하게. 그래서 더 섬뜩하다. 그래서 더 현실 같다. 


원재상, 강화 플라스틱, 2013

누가 그로 하여금 벌레로 변신하게 했을까. 그는 적들의 사회에 포위돼 있다. 인간관계가 그를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게 했고, 짧은 호기심과 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벌레로 둔갑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일그러진 인간관계가 문제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일그러진 관계를 바로잡고 싶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꿈속으로 도약한다. 아니, 도약이 아닌 도피에 가깝다. 어쩌면 꿈을 꾼다는 것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주는 과정과는 거리가 먼,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망에 대한 처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현실이 된 꿈속에서, 아님 꿈같은 현실에서, 아니 차라리 악몽 같은 현실에서 나는 벌레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 자의식은 나의 일이며 너의 일이며 우리의 일이다. 그렇게 카프카는 서로 적들에 둘러싸여 있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 보여준다. 

원재상, 강화 플라스틱, 2013

원재상은 스티로폼 덩어리를 조각한다. 마치 점토 소성하듯 큰 칼로 떠내기도 하고, 삐죽하게 돌출한 가시 같은 형상을 덧붙여 만들거나 한다. 그렇게 만든 형상을 모본 삼아 형태 그대로 폴리로 떠내는데, 얼핏 안으로 패이거나 밖으로 돌출한 유기적인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비정형의 추상조각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추상적인 형상 속에 사람이 숨어있다. 웅크리거나 누워있는 사람들이며 서 있는 사람들이다. 눈 코 입은 물론이거니와 일체의 세부가 생략된, 정황적으로나 심정적이 아니라면 사실상 사람임을 알아 볼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패이거나 삐죽삐죽한 이 형상들이며 그 형상들이 암시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무엇이며 누구란 말인가. 사람임을 거의 알아볼 수가 없는, 사람임을 거의 포기한 것 같은 이 형상들은 공공연한 적의와 공격의 화신 같고 여차하면 기꺼이 공격해올 무기들 같다. 모든 세부가 생략되면서 세부를 이루던 에너지가 오로지 가시를 향해서만 집약되고 응축된 가시인간 같다. 

이 가시인간을 보면서 불현듯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렸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아니었듯 그들도 처음부터 가시인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신했듯 그들도 가시인간으로 변신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변신한다. 공격적이다가도 우호적인 몸짓이 보이고 날카롭다가도 부드러워진 눈빛이 보이는가. 그렇게 변신하고 둔갑한 몸짓이 보이고 눈빛이 보이는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심리가 밀어올린 것이고 정서가 투사된 것인 탓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지만 잘 보면 보인다. 트랜스포머는 기계공학이 아닌 유기체공학의 일이었다. 바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네가 겪는 일이었다. 그렇게 가시는 심리가 밀어올린 것이고 정서가 투사된 것이다. 공공연한 적의와 공격의 화신이다. 작가가 인간 일반을 보는 관념이 반영된 것이다. 타자를 향한 작가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며,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되돌려진 자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다시,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었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고 싶어 했을 리는 없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그레고르 잠자의 욕망이 아닌 타자들의 욕망이다. 벌레 같은 놈. 벌레만도 못한 놈. 네가 벌레가 되면 내가 너를 기꺼이 밟아줄게. 그렇게 타자들의 욕망으로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변신하게 하는 것은 타자들이며 타자들의 욕망이다. 공격적인 몸짓에서 우호적인 몸짓으로 이행하게 해주는 것도, 부드러운 눈빛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신하게 해주는 것도 타자들이며 타자들의 욕망이다. 이처럼 그대들의 욕망으로 나는 가시인간이 되었다. 그레고르 잠자가 그대들의 욕망에 봉사했다면, 나는 그 욕망에 한껏 날을 세우고 각을 세워 방어기제를 강조한다는 점이 다르다. 

가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덕에 아름답게 기억될 수가 있었고 전설이 될 수가 있었다. 릴케는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다. 가시에 찔린 것이 원인일 수도, 가시에 찔려 온 몸에 퍼진 독이 원인일 수도 있다(실제로는 이로 인한 파상풍이 원인이라고도 하지만, 여하튼). 가시와 치명적인 독이 릴케를 죽인 것인데, 이 얼마나 시인에게 어울리는 죽음인가! 가시는 시인의 영민한 머리를 감싸고 보호하고 영원히 빛나게 할 화관이다. 

그러나 작가가 제안하는 가시인간의 몸에 칼처럼 돋아난 가시는 이런 낭만적이고 시적인 가시와는 그 종류가 다르고 성분이 다르고 의미가 다르다. 그렇다면 왜 나는 너에게 칼을 겨누고 가시를 곧추 세우는가. 혹 그 칼이며 가시는 너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향한 것은 아닌가. 나를 향한 가시? 여기서 가시는 자기 내면에 퍼진 독으로 변질되고 공격은 트라우마로 이행한다. 나의 몸에 가시가 돋아나게 한 것은 네가 아닌 나 자신의 내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진 독이었고 내 스스로 키운 상처였다. 상처는 너무 깊어서 숨을 수가 없고 너무 커서 싸안을 수가 없다. 그렇게 가늠할 수도 측량할 수도 없는 상처가 나를 찌르고 너를 찌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도 유독 상처를 주제의 표면 위로 부각하는 이면에는 남다른 자의식 말고는 달리 이유를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작가가 타자를 보는 관점은 공격이 아니었고 적의가 아니었다. 자기연민이었고 상처의식이었다. 상처의식을 다른 말로 하자면 결여의식이며 결핍의식이 될 것이다. 토마스 만은 예술이란 결핍 위로 샘솟는 무엇이라고 했다. 결핍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는 말이다. 간절함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상처의식 곧 결핍의식은 예술의 본질이며 존재의 본성에 맞닿아있는 경우로 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독(Poison)이라고 했다. 독은 양가적이다. 못 쓰면 치명적이지만, 잘만 쓰면 죽을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바로 파르마콘이 그렇다. 잘 쓰면 묘약이 될 수도 있고 못 쓰면 독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결국 묘약과 독약은 하나이다. 독으로 하여금 독약이 되게 할 것인가, 아님 묘약이 되게 할 것인가. 당신이 보기에 작가의 조형은 공격으로 보이는가, 아님 상처로 보이는가. 위선보다는 위악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작가는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위선보다는 위악을 택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악은 악이 아닌 위악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이면의 자기연민이며 상처를 들키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저마다의 자기연민이며 상처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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